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50화 (50/287)

< [12장-3] 이름의 무게 >

두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종국에는 중국어로 바뀌었다.

한국어에 약해서 우물쭈물한 시링 팽이랑 달리, 중국어도 유창하게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쏘아댄 선지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어른이 돼서 가차 없군.

한국산 ‘철없는 아가씨’에게 완패한 소녀는,

“맞소!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노출녀요! 수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트린 민폐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이오! 으아아앙!”

자포자기하고는 펑펑 울었다.

당장에라도 수호자가 출동할 줄 알았는데 잠잠했다.

아직 어린 10대 소녀를 울려놓고 승자의 미소를 짓는 연상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망설이던 무일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의자 취급하는 선지혜의 엉덩이를 들어 ‘공주님 안기’로 연계했다.

...이것 봐라?

자연스럽게 목을 조이려는(껴안으려는) 공주님의 양팔을 피했다.

선지혜는 이마에 당장 뿔이 돋아날 기세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무일은 싹 무시하고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동댕이치지 않은 게 어디야.

“팽 소저. 자기비하는 건강과 피부에 좋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서 ‘또 외간여자에게 작업 걸어?’라는 야유가 들렸다.

감수성 풍부한 소녀에게 폭언을 퍼붓지 말던가.

칠칠치 못한 후배를 둬서 여러모로 고생이라고 한탄한 무일은, 시링 팽이 진정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 괜찮소. 훌쩍!”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혈색이 안 좋군요.”

“그건….”

“껄끄러운 관계로 만나서 유감입니다. 지금은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의심스럽고 경계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째서 저런 죽을상인지 벌써 감이 왔다.

하지만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는 선지혜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조금만 더 말을 걸면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카르 4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역시나 그대로.

발전은 없고 한눈팔면 퇴보다.

이런 변변찮은 몸뚱이로 지형지물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기관총이나 산탄총을 피해야 하는 걸까?

관을 미리 짜둬야 할 것 같다.

(회장님. 아셔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기다려.)

자문단의 호출을 받은 선지혜는 눈꼬리를 치켜세우는 걸로 불만을 대신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었다.

이번에 시킨 일은 ‘수호자 훔치기’라는 놀라운 계획이기 때문이다.

두 용신과 판타이탄이 버티고 있는 일본의 보안은 철통 같고 도쿄에 드러누운 ‘9종 괴수 오니오프’를 자극하면 최악이라 피했다.

하지만 중국은?

땅이 넓어서 오래 걸리긴 했지만,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이래저래 소득이 많은 분쟁이었다.

남은 건….

“선배. 죽으면 알지?”

“뭘?”

“나도 죽고 한국도 끝인 거야.”

재미없는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 생각 없다.

용신 와이츠가 한국에서 완전히 손을 놓으면 10년 이내에 중국이나 일본에 합병될 것이다. 아니면 선유나와 박선영 같은 새로운 구세주가 등장할까?

거기까지 관심 없는 선지혜였다.

“마음대로 끝내지 마!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사람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은 게 누군데!

하지만 공주님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떠났다.

가까이 있던 시링 팽은 한국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대화를 들었지만, ‘설마, 그냥 해본 소리겠지.’라고 상식적인 판단을 해버렸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남자 따라 죽는 여자는 없다.

『내 사랑은 오직 너뿐이야!』

데이트 초짜들이나 가끔 쓸까?

인간은 천국(영원히 사는)을 이 땅에 재현했고, 성형수술과 유전자조작은 조물주의 불공정성과 개성을 우롱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와 남자는 살다 보면 또 만난다. 마음씨 착한 미녀는 더는 환상이 아니고 스포츠카 탄 미남도 사방에 널렸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아리따운 공주님만은 여전히 조물주의 영역이다.

왕자님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괴수는 못 속인다.

“...카레 공. 당신은 승리를 확신하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선전포고한 카르 4세였다.

그게 자신감의 발로였다면?

국가주석의 말만 들어보면 이건 대결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카르 1세가 누구인가?

세상에서 3번째로 날카로운 검,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가장 오랫동안 소지한 남자다. 이건 해석하기에 따라서 ‘검술의 최강자’도 된다.

시링 팽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전제가 방금 깨지고 오는 길이다.

『오래 소지했다.』

말장난이다.

나이가 많다고 현명해지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괴수와 싸우며 오랫동안 생존했다는 이유가 실력의 지표는 아니다.

카르 1세는 ‘4급 사냥꾼’이다.

4종 괴수를 혼자서 쓰러트렸다는 무용담도 들었다.

진실일까?

첸지 죠는 중국에 4급 사냥꾼이 많아야 ‘한둘’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시링 팽은 알고 있는 4급 사냥꾼만 서른 명이 넘었다.

검제, 빙후, 도성, 가면공자, 흑검살, 도존, 마선, 풍신, 뇌제, 화산공자, 도왕, 참마도, 검왕, 무명검, 검존, 검귀, 창신, 태극검, 무당신선, 제왕검, 귀살검, 검후, 검선녀….

전부 진짜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가짜라고도 믿지 않았다.

그랬는데….

“승리? 영화에서는 그걸 사망 복선이라고 해.”

무일은 슬쩍 말을 놓았다.

[예감]이 그러는 편이 좋다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친해져서 정보라도 빼내라는 걸까.

“예?”

“영화 몰라? 중국에는 영화관이 없는 건가.”

“아니요! 있소! 비록 본녀는 촌년이지만 영화관 정도는 알고 있소! 다만, 너무 뜬금없어서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오.”

“촌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

선지혜의 폭언이 뼈에 사무친 모양이다.

철없는 공주님….

여린 소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다니.

“승리와 영화가 무슨 상관이오.”

“이걸 이해시키려면 내 밑천이 다 드러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 힌트를 주자면, 죽을 각오가 없는 자는 죽일 자격도 없어.”

“...구결이오?”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음. 깨달음이라고 해둘까.”

“깨달음!”

한국어에 약한 시링 팽이지만 ‘깨달음’이란 단어는 확실히 인지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2번째로 날카로운 절단기, 스콜레옹 포르소의 13번째 보유자인 ‘포르 13세’이기도 했다.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흉흉한 스승님의 얼굴도 이 순간만은 싹 잊었다.

그녀의 수호자는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시링 팽은 천생 무림인인 까닭이다. 무공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하물며 눈앞에 남자는?

미호 첸이 언급한 ‘천하제일’에 가장 근접한 고수였다.

“왜 따라오는데?”

“...카레 공이 신성한 대련 중에 비열한 수단을 쓰지 못하도록 감시하려는 것이오.”

“그런가. 그쪽은 비열한 수단을 준비 중이로군.”

“피엔 싀!!”

“피, 뭐?”

“잠깐!! 얘기가 어째서 그리되는 것이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앞뒤 근거 없이 대충 알아맞힌다!

진짜 양심(?)도 없다.

특무대를 나서던 카르 4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착한 사람은 남을 의심할 줄 몰라. 하지만 거짓말쟁이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게 의심스럽지. 심지어 자신이 살아있는지조차도. 고대의 종교재판은, 신의 존재를 의심한 종교지도자들의 발버둥이야. 간단한 이치지.”

“...한국말은 너무 어렵소.”

“나는 그 많은 한자를 외우는 중국인들이 더 존경스러워.”

퇴근하는 김에 스마트폰 판매점을 들렸다.

다행히 아르바이트생은 잘리지 않고 여전히 이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덕분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는 굴욕을 또 겪진 않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우울했다.

스마트폰이 요절했다는 뜻이니까.

지하자원도 부족한 국가에서 참 민폐가 아닐 수 없다.

“수련 안 하시오?”

“이것도 훈련의 일환이야.”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동굴이나 산골에 처박혀서 ‘강력한 힘! 복수할 힘! 결혼할 힘!’을 외쳐대며 궁상떠는 무협지 주인공보다 훨씬 의미 있는 공부다.

온종일 벽만 보고 산 인간이 세상에 나와서 천하를 제패한다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희극보다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고전소설의 한계겠지.

낭만은 괴수가 등장하자마자 죽었다.

우상처럼 떠받들어지던 아이돌 여가수가 괴수에게 물어뜯겨 죽거나, 첨단장비와 유전자조작으로 만들어진 슈퍼영웅이 괴수에게 꼴깍!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이런 세상에서 강해지고 싶다면?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한다.

전래동화 속의 ‘마초 용사’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용사가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니다.』

『모험하다 보니 용사가 된 것이다.』

수많은 사냥꾼이 착각하고 있다.

잘못된 상식을 주입받으며 산 결과일 것이다.

전래동화는 불친절하다.

백설공주 이야기는 ‘옛날옛적에 마음씨 착한 공주님이 살았어요!’로 시작한다. 어째서 마음씨가 착한지에 대한 과정이 생략됐다.

백설공주를 키스로 깨운 왕자도 ‘백마 탄 왕자님’으로 끝이다. 이후에 백설공주를 행복하게 해줄 거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완제품.

시작부터 완전무결한 공주님과 왕자님이 풀어가는 동화 속 세상이다.

“카레 공. 유치원을 멀리서 구경하는 것도 수련이오?”

“저 아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어?”

“귀엽소.”

“맞아. 귀엽지. 그걸 느낄 수 있으면 성공한 거야.”

사냥꾼 대부분이 헬스장에 처박혀서 근력단련에 힘쓴다. 하지만 카르 4세는 육체적인 한계 탓에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다.

근력운동? 좋다. 힘이 더 강해지면 좋지!

하지만,

아무리 단련해도 괴수랑 팔씨름해서 이길 순 없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인생을 거는 건 어리석다. 하지만 사냥꾼들은 그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완벽해진 후에 싸우겠다!』

일단, 신화(神話) 속의 ‘전설의 용사’부터 찍은 후에 괴수와 싸우겠다는 뜻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과 패턴은 똑같다.

하지만 결과까지 똑같진 않다.

소설의 주인공은 첫걸음부터 완벽하지만, 현실의 주인공(자신)은 불완전하고 미숙하며,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생명보험도 없다.

“이해가 안 가오.”

“지킬 게 있는 자는 강해.”

“당연한 얘기 아니오.”

“이게 왜 당연해? 나는, 괴수로부터 처자식을 지키려다가 개죽음당한 사내를 셀 수 없이 많이 봤어.”

“만용(蠻勇)이란 것이오?”

“이 말뜻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나는 팽 소저에게 지겠지.”

무일은 비좁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은근슬쩍 엉덩이를 만지려는 행인의 손목을 분지른 시링 팽이 뒤따라왔다.

묘했다.

중국에서는 칼만 차고 있어도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는데 소년은 도통 양보해주지 않는 시민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간신히 빈 공간에 설 수 있었다.

소녀는 상황이 달랐다.

화장기 하나 없는 미모는 ‘계약자’라는 신분증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계약자인지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비좁은 지하철이지만, 시링 팽의 주변만은 텅텅 비었다.

“...카레 공. 사람들이 왜 이러오?”

“지하철 처음 타봐?”

“아니요! 두 번…. 아니, 다섯 번쯤 타봤소! 촌년이라고 무시하지 마시오!”

포로나 다름없는 여자가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교체한 스마트폰으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서는 괜찮은 모양이다.

빈 곳이 많은 시링 팽 앞으로 자리를 옮긴 무일이 물었다.

“중국의 지하철은 어떤데?”

“그냥 평범하오. 치한도 있고, 행인이랑 부딪치기도 하고, 소매치기도 있고.”

부주의도 이런 부주의가 없다.

하지만 수호자가 난동부리지 않는 ‘부류’라면 가능한 일이다.

유키 짱의 판타이탄처럼 ‘아기 만들기 빼고 전부 OK!'인 관대한 성격이거나, 교감이 약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계약하기 무척 힘든 ‘희귀한 괴수’일 것이다.

“...팽 소저. 계약한 수호자가 뭐지?”

“여태 모르고 있었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시링 팽’이나 ‘포르 13세’가 누군지도 몰랐어.”

“큭!”

배려심 없는 ‘이유’가 비수가 되어 시링 팽을 콕콕 찔러댔다.

코딱지만 한 눈물까지 찔끔하며 낙담하는 미소녀에게 ‘유명하신 검성(劍星)’께서 선심 쓰듯 물었다.

“뭔데? 지금부터 기억해줄게.”

< [12장-3] 이름의 무게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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