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2] 믿음의 종류 >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그 압도적인 크기는 미국의 ‘천공도시’를 가볍게 웃돌고 있었다. 저기서 사는 야생괴수만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도 서울은 끝장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꼬리지느러미를 몇 번 위아래로 휘저은 ‘고래 괴수’ 웨일풍은 빠르게 고도를 높였고, 곧 서울 상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완패했소, 카레 공.”
기운 없는 목소리로 시링 팽이 선언했다.
카르 4세에게 포르 13세는 검술조차 필요없는 상대였다. 어떻게 공격해올지 알고 무기의 우위가 있더라도 수준 차이가 극심하면 무의미했다.
무일은 겸손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한 격차고 당연한 결과였으니까.
“일단 옷가게부터 가자. 그런 꼴로 돌아다닐 수 없잖아.”
“알겠소.”
“원하는 취향이나 상표 있어?”
“카레 공이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주시오.”
“아니, 그래도 네 옷인데.”
“이 몸은 패배했고 목숨을 빚졌소. 그러니 이 몸과 목숨은 앞으로 당신 것이오. 하지만 마음만은 승복하지 않았음을 명심하시오!”
앞장서서 걸어가던 무일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시링 팽의 뒷말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씨까지 바라면 사치고 몸만 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7종 계약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멈췄던 발걸음을 뗐다.
그럼 그렇지.
동정남의 인생이 쉽게 풀릴 리 없다.
옷가게 여종업원이 추천하는 옷으로 대충 사입히고, 식당도 ‘카레 공의 뜻대로.’라는 간편한 주문으로 손쉽게 해결했다.
“팽 소저. 그만 돌아가는 게 어때?”
“어디를 돌아가라는 것이오.”
“본부. 방장이 기다릴걸?”
아까는 웨일풍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날이 어두컴컴해졌다.
아름다운 처자가 밤길을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은 서울이지만, 너무 늦게 가면 미호 첸이 걱정할 것이다.
포르 13세에게 찝쩍댈 건달들을 걱정해줘야 하려나?
성범죄, 성희롱은 발각 즉시 사형이다.
계약자로 성장할 가능성 있는 재목을 허망하게 잃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참 잘 죽는 세상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형제도는 공포정치의 냄새를 풍기지만 공정성만 확보되면 ‘인구 감소’와 ‘치안 확보’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괴수를 경계할 인력도 부족한 판이다.
인류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지만, 사냥꾼은 여전히 미숙한 초보자로 넘쳐난다. 그리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사망신고가 끊이지 않는다.
양아치, 깡패, 조폭, 불량배….
이 녀석들의 ‘낭만’에 할애해줄 시간 따위는 없다.
“...스승님은 바쁘시오. 그래도 간단히 연락은 취해두겠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데.”
부모에게 외박한다고 허락받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 사회, 평판, 연애 등이 혼돈으로 뒤섞인 오묘한 상황이다.
“이 몸과 목숨은 앞으로 당신 것이오. 그리고 나는 몸과 목숨 빚을 갚기 전까지 떠날 수 없소.”
“빚은 없는 걸로. 잘 가.”
“거절하오.”
“왜? 내가 무상으로 해주겠다는데.”
“카레 공이 내게 명령할 권리는 없소. 마음만은 내 것이기 때문이오.”
무일의 이해영역을 벗어난 사고방식이었다.
이것도 수호자의 영향일까?
꽁꽁 묶어서 본부로 택배 붙인다는 놀라운 발상도 잠깐 했다가 포기했다. 아까처럼 계약자를 걱정한 웨일풍이 서울에 접근하기만 해도 난리 난다.
그래서 집까지 함께 왔다.
다음 달에 개성시로 이사 갈 예정이지만, 그전까지는 이 5평짜리 임대주택에 좀 더 머물러야 한다.
칸막이조차 없는 원룸에서 ‘이러쿵저러쿵 가능한 처자’와 동거하기에는 좀 많이 좁았다.
“흠. 겨울 이불을 바닥에 깔면 어떻게든 되려나.”
“카레 공.”
“왜?”
“집 출입을 너무 쉽게 허락하는 것 아니오. 남자가 단호하게 3번쯤 거절해줘야 흑심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단 말이오.”
시링 팽의 진지한 얼굴을 힐끔.
맨바닥에 이불을 깔던 무일은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이나 자.”
“...내가 여자로 안 보이시오?”
“동정남이라고 깔보지 마. 너보다 훨씬 예뻤던 후배와 이보다 더 좁은 공간에서 함께 붙어 잔 적도 있으니까.”
처음은 합숙훈련 때였다.
그 뒤로도 몇 번씩 함께 잤던 것 같다.
특공대 사나이란 작자들이 까마득한 후배를 어려워하며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주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나섰다가 제대로 코 꿰였다.
게다가 당시의 특공대에는 여자가 없어서 ‘여성전용’도 없었다.
그래서 생긴 일화도 적지 않다.
“그 후배가 선지혜 회장이오?”
“맞아. 예쁜 건 지금도 인정하는 부분이지.”
여러 가지로 민폐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선지혜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해본 적 없는 ‘재벌 아가씨’의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달라지기 시작한 건 무일이 특공대를 떠난 직후였다.
아주 늦게 찾아온 사춘기 소녀 같았다.
상식을 벗어난 무모함은 예측할 수 없고, 품고 있는 생각은 정상치에서 두세 발자국쯤 멀어진 느낌이다.
‘마음의 충격이 컸나….’
무일이 본 지금의 선지혜는 그랬다.
일생일대의 소원이라며 결혼해달라는 후배 선지혜의 고백을 단칼에 걷어찼다. 심지어 ‘일이나 해!’라는 식으로 막말하고 말았다.
그 탓에 마음이 늘 무겁고 복잡하다.
남자가 넘겨준 침대에 조심스럽게 누운 시링 팽이 이불에 코를 대며 말했다.
“침대에서 여자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나오.”
“아, 그거? 홍영희 양이 잠깐 앉아있어서 그래. 아무리 실패자라지만 화장과 향수는 적당히 하는 게 보기도 좋은데 말이야.”
“...그 아가씨 몸은 좀 괜찮소?”
“몰라. 본인이 괜찮다고 한 이후부터 신경 껐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다.
카르 4세가 하던 일을 다른 사냥꾼에게 인계하고 홍영희를 구하러 간 동안에, 혹은 가는 바람에 ‘사냥꾼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4종 괴수가 서울로 접근하는 걸 저지하다가 둘이 죽었다.
카르 4세가 거기에 있었다면 없었을 희생이다.
떠나는 그에게 ‘여긴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씩씩하게 말하던 두 청년은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장래식장에서 울다가 실신한 옛 애인.
시체 없는 관을 차며 발광하던 남동생.
어쩌면, 미래에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를 가능성을 품은 사냥꾼들을 허망하게 먼저 보낸 선구자(先驅者)의 기분은 착잡했다.
‘운이 나빴어.’
현실은 RPG 게임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오는 괴수 레벨이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까지나 고정적인 경험치와 수입,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카르 4세의 결정은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구해낸 여자가 은혜를 부정했을 뿐이다.
무일이 문세웅을 말리지 않았다면 홍영희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친부가 얼마나 대단하던 말이다.
“하오의 소식도 모르시오?”
“하오? 하오 쟝? 그 중국산 후레자식?”
“...그렇소.”
“녀석이라면 온종일 게임만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 게임 아이템을 이것저것 팔아서 현금을 구한다는 모양이야.”
문세웅이 후려친 손해배상금을 다 갚으려면 허리가 휠 것이다.
스스로 한 건 해낸 아들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헌병대장 문장춘은 그날 일을 뉴스, 신문, 인터넷 등에 뿌려댔다.
당연히 ‘진실보도’였다.
약간 각색된 부분이 있다면 ‘카르 4세’의 활약 일부를 ‘문세웅’에게 돌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 대가로 푸짐한 선물을 많이 챙겼다.
각설하고,
진실보도의 피해자는 다름 아닌 홍영희 본인이었다.
아들을 ‘영웅’으로 만들겠다는 장대한 계획을 품은 헌병대장이 손을 쓰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대하드라마가 완성됐다.
영웅이 탄생하려면 악역은 필수!
『화산파 망종, 하오 쟝!』
『망종의 요부, 홍영희!』
홍영희에게는 다행히도 ‘망종의 요부’라 악명은 ‘음모론’에서 그쳤다. 그녀의 부친인 ‘서울방송국 국장’이 필사적으로 막은 덕분이다.
하지만 국장이 치른 대가는 적지 않았다.
진실보도는 어디로?
누구보다도 가장 진실에 근접한 사실만을 국민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는 공중파 수장이 저지른 ‘비리’였다.
서울방송국장은 헌병대장에게 제대로 약점 잡힌 셈이었다.
오판으로 신세 망친 홍영희는?
열흘 뒤에 결혼한다.
딸에게 달라붙은 ‘이중첩자’ 의혹을 털어내기 위해 ‘대한민국 충신가문’에 첩으로 시집 보낸 것이다.
국민이 알 필요 없는 ‘사적인 결혼’ 소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방송에 끼워 넣는 서울방송국장의 노력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관심 없다고 한 것치고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소.”
“친구의 결혼이라서.”
“홍 소저가 카레 공의 친구였소?”
“아니. 남편 쪽이 친구야.”
대한민국에는 특수체질을 타고난 혈맥을 잇는 가문이 있다.
괴수의 피에 감염되지 않는 체질도 있지만, 괴수의 피에 감염돼도 멀쩡한 가문이 있다.
특히, 후자는 대단하다.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에서 ‘괴수의 힘’을 쓴다.
물리법칙을 살짝 무시한 괴력부터 자연을 조종하는 초능력까지 그 능력은 다양하다.
하지만 국력(國力)으로는 취급 안 한다.
괴수의 은색 피에 ‘완전히’ 감염될 때마다 [업보]가 급격히 쌓이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쓰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이 친구도 여기에 해당한다.
특공대에서 놀다가 [업보]가 위험수위까지 쌓인 녀석은 혈맥을 잇기로 되어있던 친형이 복상사하는 바람에 가문에 소환됐다.
본처 외에도 형의 여자였던 첩만 넷.
대(代)가 끊기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보험은 많을수록 좋다는 계산일지도.’
친구의 단순한 성격을 떠올리면 아무 생각 없었을 것 같다.
특수체질을 타고난 명문가가 다 그렇지만, 이런 ‘능력자’가 많을수록 가문의 명성과 권세도 막강해진다.
그래서 명문가의 여자들은 아랫배가 꺼질 날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특수체질이 성공적으로 유전될 가능성은 10% 미만.
즉, 명문가는 사연 있는 여자만 시집가는 곳이다.
지금의 홍영희처럼.
그래도 명문가에 시집간다는 자체만 보면 자랑거리다. 명문가에서는 능력자를 겸해서 계약자의 탄생도 기대하기 때문에 ‘자연미인’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사법(邪法)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소.”
“이게 왜?”
“쓰면 쓸수록 강력한 괴수를 유인하는 힘이오. 주인을 베는 양날의 검. 하지만 그 광적인 집착은 본국도 피차일반이니 더 말하지 않겠소.”
싱겁게 할 말을 마친 시링 팽은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소꿉친구도 그렇고 연루된 여자도 불쌍하다.
자신이 도와주겠다고만 안 했으면….
그런 후회가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서울의 혼란을 틈타서 하오 쟝을 한국에 밀입국시키지 않았으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중국산 아가씨.”
“중국산이라고 하지 마시오. 중국에서 태어났으니 맞는 말이지만, 어감이 얕잡아보는 것 같아서 싫소.”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게 들리는 거야.”
“카레 공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잖소.”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패했다.
아마, 카르 4세가 침대 위로 올라와서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짓’을 시켜도 꼼짝 못 하고 당할 것 같다.
몸의 빚을 졌으니 저항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저 남자는 ‘유키 짱’의 말처럼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스스로 매력 없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시링 팽이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태블릿으로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그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렇다고 덮쳐달라는 건 아니지만.
이건 이것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이 남자는 곧 죽는다.
가더발트를 한낱 인간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
이 괴수와 하나가 되었던 ‘전(前) 계약자’는 혼자서 5종 괴수까지 쓰러트렸다. 하물며 이번 계약자는 아미파의 고수.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카르 4세가 죽으면 8년째 짝사랑해온 유키 짱이 슬퍼할 것이다. 그건 정말 싫지만, 무림인의 생명까지 포기해가며 승리에 집착 중인 스승의 분노도 두려웠다.
나는 어쩌면 좋을까.
시링 팽은 소리죽여 울었다.
“......뭐야.”
아침 햇살보다도 오른팔이 저려서 깬 무일은 중얼거렸다.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남의 팔을 베개로 사용한 소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스마트폰에는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다행히, 윤소영 때처럼 암호문은 없었다.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줘!』
발신자는….
이름이 ‘더럽히고 싶은 후배’로 되어있다!
분명 ‘선지혜’라고 해놨을 텐데?!
서둘러 전화번호부 프로필을 수정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안 된다. 오늘도 대한민국 세금은 엉뚱한 곳으로 세고 있었다.
< [13장-2] 믿음의 종류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