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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52화 (52/287)

< [13장-1] 믿음의 종류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7

[13장] 믿음이란 무엇인가.

학명: 썬피스트(태양을 비웃는 펭귄)

서식지: 사막

특징: 건조기가 따로 없어요.

위험도: 6종 특수

비고: 모래 위를 헤엄치는 썰매♬

***

괴수는 다양한 방식으로 번식한다.

짝이 필요하지 않은 무성생식도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암컷과 암술에 씨를 뿌리는 방식을 자주 쓴다.

괴수의 등장으로 동식물이 멸종하긴커녕 더 번성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 정해진 규칙은 없다.

원숭이가 플라돈(돼지 괴수)을 낳기도 하고, 바나나에서 볼트윙(날치 괴수)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 때문에 벌어진 엽기적인 사망사건도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어제 삼킨 수박씨가 괴수로 변하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괴수의 생식법이 이뿐일까?』

생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괴수 종류만큼이나 기상천외한 방법도 있다.

그중에 하나가 ‘정령(精靈)’이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정령들은 환경적인 요인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의 우연성이나 의지의 구체화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시체가 산을 이룬 무덤의 데빙걸.

폭풍이 폭풍을 삼키는 천공의 엘로엘.

모래와 역사가 잠든 유적의 이즈헬.

정형화된 뚜렷한 형태가 있진 않지만 ‘특정 요소’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이나 그 자체가 된 정령은 생성과 소멸이 제멋대로다.

그래서 불완전하다.

태어난 원인만이 삶의 이유다.

『용사를 찾는다.』

에쏘드. 정령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괴수다.

인류가 아는 모든 괴수를 통틀어 유일하게 여성이 아닌 남성을 선택하는 특이성은, 이 정령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기인한다.

남성이 무시되는 시대.

괴수와 미녀가 다스리는 세계에서 무력하게 살아가는 남자들의 비원과 망상이 모이고 모인 결정체가 ‘에쏘드’다.

정령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자문했다.

『저 용사는 ‘남자’일까요?』

아리송했다.

그래서 침묵했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꼼꼼히 적어. 팔다리 잘린 병신이 되어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더라도 남이나 타국 탓을 하지 않는다고.”

“...이런 걸 해야 하오?”

“당연하지! 네가 싼 똥은 남에게 치우라고 할 생각이야?”

각서를 작성하는 시링 팽의 표정은 안 좋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결과에 대한 내용을 줄줄이 쓰고 있었던 탓이다.

예를 들자면?

사망했을 경우에 그녀의 재산은 10년간 동결된다. 그리고 복수하려는 자가 저지른 피해보상비용으로 사용된다.

그 재산에는 ‘스콜레옹 포르소(시가 4,950억 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매품을 제외한 MID 개인용품 중에서 최고로 비싼 ‘세계 제2위 절단기’라면 도시가 파괴돼도 보수할 수 있을 것이다.

동결한 재산으로 복수대비?

대의명분은 그럴싸했지만, 카르 4세가 꿀꺽하겠다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당신은 어째서 안 쓰시오?”

“진즉 써놨지. 중국은 유서도 작성 안 시키고 사냥꾼 자격증을 주나?”

“본녀는 사냥꾼이 아니라 무림인이오!”

“킁. 콩이나 팥이나.”

무일은 이걸 참고하라고 이르며 ‘15년 묵은 유언장’을 넘겨줬다.

흉흉한 여자친구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장비하면서 서약 비슷한 문장이 추가로 갱신되긴 했지만 대체로 무난했다.

그에 비해 시링 팽은….

나라에서 두 손 두 발 든 무법자(無法者)였다.

허점과 비리투성이인 무기자격증조차 없이 무단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사냥꾼이 무림인이었다.

그녀가 한국인이었으면 즉결처분 감이다.

‘한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야.’

비꼬는 게 아니다.

민간인의 무기휴대를 엄격히 금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힘의 독점으로 군사독재도 잠깐 겪었지만,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무난했다.

괴수대응본부도 친절한 편이다.

헌병대가 무력보다 설득을 먼저 하는 나라는 얼마 없다.

깡패와 조폭 같은 ‘인간쓰레기’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줄 필요가 있느냐는 비난과 야유가 끊이지 않지만, 그들에게도 억울한 사연이 있을 수 있다.

범죄에 가담한 시점에 ‘사형’이란 건 변함없지만.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이제 됐소?”

“흠. 처음치고는 잘 썼네.”

“이런 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나 쓰는 것이오.”

유언장을 쓰는 무림인도 있다. 이렇게 체계적이진 않지만.

문파나 가문의 후계자를 정해놓음으로써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대비 안 하는 무림인이 더 많다.

패배를 생각한다.

그건 내공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능력을 극대화하지 않고 뒷일부터 걱정한다면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진다.’는 설명도 나름 정론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격언이 있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은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전장에서 도망칠 생각부터 하면 죽게 될 거란 뜻이다.

패배주의에 빠지면 진다.

고대에는 [예감]이나 [예측] 같은 능력이 없었지만, 그 대신에 군대의 사기(士氣)란 ‘무형의 가치’가 있었다.

중국의 무림인들도 그런 마음가짐일 것이다.

하지만 ‘각오’와 ‘오만’은 엄연히 별개다.

“시작해볼까.”

공터에서 대치했다.

만약, 함께 싸워온 친구들이었다면 카르 4세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공격했을 것이다.

상급기술 [공습]은 그러라고 있는 필살기니까.

하지만 그런 ‘멋진 기술’을 교양 수준으로만 익힌 카르 4세는 유리한 공격전략을 포기하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상체를 낮추는 것으로.

“좋소.”

시링 팽은 어째서 무기를 안 뽑느냐는 질문은 안 했다.

그녀의 [예측]으로는 카르 4세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스콜레옹 포르소를 회피하면서 빈틈을 노린 신속(神速)의 발검술, 일격필살뿐이다.

검술대결은 성립되지 않는다.

검끼리 충돌하면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일방적으로 싹둑 잘리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카르 4세가 자랑하는 [반격]도 쓸 수 없다.

포르 13세가 자신만만한 이유다.

“팽 소저. 마지막 기회를 줄게.”

“기회?”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어.”

“허세는 그쯤 해두시오.”

소녀는 피식 웃었다.

국가주석 첸지 죠는 이 정도 남자를 경계한 것이다.

카르 4세의 명성은 동영상조작으로 완성된 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군.”

4급 프로사냥꾼의 눈빛이 겨울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위기감지능력이 엇비슷했다면 ‘어떻게 해도 죽는다.’는 걸 깨닫고 항복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포르 13세의 실력은 여기에 한참 못 미쳤다.

제대로 짚긴 했다.

카르 4세가 쓸 수 있는 공격수단은 하나뿐이다.

빈틈을 노린 일격필살.

상대의 수법을 아는 이상, 방심하지만 않으면 이길 수 있다.

시링 팽의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다.

‘이걸 어쩐다? 머리를 자르면 방장이 광분할 테고, 허리를 잘라도 광분할 테고, 다리를 잘라도 안 돼, 손목을 잘라도 끝장.’

카르 4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예측]으로 스콜레옹 포르소를 피하면서 카르세리안 레이소로 그녀를 벨 수 있는 경로만 수십 가지 떠오른 상태였다.

어차피 검이란 베고 찌르는 2가지뿐이다.

검이 지나간 동선은 ‘선’에서 ‘면’으로 넓어지거나 ‘선’에서 ‘점’으로 좁혀진다.

이 세상에 피할 수 없는 검술이란 없다.

1차원과 2차원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재래식 무기는 3차원에 사는 인간을 그물로 낚듯 완벽하게 잡아낼 수 없는 탓이다.

그래서 대량살상무기가 무서운 것이다.

폭탄은 3차원 공간을 통째로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맨손은 좀….’

한 방에 기절시키지 못하면 저 ‘최강의 절단기’에 토막 날 수 있다.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죽는 건 사양이다.

카르 4세는 좀 더 감에 집중했다.

적당히 할 수 없다면 아주 진지하게 상대해주면 된다.

시링 팽의 [예감]과 [예측]을 완벽하게 분석해서 생각을 읽어나갔다. 그리하여 그녀가 취할 미래를 훔치고 농락한다.

“시작은 오른쪽 사선으로 빠르게 올려 베는 건가.”

“무슨!”

움찔하는 포르 13세에게 예고도 없이 도약했다.

세계를 다 뒤져도 몇 없는 ‘4급 프로사냥꾼’의 중얼거림에 발끈한 소녀는 익숙한 동작을 포기하고 ‘하단 베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벨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카르 4세가 충분히 회피하리라 [예측]하고 원심력을 이용하여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허리를 양단하고자 강하게 횡으로 휘둘렀다.

이건 검으로 막지 않고는 피할 수 없다!

무기의 절대적인 우위를 이용한 필승의 검술이었다.

하지만,

카르 4세는 이미 앞질러가고 있었다.

스콜레옹 포르소보다 빠르게 포르 13세를 스쳐 지나갔다.

‘무슨…. 어멋?!’

중국인 여성의 전통복장인 치파오를 입고 있던 시링 팽은 마음속으로 깜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허벅지를 바짝 오므렸다.

검술을 펼치기 어려운 자세가 됐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치파오의 붉은 바탕에 금실로 정성스럽게 수놓은 봉황의 목이 수평으로 베인 건 문제가 아니었다.

팬티가 베였다.

잘록한 오른쪽 허리에 걸쳐진 옷감이 깔끔하게 끊어졌다.

팬티 끈을 손으로 잡아당겨 가위로 자른 것처럼, 맨살에 생채기 하나 없이 완벽하게 팬티와 치맛단만 잘랐다.

“다음은 발끈하며 돌격인가.”

“얍!”

시링 팽은 저 중얼거림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되새기며 도약했다.

제 기능을 상실한 검은색 티팬티(무일도 이것만은 예상하지 못했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옷만 베는 기예를 할 수 있는 무림인은 많다. 하지만 그건 가만히 서 있거나 움직임을 [예측]하기 쉬운 민간인을 상대로나 가능하다.

그 얘기는….

‘나를 얕보고 있어!’

소녀는 연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검을 휘두르고 있다. 검술은 가문을 비롯한 수많은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내공도 3급 사냥꾼은 될 거란 평가를 받았다.

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모든 움직임을 읽히고 일방적으로 능욕당했다. 포르 13세는 생각의 전환으로 반전을 꾀했지만, 그조차도 카르 4세에게 간파되며 더한 굴욕을 맛봤다.

목숨 대신 옷이 차례차례 베였다.

이 이상 헐벗으면 사회적으로 회생할 수 없기 직전까지.

챙그랑!

시링 팽은 여태 무표정이었던 카르 4세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감함’이란 감정이 떠오르는 걸 보자마자 스콜레옹 포르소를 떨어트렸다.

더는 벨 곳이 없다.

카르 4세는 그런 의미였지만, 포르 13세에게는 아니었다.

자존심과 수치심을 밑바닥까지 내던진 끝에 이룬 ‘작은 성과’였다. 완전히 억지였지만, 이마저도 부정하면 살 자신이 없었다.

이게 아닌데.

지독한 악몽을 꾼 것처럼 모든 게 끝나있었다. 넝마가 된 옷과 떨어진 팬티가 그녀에게 현실임을 깨닫게 해줬다.

힐끔거리던 행인들은 아슬아슬한 시링 팽의 옷차림을 아쉬워했으나, 흉흉한 기세에 찔끔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펄럭!

특공대 외투가 시링 팽의 반라를 덮어줬다.

온갖 부정적인 상념으로 뒤범벅된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카르 4세가 빌려준 옷을 적셨다.

무일은 한탄에 가까운 숨을 깊게 내쉬었다.

딱히 모욕을 줄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예감]하고, 무인답게 깔끔히 죽여줘야겠다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했었다.

하지만 상대는 7종 계약자.

아무리 온순한 웨일풍이라도 공주님의 죽음이나 고통까지 외면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이미 정신적인 고통을 준 상태였다.

“장관이로군.”

아직 초저녁일 터인데 온 세상이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다.

일식처럼 순식간에 밤이 찾아온 서울은, 가로등 감지센서가 서둘러 어둠을 밀어냈지만, 낮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만약 이뿐이었다면 카르 4세를 감탄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웨일풍 / 7종 대형】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바위섬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했다.

서울 전체를 뒤덮진 못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저게 겨우 7종?

추락하기만 해도 서울이 사라질 것 같은 위용이다.

계약자의 실력이 과대평가됐다면 수호자의 크기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돼있었다.

‘...미국산보다 크겠는데?’

< [13장-1] 믿음의 종류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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