소설리스트

괴수처럼-54화 (54/287)

< [13장-3] 믿음의 종류 >

“으음….”

“미인계는 안 통하는데.”

앳된 소년의 목소리에 깬 소녀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곧, 밤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사르르 얼굴을 붉혔다.

“...오해하지 마시오. 무방비한 장소에서 자는 건 처음이라서 어쩔 수 없었소. 밤새워 뒤척이며 잠을 청해도 안 돼서 내린 결단이었소.”

“일단은 믿어주지.”

“정말이오!”

“알겠으니 우선 씻어. 공동샤워장은 복도에서 왼쪽. 너도 사냥꾼인데 몰래카메라에 찍히는 실수를 하진 않으리라고 믿겠어.”

시링 팽에게 세면도구와 수건 등을 쥐어서 내보냈다.

동시에 씻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혹시라도 먼저 돌아오면 문밖에 세워둬야 하기에 교대로 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밤새 빠진 근육을 보완하며 2시간쯤 기다리자 그녀가 돌아왔다.

아무리 여자지만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닌가?

“불안해서 한참을 망설였소.”

“너…. 감이 약해졌구나.”

일방적으로 ‘믿음’을 농락당해서 마음이 꺾인 것이리라.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초한 일이다. 원래 같으면 죽었다. 농담이 아니라 계약자가 아니었으면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이리라.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것 같소.”

“내공 다음은 주화입마인가? 틀린 표현은 아닌데….”

무일도 태양신을 의심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 태양이 터져버리거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동정이라면 원망할지도?

즉, 불신할 일 없다.

경전 하나 없는 자연물인 만큼 믿음이 형성되기도 쉽지 않지만, 여전히 그 실존 여부를 놓고 말이 많은 신(神)을 믿는 사냥꾼들보다 안정적이다.

그 대신, 너무 맹신해서 약해질 때도 있다.

일식(日蝕).

카르 4세도, 낮에 갑자기 태양이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던 고대인들의 사고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달이 가린 일시적인 현상?

그건 ‘해님의 가호’가 ‘달님의 꼬장’에 차단됐다는 해석도 된다.

“책임지시오.”

“...다 큰 처자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어제는 몸을 준다고 하더니 오늘은 책임지란다.

피식 웃고는 그녀에게서 세면도구를 돌려받고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7종 계약자를 누가 책임져?

땀으로 흠뻑 젖은 몸으로 어기적어기적 남자샤워장으로 들어갔다가 10분쯤 뒤에 나온 무일은 말문이 막혔다.

스콜레옹 포르소를 껴안은 채 남성탈의실 문 옆에 쪼그려 앉아있는 시링 팽 때문이었다.

비 맞은 병아리가 따로 없다.

“카레 공.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오.”

“뭐가?”

“내가 몸과 목숨 빚을 갚을 때까지 지켜줘야 할 것 아니오!”

그러면 빚이 더 늘어나는 것 아닌가?

무일은 핀잔주기를 포기하고 카르세리안 레이소만 간단히 챙겨서 집을 나왔다. 그 뒤를 시링 팽이 바짝 쫓아왔다.

흉흉한 스콜레옹 포르소만 없으면 딱 여자친구 같다.

“무림에서는 주화입마를 어떻게 해결해?”

“다양하오.”

“그런 말은 나도 할 줄 알아.”

“...아름다운 처녀의 순결로 정기를 회복하거나, 희귀한 괴수의 심장을 섭취해서 내기를 충당하기도 하오. 또…. 명문가에서는 사당에 백일기도(百日祈禱)를 올리고,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내공을 쌓는 자도 있소.”

이 모두가 ‘믿음’을 회복하는 수단이다.

무림이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그딴 건 없었다.

고대의 무협지는 그냥 꿈과 희망, 바람만 욱여넣은 전래동화였던 모양이다.

『무림인 = 무허가 사냥꾼』

최후의 환상마저 접은 무일의 머릿속에 간단한 공식이 성립됐다.

덕분에 ‘자신감’마저 생겼다.

대를 이어 100년, 1000년씩 연구한 무술을 [예측]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완전히 씻겼다.

기술적인 측면이 강한 [예측]에서 밀릴 수 있다.

하지만 [예감]에서 이기면 끝이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도 ‘미래’를 앞서갈 순 없기 때문이다.

‘중국산 아가씨가 도움됐군.’

역시, 아는 게 힘이다.

무림인에 대한 환상을 품은 채 싸웠다면 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환상이 깨지고 나니 딱히 두려움이나 걱정은 안 생겼다.

인류를 향한 맹목적인 헌신.

그 어리석지만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자신이 질 것 같지 않았다.

강한 ‘마음’만으로 강해질 수 있는 시대다.

일시적인 만용과 객기가 아닌 뚜렷한 신념을 MID 시스템으로 ‘정령’처럼 구체화한 힘은 인간에게 초현실적인 감을 가능케 했다.

『초감각』

무림에서 ‘내공’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는 [예감]과 [예측]을 묶어서 ‘초감각’ 혹은 ‘제육감’이라고 부른다.

아시아, 호주, 유럽은 정식 명칭을 붙이지 않았다.

거창한 이름을 달기에는 수호자가 너무나 막강한 탓이다.

즉, 강력한 계약자가 부족해서 사냥꾼의 위상과 중요성이 올라간 대륙에서만 ‘감’을 뛰어넘은 ‘능력’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명칭을 부여받는 의미?

주관적인 상상력을 표현하는 창작활동은 시험과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과목에 수학처럼 ‘창작(創作)’이라고 명시되면 어떻게 될까.

사회적인 지위가 약속된다.

실력 좋은 사냥꾼이 정치인,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중국의 무림인들처럼.

“지금부터 일하러 갈 건데도 따라올 거야?”

“당연하오.”

어깨를 으쓱한 무일은 버스를 탔다. 슬슬 중고차라도 한 대 구해봐야 할 텐데 동해에서 허망하게 잃은 정신적인 타격이 너무 컸다.

잘 풀리면 스포츠카 한 대 뽑아준다고 했으니….

헌병대장 문장춘이 허언하진 않았을 것이다.

서울방송국장은, 딸 홍영희가 무사히 명문가 첩으로 들어가면 침묵의 대가로 헌병대장에게 이것저것 선물해주기로 되어있다.

무일은 거기서 떨어진 콩고물을 주워 먹는 셈.

‘누군가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온 거겠지.’

세상이란 이리도 잔인하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 천국(天國)은 성립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조금만 따져봐도 허점이 드러난다.

내 집이 커지면 친구 집이 작아진다.

내 아내가 둘이면 친구는 혼자 산다.

양보?

욕심을 버리라는 설교를 듣는 순간부터 불행이다. 그건 행복만 가득한 천국에 전면으로 모순된 결과다.

평생 성욕과 물욕을 절제하고 사는 수녀와 스님의 삶을 행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신이 내린 시험, 고행(苦行)이란 표현을 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순진한 발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할 때가 많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어째서일까?

그건 남을 짓밟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진하게 ‘선의의 경쟁’이 있다고 믿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업종의 경쟁회사가 흥하면 자회사는 부도난다. 오너(owner)의 경영수완 문제가 아니라 수요와 자원이 한정된 탓이다.

학업성적도 마찬가지. 공동 1등이란 없다.

내가 올라가면 남이 떨어진다.

내가 떨어지면 남이 올라간다.

이 세상의 평화와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완성된다. 선교(宣敎)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서양의 신, 그리스도처럼.

신의 죽음이 어째서 인류를 위한 희생인지 불가사의지만.

아무튼, 성경에는 ‘진리’가 담겨있다.

『구원받으려면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카르 4세도 같은 생각이다.

자신의 희생에 ‘의미’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흠. 시간 아까우니 넌 한국어라도 연습해.”

주변에 ‘시간 낭비하며 사는 여자(선지혜)’는 하나로 충분하다.

나태한 생활은 용납할 수 없다.

무일은 스마트폰으로 ‘한국어 심화과정 - 예쁜 아가씨&소녀 말투’ 앱을 실행한 후에 시링 팽에게 넘겨줬다.

어순 자체가 개그프로그램인 유키 짱에게 추천할 예정이었는데 미리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중국산 아가씨는 싫다는 얼굴로 고분고분 따랐다.

그녀가 말한 ‘몸’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늘은 수련 안 하시오?”

“배웠으면 실천해야지.”

무일이 찾은 곳은, 한국인들이 먹고 마시는 거의 모든 유제품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우유’ 본사였다.

특공대가 됐음에도 그의 주요 수입원은 ‘염소 젖’이다.

슬슬 염소랑은 안녕해도 좋으련만, 염소가 사는 산골까지 들어가려는 사냥꾼이 현재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들에서 풀 뜯는 젖소로 대처해도 좋으련만,

“오오! 카르 4세! 나의 영원한 친구!”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늦지 않게 와줘서 고마워! 저지방 우유도 믿을 수 없다며 안 마시는 까다로운 고객이 끊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수요가 있다면 힘써봐야죠.”

한국우유 사장 ‘강민우’는 한국에서 제법 잘 사는 부자다.

독점 중인 낙농업(酪農業) 시장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서울에 ‘착한 가격의 가공식품’을 유통하는 자선사업도 하고 있다.

그러는 속셈은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통령 당선!

양복이 잘 어울리는 휘청한 키에 준수한 얼굴, 무소속으로 국회의원만 12년째 하고 있으니 완전히 헛된 꿈은 아닌 것 같다.

강민우가 매번 공약으로 세우는 ‘저를 뽑아주시면 우윳값은 변동 없습니다!’가 사라지면 속물처럼 안 보일 텐데.

그 대신, 약속을 철통같이 지키는 남자다.

“자네 신부도 무럭무럭 잘 크고 있네! 내년이면 중학생이지!”

“그, 그건 좀….”

그래서 가끔 무섭다.

사위로 삼아서 평생 염소 젖만 짜게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정말로 곤란하다.

선지혜에게 갚아야 하는 빚은 문제가 아니다. 강민우가 결혼증명서에 도장만 찍으면 대신 갚아준다고 호언장담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래 못 산다.

약물의 부작용으로 요절하는지, 강력한 괴수에게 걸려서 비명횡사하는지, 암살인지…. 현재로써는 모르지만, 이것만은 ‘그냥’ 알 수 있었다.

길어야 10년, 짧으면 올해.

이게 해결돼야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이쪽 처자는 누구인가?”

“보다시피 검사입니다. 저를 따라다니며 배우기만 할 겁니다. 수습사냥꾼? 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아아, 그런가. 난 또 이거라고.”

음흉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흔드는 강민우였다.

한국우유 사모님은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다.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흠. 그렇게. 일 마치고 마유주(馬乳酒)를 함께 못 마신다는 게 참 아쉬워. 말고기도 그렇지만 이게 참 별미거든.”

“그 맛은 신년행사 때로 미루겠습니다.”

차량은 총 다섯. 그중 하나에는 물탱크가 실린 트럭이었다.

나머지 네 대에 나뉘어 동원된 인부만 서른 명이 넘었다. 전원 2급 사냥꾼으로 한두 번 손을 맞춰온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움직임이 신속했다.

시링 팽이 본 그들의 얼굴에는 카르 4세를 보며 안도하는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신뢰.

그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젖을 짜러 가는 것치고는 준비나 인력이 너무 요란한 것 같소.”

“서울은 가축을 키울 공간이 없거든.”

시민들이 매일 싸지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용도로 돼지와 닭은 불가피하게 키우지만, 젖소와 염소 같은 초식성은 아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초원에서 뛰노는 녀석들에게 젖을 공수받는 수밖에.

“수련은 안 하시오?”

“나는 이미 최상이야.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최선을 다할 뿐이지.”

성장을 안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한국우유 원정대(?)는 레이더까지 동원해서 쉽게 염소무리를 발견했다. 5대의 차량은 넓게 산개해서 무리를 포위했고 간이울타리를 쳐서 포위망을 좁혔다.

인부들은 유축기(乳蓄機)를 등에 메고 바쁘게 움직였다.

순조롭다.

그 평화로운 전경을 보자면 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한국어 공부하기 귀찮은 시링 팽은 섬섬옥수로 입을 틀어막고 크게 하품하며 눈물마저 찔끔했다.

“...감을 완전히 잃었네.”

“무슨 일 있소?”

“있지.”

차량 천장에 앉아서 망을 보고 있던 카르 4세가 빠르게 뛰어내리더니 염소무리 방향으로 돌진했다.

뽑아든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땅을 훑으며 지나간다.

칼날이 상하진 않겠지만 왜?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땅속에서 솟아나 메뚜기처럼 도약한 육지형 참치, 1종 괴수 암투나 무리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습격할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참치들은 먼저 기습해온 ‘먹이’의 이상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빠르게 접근했다.

이 조그마한 녀석이 가장 위험하다!

카르 4세가 13년 동안 꾸준히 쌓아온 [업보]는, 이 일대에 산개해있던 모든 암투나의 집중공격을 유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늘에서 참치 때가 쏟아졌다.

“쯘쯘빵…. 정말 굉장해요….”

방금 배운 아가씨(?) 말투로 시링 팽이 중얼거렸다.

은색 피로 물든 외투를 휘날리며 종횡무진 하는 카르 4세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먼지조차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일격필살만을 추구한다.

막연히 꿈꿔왔던 대협(大俠)의 풍모!

전통무림에서 살아온 소녀의 눈에 콩깍지가 씌기 시작했다.

< [13장-3] 믿음의 종류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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