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2] 이름의 무게 >
당연한 얘기지만, 미호 첸은 ‘앙그 뭐시기’를 모른다.
수틀리는 모든 적은 막강한 8종 수호자가 대신 처리해주는데, 그녀가 ‘물리충격 85%를 흡수해주는 장갑’ 같은 걸 알아서 뭐하겠는가.
그래도 워낙 유명한 물건이니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기억하지 못할 뿐.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숙적’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도와주겠다는 건가, 싫다는 건가? 주석.)
(일단은 끝까지 들어주셔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알겠네.)
중국의 본부 정보과에서는 카르 4세의 전투력 측정을 중단했다.
그 프로사냥꾼이 ‘앙그류 그랑모리’를 착용했을 경우의 시너지효과는 이미 8년 전부터 계산이 끝났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에서 카르 4세에게 이민 선물로 제시했던 물건이었으니까.
그의 고질적인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최고의 장비를.
이민을 종용했던 이유?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 각지에서는 너도나도 무림인이 되겠다고 도시 밖으로 뛰쳐나가는 추세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우수한 사냥꾼일수록 극심하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국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로사냥꾼을 보유했다는 중국이지만, 그 대부분이 통제 불능의 야인(野人)이라서 도움이 안 되는 까닭이다.
『한무일』
그러다가 발견할 인재가 당시에 18살이던 카르 4세였다.
중국 정보과에서 ‘뛰어난 프로사냥꾼’이라고 메모해뒀던 ‘한국 수색대장’의 팔이 풋내기에게 잘렸다는 소문이 그 발단이었다.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그런 인재를 걷어차는 대범함을 보여줬다.
이게 웬 떡?
중국은 망설이지 않고 초빙(招聘)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선지혜가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가격을 후려쳐서 ‘숨은 실력자’를 낚아챘다!
그리고 8년이 흘러 현재에 도달했다.
초강대국 미국에서 ‘슈퍼맨’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됐다.
(...거창하군.)
(8종 계약자인 방주께는 그렇게 보이실 겁니다. 그까짓 사냥꾼이 날고 기어봐야 5종 수호자보다 한참 못하지요. 맞습니다. 옳으신 지적입니다.)
(......)
(하지만 국가지도자는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래?)
(수호자가 전부 적으로 돌아서는 미래 말입니다.)
노벨은 전쟁에 사용하려고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핵무기를 만들려고 질량에너지보존법칙을 발표한 게 아니다.
즉,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인류는 괴수가 계약하는 이유를 여전히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기껏 발견한 정보는 ‘괴수와 계약하는 최소조건’뿐이다.
22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
그 악몽의 날이 재현된다면 인류는 버틸 수 있을까?
(주석. 도와줄 마음이 있긴 한 건가?)
듣기 거북했던 미호 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계약자에게 수호자는 인생이고 전부다.
계약이 파기되고 ‘평범한 여자’가 된 삶은 상상만으로도 공포다.
(끝나갑니다, 방주. 그러니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흠.)
(약점을 보완한 카르 4세는 4급 사냥꾼이 됐습니다. 4급. 자국에도 현재 둘이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카르 4세처럼 4종 괴수를 연달아서 서넛씩 가뿐하게 상대하지 못합니다.)
(...결론은?)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필패입니다.)
대변인이나 비서를 안 시키고 국가주석인 ‘첸지 죠’가 직접 오랫동안 설명한 이유는 전부 이 한마디를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무림인에게 ‘정의(正義)’는 생명이다.
그는 ‘무림의 실질적인 지배자’에게 그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정치는 비즈니스다.
대가 없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여우 같은 놈….’
미호 첸은 웃고 있을 첸지 죠를 떠올리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더는 온화한 아미파 주지승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박선영에게 순순히 고개를 숙이던가, 주석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주던가.
본능 대 이성.
자존심과 신념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생명 없이 살 수 있는 생물은 없다.
하지만,
(...도와주게.)
시링 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불의(不義)’를 따르겠다고 대답한 스승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쳐다봤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소녀는 자책했지만,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공식사과문 때문에 국민지지율이 하락한 국가주석 첸지 죠는 수화기 너머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날이 오기를 늘 학수고대했다.
무림을 주춧돌부터 흔들 수 있는 권한을 얻는 날을.
(카르 4세가 내건 대리인 조건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허점?)
(계약자가 죽어도 날뛰지 않는 수호자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아! 그 말은….)
(맞습니다, 방주. 부끄러운 얘기지만 자국에는 카르 4세를 이길 수 있는 사냥꾼이 없습니다. 하지만 계약자라면 널리고 널렸습니다.)
(맞아! 그렇지!)
언제 분노했느냐는 듯이 표정이 화사하게 꽃피는 ‘미호 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리라. 여태 무시해온 국가주석 ‘첸지 죠’가 아미파 주지를 ‘가지고 노는 중.’이란 사실을.
정치인들은 계약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존재는 ‘카르 4세’처럼 ‘비밀과 함정을 꿰뚫어보는 사냥꾼’이다.
그런 의미에서 첸지 죠는 선지혜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는 카르 4세에게 정면으로 물 먹인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상대를 농락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카르 4세에 비하면….
아미파 주지는 ‘손녀의 재롱’을 지켜보는 심정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단서를 달았지요. 무인의 내공대결.)
(그, 그래. 그게 있었지.)
(참으로 까다로운 조건이군요. 계약자가 죽어도 얌전한 수호자. 여기에 내공대결로 수호자의 간섭을 막았습니다.)
(방도가 있는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설명하고 발뺌한다면 방주의 분노를 받겠지요.)
(잘 아는군!)
국가주석 첸지 죠가 실수한 게 있다면, 건너편에 아미파 주지 미호 첸 혼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회담에 제자를 동석시켰으리라고는 ‘정치인’인 그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시링 팽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미호 첸 본인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곁에서 유심히 관찰 중인 제자는 정부에 휘둘리는 스승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지금의 스승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방주. 세상에는 카르 4세가 내건 조건을 완벽히 충족하는 수호자가 둘 있습니다. 풍문으로라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1종 특수 ‘에쏘드’라고.)
(에쏘드!)
미호 첸의 눈이 번쩍 떠졌다.
MID 장갑인 ‘앙그 어쩌고’는 몰라도 ‘에쏘드’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녀가 아는 이 ‘1종 괴수’의 정보가 반만 사실이라도 카르 4세는 죽은 목숨이다. 환희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국가주석 첸지 죠는 만만치 않았다.
그의 장난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계약자가 바빠서 빼기 어렵습니다.)
빼기 어려운 게 아니라 계약자가 없다.
하지만 도청 가능성이 있는 통신으로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상성이 제법 잘 맞았던 전임자가 7종 괴수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예정된 후임자가 보름 만에 비명횡사하면서 붕 떠버렸다.
일본이랑 차이가 있다면?
중국은 적임자가 나올 때까지 프로사냥꾼을 쏟아붓지 않고 있다.
계약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광고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아깝군, 아까워.’
첸지 죠는 놓친 기회를 아쉬워하며 쓴 미소를 지었다.
계속 진실만으로 미호 첸을 농락 중이지만, 이번만큼은 그에게도 꽤 속 쓰린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선지혜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그 가정이 황홀한 꿈처럼 주석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일본의 ‘유키나 미나미’보다는 한참 늦게 발견했지만, 중국의 정보과에서도 ‘에쏘드 적임자’로 카르 4세를 주목했다.
단독으로 움직이는 그녀보다 훨씬 유리했다.
아쉽다면 ‘검술 교관’처럼 변변찮은 제안밖에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에쏘드 계약자가 죽었다는 건 특급기밀이었던 탓이다.
알려지면 곧바로 러시아와 인도가 차례차례 무력도발을 하리라.
(주석!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지금!)
(그럴 리가요. 노여워하지 마시길. 에쏘드 말고도 조건에 부합하는 수호자와 계약자는 또 있습니다.)
(...또?)
(가더발트. 이건 에쏘드보다 잘 아시겠지요.)
(그, 그건!)
(전임자가 재작년에 자살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방치되어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자국의 특공대에는 마땅한 ‘미계약자’가 적고 계약하겠다는 지원자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원자를 아미파에서 대라는 뜻이었다.
시링 팽처럼 ‘내공수련 중인 순결한 자연미인’은 그 넓은 중원에서도 극히 드물다.
하물며 ‘미계약자’라면?
무릉도원(武陵桃源), 여인국(女人國) 등으로 불리는 아미파와 북해빙궁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
“얌전히 있어라.”
“하지만 이건-!”
“어허!”
가더발트는 계약자가 단명하기로 악명높은 수호자다.
이건 미친 짓이다.
저 제안은 절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제자를 죽이려 한 마녀(魔女)의 사과를 받겠다고, 무고한 제자들을 스승이 직접 죽이는 거나 다름없다.
시링 팽은 방에서 뛰쳐나갔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온화했던 스승이 저렇게 변한 건 모두 자신 때문이다. 그 죄책감이 사무쳐서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됐다.
“선배. 케이크를 구워봤어.”
“...딱 봐도 유지방 함량이 압도적으로 높잖아. 나를 설사로 패배시키겠다는 악의가 풀풀 넘쳐나고 있어.”
“응. 이 작품의 이름은, 최후의 만찬.”
“부정 좀 해줘! 너무 뻔뻔하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스마트폰 배경화면이 그딴 거면.”
선지혜는 다리가 길어서 평소에는 굽이 낮은 구두만 신는다. 하지만 현재는 송곳처럼 높고 뾰족했다.
저런 구두로 밟히면 무일의 싸구려 스마트폰은 한 방에 운명한다.
평소에는 맹한 눈으로 돌아다니던 그녀가 오늘따라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신속했다.
기습적으로 ‘꺅! 벌레다!’라고 외치며 소년에게 덮치듯 업혔다.
근력운동으로 지친 카르 4세는 의도적으로 앞쪽에 놓인 케이크를 피하다가 균형을 잃고 자빠졌다. 그리고 그 틈에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스마트폰은 목숨을 잃었다.
빠드득!
그 경쾌한 소리에 시링 팽은 ‘풋!’하고 웃고 말았다.
저 안쪽에서는 이 남자를 죽일 방법을 모의하고 있는데 그 당사자는 이렇게 놀고(?) 있으니 기가 막히면서도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카르 4세가 한마디 했다.
해탈한 고승(高僧)이 있다면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열심히 만든 케이크를 함정으로 쓰지 마.”
“응. 먹어봐.”
반성의 기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여기서 남자가 먹어주면 딱 애인 분위기.
하지만 카르 4세는 먹지 않았다.
“...독은 아닌 것 같은데 뭘 넣은 거지?”
“생크림이 볼품없는 것 같아서 은가루를 첨가해봤어. 그 밖에도 이것저것 넣었지만 말해줘도 선배는 모를 거야.”
“설사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군.”
무일은 의무대에서 중금속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약한 위기는 종종 대범하게 무시하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길한 화학물질이 위장에 엉켜있을지도 모른다.
체력이 여전히 바닥인 카르 4세는 누운 채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안녕하시오.”
눈이 마주친 시링 팽이 화들짝 놀라며 인사했다.
후배라는 특공대장 엉덩이에 깔린 프로사냥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특공대 막사에는 시체가 없을 텐데 이상하군. 꼭 시체를 본 얼굴이야. 설마! 시체를 복도에 전시해둔 건가!”
“아니야! 선배는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정말 아니야?”
“응! 없다는데 내 팬티도 걸 수 있어. 있으면 내 팬티 가져가.”
“걸지 마! 그리고 있든 없든 결과가 똑같잖아!”
...시체를 본 얼굴이라고?
맞다. 시링 팽은 방금 시체를 봤다.
무림인의 ‘생명’이 빠진 스승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것도 그런 이유다.
“카레 공. 묻고 싶은 게 있소.”
“잠깐! 잠~깐! 네가 뭔데 선배에게 ‘카레 공~♥’이라며 앙탈인데?”
“안 그랬소!”
“내가 똑똑히 들었어! 이 중국산 노출녀!”
< [12장-2] 이름의 무게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