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4] 무림의 지배자 >
이승필에게 수고하라고 한마디 해주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테니스장 코트처럼 점토를 단단하게 다져놓은 연병장이 중앙에 위치하고 사면을 감싼 건물들은 각각 숙소, 샤워장, 식당, 학습장으로 나뉘어 사용되고 있다.
갖춘 건 별거 없고 변변찮다.
고문실, 시청각실, 회의실, 당구장, 헬스장 등을 갖춘 헌병대 막사에 비하면 초라하다는 표현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특공대 막사는 ‘합숙훈련’ 때를 제외하고는 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분?’
복도를 걷던 무일은 걸음을 멈췄다. 어제까지 이 자리에 없었던 장식물이 자연스럽게 길을 막고 있었던 탓이다.
약초나 독초도 아닌 정체불명의 꽃이 심어진 아담한 화분 밑에는 ‘깨트리면 30억’이란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어있다.
어떤 의미로는 지뢰보다 위험했다.
지뢰는 [예감]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이건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한눈팔면 그대로 30억이 자동결재될 것이다.
악취미….
특공대 막사가 ‘특공대장 사유지’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걸 시사해주는 부분이다.
정식 대원은 막사에서 지내지 않는다. 소집령 때를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자율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지시만 하달받는 식이다.
“이건 아무리 봐도….”
카르 4세의 보폭과 심리, 사각 등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놓은 위치다.
조금만 더 피로했으면 발로 뻥 찼을지도 모른다.
이런 악행을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
특공대 막사 실내장식은 특공대장 마음이다. 집주인이 자기 집을 자유롭게 꾸미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특공대 막사는 특공대장 혼자 쓴다.
계약자만큼은 아니지만, 프로사냥꾼이 뭉쳐있다가 몰살당하면 그 피해 또한 무시 못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감]하고 [예측]해도 생화학무기나 초음속미사일 등은 피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즉, 인간의 적은 인간이다.
괴수는 인간의 ‘이기심’에 비하면 무섭지 않다.
신(神)마저 포기한 인간의 이기주의를 누가 당해내겠는가?
똑똑!
접견실 문을 두드린 무일은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무례하고 말고 할 것 없다. 선지혜는 ‘여자는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걸.’이란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사람을 문밖에 1시간쯤 세워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궁금해서 기다려본 적도 있다.
그 뒤로는 그냥 문을 연다.
“어서 와, 카르 4세.”
“...다과회 분위기로군요, 특공대장님.”
타인의 눈을 신경 쓰며 서로의 호칭을 정리했다.
일단은 접견실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주방기구로 득실거리는 실내장식을 보면 호텔레스토랑 주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주방장? 요리를 ‘숙녀의 교양’이라고 말하는 본인이다.
선지혜의 요리실력은 요리책을 준수하는 평균수준. 새로운 도전을 꺼린다기보다는 ‘검증된 배합’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그래도 가끔 도전하는데….
과산화수소와 액체질소는 요리가 아니라 ‘화학(化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 꼬맹이. 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네.”
“평온하셨습니다, 박 여사님.”
“여사는 무슨. 여왕님이라고 불러.”
겸손하게 사양하는 척하면서 호칭을 두 단계쯤 올려버리는 ‘바람의 여왕’이었다.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하지만 조금도 오만하거나 유치하게 들리지 않는 건 그녀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풍이 잘되는 허전한 ‘전투복’ 위에 밍크코트를 걸친 박선영은 다리를 꼬고 앉은 요염한 자태조차 근엄하게 느껴졌다.
그런 매력적인 여왕님을 보는 카르 4세의 태도는 담담했다.
정신수양의 성과라고 할 것도 없다.
실제 나이가 세자릿수인 고대인이란 자각만으로 충분하다.
“이쪽은 아미파 손님입니까?”
“불청객이라고 해주시게. 젊은 검성(劍星).”
무일의 물음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미녀가 대답했다.
황금 수실이 아름답게 치장된 법의(法衣) 위에 낡은 가사(袈裟)를 걸친 복장이 이렇게까지 이질적인 여인도 드물 것이다.
체구가 무척 작았다. 그 옆자리에 공손히 앉아있는 ‘시링 팽’이 큰언니처럼 보일 정도로 아담하고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편안하다.
이 여자가 8종 계약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지(住持)님. 카르 4세입니다.”
“한국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방장(方丈)쯤이면 될 걸세. 누군가에게 존칭으로 불릴 만큼 본녀는 대단한 신분이 아니니.”
중국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대단한 신분이 아니다?
박선영이 겸손이랑 담쌓고 산다면 이쪽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아미파 주지, 미호 첸.
중국이란 거대한 제국은 그녀가 호통만 쳐도 정권이 바뀐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절대적인 힘과 인망을 두루 갖춘 여인이다.
우리의 독선적인 여왕님이 반만 닮아도 참 좋을 텐데.
“안녕하시오, 카르 4세.”
“사람을 죽이고 오는 길이라서 그다지 좋진 않습니다, 팽 소저(小姐).”
“...실례가 많았소.”
공손히 앉아있는 자세만 빼면 이쪽이 더 상관처럼 보였다.
무일은 ‘시링 팽’을 작은 액정화면으로 봤을 때는 몰랐지만, 무척 활발한 소녀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얌전하게 있기 고역이라고 쓰인 얼굴은 연민마저 불러일으켰다.
미호 첸이 호통치듯 말했다.
“검성은 이해해주시게. 예의를 중시하라고 아무리 일러도 말을 안 듣는다네.”
“부스!”
“또!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쓰는 게 예의다, 시링.”
“잘못했소.”
스승은 고쳐지지 않는 제자의 화법을 포기하고는, 이해해달라는 얼굴로 카르 4세에게 살짝 고개까지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8종 계약자 같지 않은 여자다.
한국의 8종 여왕님과 공주님이 조금만 본받았으면 좋겠다.
“카르 4세도 담화 내용을 알아야 낄 수 있겠지?”
“제가 필요합니까?”
“응.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특공대장이 빈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으로 찍는 카르 4세가 못하는 건 그녀가 할 수 있다. 그걸 뒤집어서 말하면, 선지혜가 풀지 못하는 문제는 그가 할 수 있다는 해석이 된다.
단순히 심심해서 긴급호출을 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걸 위안으로 삼은 무일이 답했다.
“경청하겠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역시나 ‘하오 쟝’이 ‘홍영희’를 가상세계에서 만난 것부터 시작됐다.
그 화산파 청년이 세운 모든 계획은 무일의 예상과 유키 짱이 제공한 정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달라진 건 마지막.
홍영희의 난자를 운반하기로 한 계약자는 ‘시링 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미파에서 출발하려던 도중에 ‘미호 첸’에게 들키고 말았다.
바로 설득에 들어갔다.
『소꿉친구가 목숨 걸고 부탁한 일이에요, 스승님!』
대충 이렇게 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만약 이뿐이었다면 시링 팽과 수호자가 ‘폭풍에 휩쓸려 실종됐다.’는 걸로 이번 사건은 마무리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호 첸이 동행하면서 일이 커졌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이 따라왔다는 설명은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전쟁까지 확대될 뻔했다는 거군요.”
“응. 이길 수 있었는데.”
분명 이겼을 것이다.
서울이 남아나진 않았겠지만.
“...제자를 잃을 뻔한 방장께서는 화가 많이 나셨겠네요.”
“응. 말이 안 통해.”
“타협의 여지가 안 보여서 만만한 저를 불러다. 맞습니까?”
“응. 나는 화평 안 해도 돼.”
여왕급의 가슴을 자랑하듯 팔짱 끼고 있는 박선영은 ‘당장 이년들을 죽이고 전쟁하자!’라는 기운을 팍팍 풍기고 있었다.
상황이 참 묘했다.
미호 첸과 시링 팽은 ‘바람의 여왕’에게 제압된 상태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흉기로.
하지만 그녀들이 죽어버리면 분노한 수호자가 서울을 쓸어버릴 것이다.
이 정도면 평화적인 협의가 진행돼야 하는데, 그런 부차적인 피해에 구애받지 않는 여왕님과 공주님이라서 문제다.
“방장께서는 사과를 받길 원하시는 겁니까?”
“내 제자의 경거망동으로 벌어진 일이란 건 알고 있네. 그래서 간단한 사과만 받을 생각인데 저 시주(施主)는 그조차도 거부하니…. 아미타불.”
바람의 칼날이 목에 닿아있다는 걸 알면서도 완고했다.
절대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만용은 절대 아니었다. 미호 첸은 굳건한 신념과 ‘스승 된 자의 도리’로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존경스럽긴 한데….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
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여왕님에게 사과를 받아내긴 힘들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리면 양국 다 끝장이다.
서울만 사라지고 끝일까?
8종 수호자를 잃은 중국은 ‘초자연적인 괴수’의 침공에 무방비해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멸망할 것이다.
괴수나 다름없는 ‘죽음의 마녀’에게.
‘중국의 주석은 현명하군.’
공식사과문을 받았다고 어린애처럼 으스대는 어디의 대통령보다 말이다.
하지만 ‘첸지 죠’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조금만 양보해달라는 방장.
조금도 양보하기 싫다는 여왕.
박선영의 태도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사과해야 하는데? 라고 말이다. 먼저 시비를 건 외국 년들이 역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호 첸이 먼저 사과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제자를 지키기 위해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카르 4세에게 선뜻 보여준 태도로 봐서는 아미파 주지가 사과에 인색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주관이 뚜렷했다.
내가 아닌 건 아니다.
즉, 서로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셈이다.
대한민국의 ‘8종 계약자’만 별난 게 아니었다.
“방주. 방주께서 잘못되면 양국이 멸망으로 치달을 거란 점은 알고 계시지요?”
“검성이 하고 싶은 말은 아네.”
“그래도 안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불허(不許). 제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스승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늙은이의 헛된 아집일지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아미타불.”
카르 4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지혜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확실히 인지했다.
태생과 지위, 성격이 어떻든 계약자는 수호자의 영향을 받아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반대로 수호자는 약간(!) 온순해지는 모양이고.
두 절세가인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 결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지 알면서도 눈앞의 강적에게 얕보일 수 없다는 자존심이 더 중요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풀 수 없을 수밖에.
이건 수호자의 영향을 받은 계약자의 ‘본능’이다.
“방주.”
“검성은 아직도 이 늙은이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미숙한 제자가 극찬한 시주의 내공 경지라면 충분히 이해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얼굴이 새빨개진 시링 팽이 입술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한국말을 못한다고 또 꾸중 들을 거란 걸 알는 탓이다.
카르 4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하고 있다.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는 이 기막힌 상황을 풀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방주께 질문이 있습니다.”
“해보게.”
“무림에서는 힘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다지요?”
“맞네. 힘은 정의일세.”
미호 첸과 ‘정부 계약자’의 결정적인 차이.
그것은, 그녀가 힘을 숭상한다는 무림인이란 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작정 ‘힘’으로 싸워서는 서로가 곤란하다. 서울이고 베이징이고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카르 4세는 선지혜의 얼굴을 힐끔 봤다.
역시나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고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부른 게 분명하다.
‘이런…. 좀 쉬자!’
‘결혼하면 내 젖꼭지를 쪽쪽 빨며 쉴 수 있어.’
선지혜는 눈웃음으로 회답했다.
계약자의 사고방식은 제멋대로라 종잡을 수 없다, 안다.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니까.
카르 4세가 눈살을 찌푸린다.
사랑하는 남자의 생각쯤은 관찰해온 11년째 변함없기에 읽기 쉽다.
착한 용사님이 제안했다.
“무림의 방식으로 한판 붙죠.”
“...시주.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일대일 내공대결입니다.”
“흠!”
“여왕과 방장. 죽는 쪽이 군말 않고 사과하는 겁니다. 하지만 8종 계약자가 죽어서는 사태가 완만히 해결되지 않겠죠. 그러니 죽어도 괜찮은 대리인이 대신 싸우고 죽을 겁니다.”
“허어!”
“아미파 주지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할 명분이 없구나!”
미호 첸은 ‘무림의 자존심’이 걸렸다는 걸 깨닫고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승리를 의심하진 않는 눈치였다.
박선영은 ‘누구 마음대로!’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사랑하는 조카가 ‘섭섭한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됐어!
카르 4세는 심호흡했다.
세상은 넓고도 넓으니 중국의 프로사냥꾼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의미 있는 요절이겠지요. 잘 부탁합니다.”
< [11장-4] 무림의 지배자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