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51화 (51/287)

< [12장-4] 이름의 무게 >

기분이 많이 상한 시링 팽은 안 가르쳐줬다. 하지만 명성을 바라는 그녀의 정보는 인터넷에 이미 떠돌고 있었으니!

이건…?

심지어, 회원 500명의 팬카페도 있었다.

새로 바꾼 스마트폰의 성능을 가볍게 테스트해본 무일은 그녀의 수호자가 뭔지 알아낸 후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리지 마시오.”

“아니, 이건 감탄인데.”

그렇게 말해보지만, 소녀의 귀에는 위안으로밖에 안 들렸다.

본인이 팬카페를 관리하지 않음에도 500만(중국인) 회원을 보유한 윤소영에 비하면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무일이 알 리 없었다.

그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수호자였으니까.

【웨일풍 / 7종 대형】

수많은 판타지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고래’다.

전투능력은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체로 명시된 무지막지한 덩치는 4차 세계대전 당시에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녀석 자체는 온순한 평화주의자다.

그럼에도 7종인 이유?

웨일풍은 멀리서 보면 고래지만 가까이서 보면 유선형 화강암 덩어리처럼 생겼다. 그리고 온몸에 난 동굴(구멍)은 수많은 괴수의 ‘서식지’ 역할을 한다.

몸에 기생하는 그 괴수들이 문제다.

녀석들은 통제가 안 되는 ‘야생괴수’이기 때문이다.

“비웃어도 좋소.”

시링 팽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웨일풍은 그 덩치와 특징 때문에 수호자란 표현이 무색하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계약자를 지켜주기는커녕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무리다.

역할은 오직 하나!

생각 없이 처박는 볼트윙을 막는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비행체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비행체’에게는 가소롭다. 그 위용의 격차는 실제 ‘날치 대 고래’쯤 된다.

하늘에 떠다니는 섬.

그냥 이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다.

“미국처럼은 안 되나?”

미국은 웨일풍을 ‘비행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동굴에 기생하고 있던 모든 괴수를 박멸하고 ‘날아다니는 요새’를 겸한 ‘초대형 항공기’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 덕분에 미국은, 교통과 교류가 마비된 24세기에 유일하게 기동력을 보유한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시링 팽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아미파에서는 주먹구구식으로 3번 시도했다가 3번 전부 막대한 희생만 치르고 박멸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국가 차원의 병력을 동원해서 싹 밀어버릴 힘이 없었던 탓이다.

무림의 힘이 현재보다 더 강해지는 걸 우려한 정부의 원조가 없었던 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같은 무림인들마저 외면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오.”

“그래?”

쌀쌀맞게 대답하는 소녀에게 무일도 더는 묻지 않았다. 남의 나라 사정을 걱정할 정도로 한가한 처지가 아닌 까닭이다.

비겁한 수단.

중국에서 준비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방독면 쓰고 생화학폭탄?

전방위 확산형 산탄총?

원격조종 유도미사일?

미리 알든 모르든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단번에 끝장낼 수 있는 공격수단은 많다. 그 모든 패(牌)를 [예감]하지 못한다면 허망하게 패할 것이다.

“그 대신, 소규모로 응용하고 있소.”

이대로라면 ‘무능한 계약자’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시링 팽은 ‘소규모 응용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웨일풍은 덩치가 무지막지하게 크다.

이 단점이자 장점에 주목한 소녀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수직이착륙기’를 수호자 밑으로 저공비행 하는 강수를 뒀다.

인류가 제공권을 상실한 원인은 볼트윙이다.

하지만 웨일풍이 그 거대한 동체로 비행기를 가려주면 이 항공사고(앞을 안 보는 돌대가리 날치와 충돌하는)를 예방할 수 있다.

“호오~.”

“하지만 말 그대로 소규모요.”

볼트윙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웨일풍의 몸에 기생하는 야생괴수를 걱정하게 됐다.

더 위험해진 게 아닐까?

맞다. 기웃거리기만 해도 끝장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래의 몸속에 사는 세입자들은 계약자가 탄 비행기만은 공격하지 않는다. 계속 기생하고 싶으면 웨일풍의 눈치를 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기.

시링 팽이 탄 비행기만은 안전운행이 가능하다.

웨일풍이 ‘공중도시’로 탈바꿈한 미국에 비하면 정말 소규모였다.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겠네.”

7종 계약자인 시링 팽이 사냥꾼마저 된 건 필연이었다.

수호자의 호위를 기대할 수 없는 그녀는 스스로 단련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자존심 강한 소녀는 발끈했다.

“나를 동정하는 것이오?”

“하여간…. 적이란 관계는 이래서 문제야.”

무슨 말을 해도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집 앞까지 쫓아온 그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무일은 이마저도 오해를 사고 말았다.

집에 간다고 분명 얘기했는데….

“이런 외진 곳까지 나를 유인한 이유가 무엇이오.”

몸을 보호하듯 양팔로 가슴을 가리며 뒷걸음친다.

유인? 게다가 변태 취급?

무일의 이마에 주름이 쭉 그어졌다.

“팽 소저가 멋대로 쫓아온 거잖아.”

“정정하겠소. 쫓아온 나를 서울 밖으로 인도한 이유가 무엇이오.”

“저기가 내 집인데.”

5평짜리 임대주택을 가리켰다.

그걸 ‘이 동네’로 해석한 시링 팽을 이해시키기까지 또 한참이나 걸렸다. 그리고 집 내부를 보여줬더니 까무러치게 놀라는 거 아닌가.

하지만 ‘무림인 소녀’에게는 당연한 문화충격이었다.

찬밥도 이런 찬밥이 있을까?

아미파 주지를 궁지에 몰아넣고, 중국 주석이 8년 전부터 초빙하고 싶었다고 극찬한 남자의 생활은 서민이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첩(妾)은커녕 처(妻)조차 없는 건 둘째치고 단칸방?

검소하게 사는데도 정도가 있다.

청렴결백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소림사 동자승(童子僧)보다도 심했다.

“외람되오나, 카레 공은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사는 것이오?”

“어. 집세도 안 내도 돼서 좋아.”

사생활보호가 전혀 안 된다는 점이 유감이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다.

“이해가 안 가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대우해주지 않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당신의 행동은 모순이 너무 많소.”

“모순? 소꿉친구를 돕겠다고 목숨을 걸었던 팽 소저도 내가 보기에는 모순인데.”

“이렇게 위험할 줄 몰랐소.”

시링 팽의 수호자인 웨일풍은 ‘7종 대형’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은밀한 비행을 한다.

최신 MID 레이더에 안 걸리는 건 물론이고 살기(殺氣)가 전혀 없는 탓에 수호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물론, 낮게 날면 보인다. 섬이 구름 속에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웨일풍은 성층권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하늘 나는 고래’의 보호를 받으며 은폐기술이 탑재된 수직이착륙기로 착륙하면?

미리 알고 샅샅이 수색하지 않는 이상 발각되지 않는다.

“무모하게 사네.”

“내가 보기에는 카레 공이 더 무모하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사냥꾼의 삶은 위험한 줄타기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실력 차이가 극심하게 나는 사냥꾼 사이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카르 4세는 감이 뛰어나서 무모하다.

포르 13세는 둔감해서 무모하다.

이 역학관계를 경험으로 잘 아는 프로사냥꾼은 고개만 끄덕여줬다.

소녀의 면전(面前)에 대고 ‘네 [예감]이 둔해서 그래.’라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감을 ‘맹신’해야 하는 사냥꾼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다.

끝장내버려?

그럴 수 없다.

적이지만 시링 팽은 아직 어린 소녀다. 그리고 스스로 ‘양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면 카르 4세의 감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게, 스콜레옹 포르소?”

여자와 단둘이 비좁은 집에서 할 말이 딱히 없었던 27세 동정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소녀의 옆구리를 보며 물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저거랑 닿으면 ‘세상에서 3번째로 날카로운 절단기’라는 소개가 무색할 정도로,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싹둑 잘려나갈 것이다.

덤으로 자신도.

“그렇소. 탐나시오?”

시링 팽은 경계의 시선을 담아 물었다.

장난감판매장에 진열된 고가품을 물끄러미 보는 아이처럼 포르 13세의 스콜레옹 포르소를 쳐다보던 카르 4세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한 끝에 말했다.

“...아니. 나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아.”

선지혜의 사탕발림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참가한 경매장에서 ‘90억짜리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강렬한 끌림이 없었다.

남의 물건이라서?

그거랑 달랐다.

몸에 안 맞는 옷을 본 느낌이다.

“더 좋은 검(劍)을 찾는 본능은 검사(劍士)로서 당연한 마음 아니오?”

“정론이지만, 나는 내 감을 더 신뢰해.”

“그 말은, 포르 3세를 지금의 검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는 뜻이오?”

카르 1세는 카르 4세의 상대가 안 된다고 첸지 죠가 단언했다.

그렇다면 스콜레옹 포르소를 가장 오랫동안 보유한 ‘최강의 검객’은 어떨까?

날카로움으로 따지면 2등, 3등이다.

하지만 그 등수 차이에서 오는 절삭력은 실력으로 메꿔지지 않는다.

검사보다 재벌가로 알려진 ‘포르 1세’와 ‘포르 2세’는, 영국 왕녀 ‘카르 2세’처럼 몸보신 하며 시간을 끄는 명예직에 가깝다.

하지만 ‘포르 3세’는 아니다.

‘검존 아저씨를 보면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지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카르 1세’의 명성은 과대평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포르 3세’는 어떨까?

남아메리카를 연방도 아닌 단일국가로 병합한 브라헨티나(브라질+아르헨티나)에서 ‘인디오 용사’로 칭송받는 프로사냥꾼.

그는 용살자(龍殺者),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로도 유명하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전폭적인 지지로 ‘스콜레옹 포르소’를 지원받은 그는 수많은 무용담을 쌓은 끝에 ‘포르 3세’가 됐다.

그 용사를 카르 4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내 기권패. 아니면 기권승.”

“하아?”

“그 정도 되는 남자의 신념이라면 분명 그럴 거야.”

누구의 실력이 더 뛰어난지 우열을 가릴 문제가 아니다.

괴수가 아닌 인간을 상대로 뚜렷한 목적 없이 ‘그냥’ 싸우고 싶다는 본능에 휘둘리는 쪽이 무조건 진다.

경험과 지식이 크게 좌우하는 [예측]은 엇비슷하겠지만, 믿음과 양심이 중요한 [예감]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인류의 구세주를 베려는 배덕자가 베인다.

그러니 무승부.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경력’이 답일 것이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소!”

시링 팽은 너무나 기가 막힌다는 말투였다.

현재, 무림의 고수들이 ‘카르 4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뒤꽁무니 빼는 것처럼 한쪽이 ‘기권’하는 거라면 몰라도 양측이 동시에 대결 포기?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무림인’의 한계.

그들이 카르 4세를 쓰러트릴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고대의 무협지’를 너무 많이 읽은 탓에 ‘무림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무일은 승리에 대한 확신은커녕 자신감도 없었다.

“정말인데.”

“이길 자신 없다고 하시오! 질 것 같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시오! 그 ‘카르세리안 레이소’도 명검이긴 하나 ‘스콜레옹 포르소’는 이길 수 없소.”

“닿으면 잘리니까?”

“그렇소!”

“검이 검사의 생명이긴 하지.”

이 소녀가 흥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찮은 사냥꾼의 ‘견해(見解)’에 민감하게 반응할 가치가 있나?

대꾸하기도 귀찮아진 무일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건 ‘송아지 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는 탓이다. 아무리 차근차근 설명해줘도 경험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몸으로 깨닫는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카르 4세!”

“응?”

“비무(比武)를 신청하오!”

둔감하면 무모해진다.

스콜레옹 포르소를 쥔 시링 팽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싸움을 회피하는 ‘겁쟁이 소년’의 카르세리안 레이소쯤은 간단히 자를 수 있다는 [예측]이었다.

소녀를 보는 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세운 정의(正義)에 어긋나는지 가름해보는 것이다.

“...죽을 수도 있다. 물론, 나도.”

“무림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그런가. 위기인가.”

“기권은 카르 4세가 포르 13세에게 패한 걸로 간주하겠소.”

그건 좀 곤란하다.

승패는 ‘믿음’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날아온 양아치의 도발을 무시했다고 꺾일 만큼 하찮은 카르 4세의 [예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훌륭한 어른이 되려면 10년은 이른 것 같다.

“우선은, 잘못돼도 괜찮다는 각서부터 써.”

< [12장-4] 이름의 무게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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