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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48화 (48/287)

< [12장-1] 이름의 무게 >

[12장] 이름의 무게

학명: 가더발트(발칙한 속옷)

서식지: 옷장

특징: 만지고 주무릅니다.

위험도: 2종 특수

비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집니다.

***

고래(古來)부터 중국에는 수많은 문파와 무가(武家)가 있었다. 그 숫자를 전부 파악하려면 먼저 괴수와 싸울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대략 8천여 곳.

그 ‘배움의 터전’만큼이나 무림인도 많다. 하지만 배우는 무술은 한정됐다.

권법(拳法), 검법(劍法), 창법(槍法)….

여기에 내공수련과 보법(步法) 정도다.

물론, 무림인이라고 총기류를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장 죽게 생겼어도 재래식 전투법을 고집하는 것도 무림인의 자부심이다.

고리타분한 사고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관통 속성의 총보다 깔끔하게 절단하는 검이 괴수를 상대로 훨씬 효과적인 까닭이다. 괴수의 회복력은 총탄의 상처쯤은 간단히 치유하니까.

(다시 한 번 말해주게. 남궁세가 가주.)

(...마땅한 인재가 가문에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알겠네. 아미타불.)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아미파 방주님.)

(편히 쉬게.)

미호 첸은 통신을 종료한 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국 괴수대응본부 특공대에서 제공해준 통신장비를 이용해서 본국의 내공고수를 초빙하려고 했는데 영 신통치 않았던 까닭이다.

처음에는 너도나도 하겠다고 달려들 줄 알았다.

누가 더 강한지 우열을 가리는 싸움이라면 절세미녀와 동침 중에도 벌떡 일어나서 검을 뽑은 족속이 무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생사대결의 상대가 ‘카르 4세’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온갖 꾀병과 이유를 붙이며 거절하는 게 아닌가!

그 탓에 미호 첸은 이틀째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검성(劍星)』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에게 붙은 별호.

이런 경우는 ‘여신’으로 불리는 윤소영 다음으로 두 번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는 레드군과 계약했기 때문이지 딱히 대단해서 붙은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다르다.

미호 첸은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이 카르 4세를 ‘지나가는 개뼈다귀’처럼 무시하는 바람에 그녀도 은연중에 깔봤던 게 분명하다.

‘이 나라의 문화를 잠시 망각했구나! 아미타불.’

고대부터 이 나라는 무인(武人)을 깔봤고 문인(文人)이 양반이었다.

중국 무림에서 무림인이 신민을 다스리고, 고대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귀족이었던 것이랑 상반되는 지배체계.

검보다 붓이 강하다고 믿는다.

한국 정부에서 ‘8종 계약자 박선영’이 아니라 ‘7종 계약자 윤소영’을 선전, 홍보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방력(國防力)을 스스로 깎는 놀라운 정치 수완!

여기에 편승한 국민의식까지!

그럼에도 대한민국이란 조그만 반도국가가 선진국 반열에 들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극소수 인재’가 무시무시한 탓이다.

상당히 위태로운 경영구조다.

양보다 질.

원액으로 쭈우욱~! 쥐어짰다.

“스승님. 남궁세가에서도 거절한 건가요?”

“그렇단다. 시링.”

제자의 질문에 마음 약한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카르 4세의 명성은 ‘계약자’인 미호 첸의 예상과 추측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날치 날개 자른 게 뭔 대수라고?

8종 수호자를 곁에 둔 그녀에게 ‘6종 볼트윙’은 변변찮은 괴수다. 그래도 인간의 약한 몸으로 해냈다는 점을 높이 사긴 했다.

하지만 그뿐.

늘 지켜주는 수호자 탓에 민간인보다도 괴수의 능력과 위협에 둔감하다.

“예상외시겠어요.”

“그래. 많이 당혹스럽단다.”

괴수와 직접 싸워본 적 없는 계약자의 한계였다. 이건 ‘세계 최고령 계약자’인 미호 첸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역으로 충격이 더 컸다.

긴 세월을 후배들과 별다를 거 없이 보낸 그녀의 연륜은,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내리면서 역으로 퇴보하는 단계에 있었다.

중원(中原)의 무학(武學)이 반도(半島)보다 떨어진다고?

말도 안 된다.

미호 첸이 품고 있던 ‘최고의 프로사냥꾼 보유국’이라는 자부심은 겸손으로 흘려넘길 수 없는 진리다.

그런데 전면에서 부정당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무림의 주인공’들이 걸어온 싸움을 회피하고 있었다.

“스승님. 송구한 말이오나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으세요.”

“내가?”

“카레 공이 특별한 거예요. 그를 빼고 본 한국의 무인은 오합지졸이란 거 아시잖아요. 중원의 무학이 떨어져서가 절대 아니에요.”

“...시링.”

“네. 스승님.”

“새겨듣거라. 천하제일(天下第一)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양쯔 강에서 태어났어도 승천하지 못하면 한낱 이무기고, 이름 없는 개울에 사는 용(龍)이라도 용(龍)은 용(龍)이다.”

미호 첸은 진지했다.

모든 무림 문파와 가문의 시조(始祖)가 그랬다. 그들도 처음에는 변변찮은 배경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리고 ‘천하제일’이 되면서 달라졌다.

산속에 틀어박혀 있던 기인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면서 무리를 이루게 됐고 비대해진 덩치는 문파와 가문으로 탈바꿈했다.

그들 모두가 ‘최고(最高)’였기에 가능했다.

“검존 아저씨에게도 부탁해보셨어요?”

“카르 1세? 그자의 체면을 위해 가장 먼저 얘기했는데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거절했단다!”

“세상에….”

“후학을 양성하느라 바빠? 막내딸이 곧 결혼? 그자는 무인도 아니다! 본녀가 귀국하면 가장 먼저 그자의 별호부터 때어낼 테다!”

“검존 아저씨가 잘못했네요.”

“검존? 하! 제 아비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졸부 녀석!”

아미파 주지답지 않게 험담을 늘어놓았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엘로엘에게 항복한 울분을 억누르고 있는 수호자의 영향이리라.

시링 팽은 가만히 들으며 간간이 맞장구쳤다.

스승이 분노하고 화내는 이유가 모두 자신 때문이란 걸 알기에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처지였다.

지금은 고분고분 어른 말씀을 따를 때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걸요.’

상대가 ‘검성’이라면 만용도 안 생긴다.

카르 4세에게 ‘칼의 별’이란 별호가 생긴 계기는 서울을 휩쓴 ‘볼트윙 사건’이었다. 한국 정부는 철저하게 감췄지만, 관련 동영상은 누군가를 통해 전 세계에 유포됐다.

미호 첸은 내공이 없다.

하지만 시링 팽은 있어서 잘 안다.

카르 4세의 기교는 ‘이론’으로만 가능한 ‘비현실’이다.

무림인들은 말했다.

『나도 똑같은 장비와 상황만 주어지면 할 수 있소!』

아미파 주지승 앞에서 호언장담하던 무인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마을주민이 괴수에게 살해돼도 꿈쩍 않던 ‘무림고수’들이 상대가 ‘카르 4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정의감과 가족애가 투철해졌다.

미호 첸이 분노하는 이유다.

그자들의 허풍에 화나고, 순진하게 맞장구친 자신에게 화난다.

평소의 온정을 잃은 스승에게 시링 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후우! 추태를 보였구나.”

“아닙니다. 그자들도 싸움이 두려워서 피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소녀는 생각합니다. 나라와 스승님의 존엄이 걸린 문제라서 부담스러운 거겠지요.”

“흠…. 과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시링 팽은 안도했다.

일단은 미호 첸이 진정됐으니 카르 1세를 포함한 무림고수들이 썩은 갈대처럼 죽을 가능성은 많이 줄었다.

승부가 부담스러워?

승리했을 때의 명성을 생각하면 부담이 아니라 기회다. 그럼에도 전부 내뺐다는 건 ‘가망 없음’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즉, 무인의 수치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일러바치면 한국보다 자국(自國)이 먼저 풍비박산 날 것이다.

‘유키 짱이 점찍은 남자친구란 건가요.’

가상현실 친구들이 현실에서 함께한 야자타임.

국적과 언어, 문화는 모두가 달랐지만, 마음과 생각만은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인’들의 모임이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모두가 깔깔 웃으며 ‘수호자가 툭 치면 죽는 사내를 어디에 써?’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물쭈물하던 친구가 있었다.

가상현실과 현실 외모가 똑같았던 묘령의 일본인이 말했다.

『카레 짱이라고…. 아무튼, 있어.』

남자를 좋아하는 계약자도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 넘어갔다.

물론,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무엇이 마음에 들었고, 어디까지 진도 나갔는지 등의 상세한 내용을 밤새 뜯어냈다.

정말 즐거웠다.

팀 내에서 유일한 남성이고 훌륭한 리더지만, 현실에서는 찬밥신세인 하오 쟝이 익사할 뻔하기도 했지만.

사랑이란 위대한 것 같다.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이래도 괜찮으려나.’

유키 짱이 7년째 짝사랑해온 남자를 죽이는 일이다.

바닥에 머리까지 박으며 부탁한 소꿉친구의 계획에 들어가는 ‘호위무사’로 고용하려 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결말이었겠지만.

어쩔 수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가상현실에서 사귄 섬나라 친구도 중요하지만, 무림인이라면 현실을 중요시해야 한다. 그리고 시링 팽은 무림인이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하아…. 어쩔 수 없지. 정부의 손을 빌리는 수밖에.”

“스승님?”

“마음에 안 내키지만, 그자들은 이런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전문가들이니. 나약함을 비열함으로 채우는 족속들.”

정부와 무림은 상호보완하는 공존관계지만 친하진 않다.

서로가 이용하는 적대관계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늘 우위에 있는 쪽은 무림인들이다. 8종 계약자 미호 첸이 잘못되거나, 온건책을 펼치는 국가주석 첸지 죠가 실각하기 전까지는.

(아직도 한국에 체류 중이신 겁니까, 방주.)

(그렇게 됐소, 주석.)

(공식사과문으로 만족 못 한 건지요. 대통령은 잘 구슬린 것 같았는데.)

(한국 정부와 국민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국회의원과 시민단체의 악다구니로 나라가 굴러가던 시대가 끝났다. 물론, 겉보기에는 ‘19세기 한국’이랑 달라진 게 전혀 없다.

하지만 괴수의 등장 이후로 달라졌다.

결정적인 국가경영은 ‘국민(國民)의 의사’가 전혀 방영되지 않는다.

박선영과 선유나.

현재는, 박선영과 선지혜. 두 여자의 기분대로 움직인다.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인 와이츠가 있을 때는 한국의 방향성을 예측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됐다.

괴수처럼.

한국을 뒤에서 조종하는 두 여자는 ‘인간의 탈을 쓴 괴수’였다.

그건 ‘미호 첸’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의 국가주석 첸지 죠는 말을 아꼈다.

(그건 그렇지요. 하면, 방주.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카르 4세라고 들어보셨소?)

(물론입니다. 그를 모른다면 국가지도자로서 실격이지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미호 첸은 입술을 깨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끝까지 들은 첸지 죠가 단언하듯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길 수 없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그리 쉽게 단정하는 것이오, 주석!)

(...정보과에서 내놓은 그자의 전투능력을 시뮬레이션한 자료가 있습니다. 카르 1세는 아시지요? 무림에서는 검존이라고 불리는 사냥꾼.)

(알고 있소.)

(한국의 프로사냥꾼 ‘카르 4세’를 쓰러트리려면 ‘카르 1세’ 수준의 프로사냥꾼 ‘3명’이 동시에 협공해야 합니다.)

(......)

흥분하던 미호 첸은 할 말을 잃었다.

카르 1세의 실력이라면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녀다.

여성의 몸에 생채기 하나 안 내고 옷만 베어내는 배짱과 실력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날붙이를 전문으로 연마한 3급 사냥꾼이라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첸지 죠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일대일 토너먼트로 한다면….)

(한다면?)

(휴식시간 없이 진행한다는 가정하에, 카르 1세가 34명 필요합니다. 네, 맞습니다. 카르 4세의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될 때까지 투입하는 거지요.)

첩첩산중(疊疊山中)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댄 아미파 주지는 허허롭게 웃었다.

뒤에서 조용히 듣는 제자도 할 말을 잃었다.

무림인들은 단순하게 ‘누가 누구보다 강하다.’라는 식으로 위아래만 긋고 마는데, 정부는 정확한 전투력을 측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보는 오래된 겁니다.)

(...또 남았는가, 주석.)

(최근에 카르 4세가 ‘앙그류 그랑모리’를 장비했습니다.)

< [12장-1] 이름의 무게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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