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3] 무림의 지배자 >
통화가 끝나자마자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처럼 쓰러지는 카르 4세였다.
정신적인 타격이 극심했다.
문세웅은 당장 의무대로 실려가야 할 사람은 홍영희가 아니라 한무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선배의 상태는 안 좋아 보였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그, 그래. 현기증이 살짝 왔을 뿐이야.”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한 무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중국이 계약자를 빼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재해라는 보복조치를 취할 때부터 전쟁을 예감하긴 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이리라.
박선영도 그렇지만, 선지혜도 전쟁을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여자가 아니다. 역으로 누구보다도 바라는 눈치다.
8종 계약자쯤 되면 모두 그녀들처럼 변하는 걸까?
단정할 순 없지만,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부에서 방침이 내려왔습니다!”
헌병대 통신담당이 큰소리로 외쳤다.
카르 4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벌써?”
“네. 이건! 흠…. 하오 쟝에게 한국 시민권을 준다는 전갈입니다. 감시의 조건이 붙어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처벌이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무서운 여자들의 싸움은?”
“중국의 주석(主席), 첸지 죠가 공식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끝났군.”
다급하게 공식사과문을 낭독할 정도면 ‘일방적으로’ 싸움이 끝난 모양이다.
역시나 사기적인 여왕님….
과장이 아니라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계약자는 이집트의 ‘파라오’뿐일 것이다.
아미파 주지승의 8종 수호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연약한 계약자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이 없으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저력(底力)이다.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통치자와 정치가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군인들이 일으켜 세웠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수 출신이었고, 고려를 세운 왕건도 후고구려의 장수였으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고려의 장군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나라(민족)다.
산소호흡기가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늘 뭔가 아쉬워서 버리질 못하지.’
돌아가는 정치판이나 국민성은 암담한데 떠날 수 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손보면 세계로 비상(飛上)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용신 와이츠.
대한민국은 몇 년 전까지 세계를 주름잡았다.
중국의 국가주석인 ‘첸지 죠’가 자존심과 사후대책 등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사과해온 것도 그런 이유다.
대한민국은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다.
개인에게 너무 의존하긴 하지만.
변변찮은 나라였다면 결정까지 오래 걸렸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헛짓은 아니었나. 후우….”
나브랑모스 레비터의 시동을 건 문세웅이 보조석에 앉은 카르 4세를 불렀다.
딱딱한 좌석에 몸을 기댄 선배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특공대장의 장난(?)에 충격받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카르 4세는 그전부터 지쳐있었다.
상대가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조건은 대등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프로사냥꾼도 총알보다 빠르진 않고 한 발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죽는다. 게다가 카르 4세는 혼자였고 적은 스물 내외.
체력과 순발력이 떨어지는 그에게는 상대의 실력보다 머릿수가 더 큰 난관이었다.
“...선배님.”
“왜?”
“홍영희란 여자.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안 놔두면?”
“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열 받잖아요! 목숨 걸고 구해준 은인을 살인마 취급하다니! 그 원인제공자인 첩자 새끼는 감싸고! 누구는 사람 죽이고 싶어서 죽이나!”
“놔둬. 어리잖아.”
“저보다 나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나이는 숫자다. 쌓아온 경험이 중요한 법이지.”
방금까지 등 뒤를 맡겼던 동료와 친구가 눈앞에서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광경을 겪지 못한 민간인의 한계다.
거기에 살아온 세월은 의미 없다.
20살 사냥꾼의 눈에는 200년 묵은 고대인도 철부지 어린애다.
막말로,
너희가 전쟁을 알아? 죽음은? 고통은?
팔다리가 멀쩡히 붙어있는대도 병원을 찾아와서 죽겠다고 오두방정떠는 인간들을 보면 한심하게 보인다.
하지만 민간인들이라고 다를까?
그들 눈에는 사냥꾼이 같은 인간처럼 안 보인다.
사람을 망설임 없이 죽이고 시신을 음식쓰레기 치우듯 하는 태도가 소름 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세웅도 젊다.
어리진 않지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직 남아있다.
“시민권을 준다는 말에 그 여자가 기뻐하는 얼굴 보셨습니까? 화장 떡칠한 얼굴을 발로 차서 콧대라도 부러트려 놓는 건데.”
“민간인 폭행은 중범죄다.”
“헌병대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분입니다.”
“네 아버지다만.”
“그년 때렸다고 사회봉사하는 굴욕보다는 낫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카르 4세는 졸음이 쏟아지는 머리로 후배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생각했다.
술 먹고 싹 잊어라!
이런 방식은 언젠가 사달 난다. 앙금이 풀리긴커녕 쌓이고 쌓여 나중에 한꺼번에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음의 앙금은 집중력을 흐트러트려 [예측]의 정확도를 떨어트리고 심하면 [예감]에도 악영향을 준다.
그러니 그때그때 풀어줘야 한다.
카르 4세처럼 해탈(解脫)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법이라면 있지.”
“역시! 선배님이라면 뭔가 수단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경비(經費)를 전부 청구하는 거야.”
“그게 가능합니까?”
이건 공무(公務)다. 시민에게 보상을 바랄 수 없다.
하지만 카르 4세는 고개를 저었다.
“홍영희 양은 무고한 시민이 아니야. 첩자를 감싸려고 했어.”
“아! 그럼?”
“맞아. 피해자인 척한 공범자로 몰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8종 계약자 박선영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치밀한 공작이었다. 이 정도로 해두면 되려나.”
중국의 8종 계약자 ‘미호 첸’이 나왔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함정을 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박선영은 한국의 국력이다. 그녀가 죽거나 잘못되면 한국은 당장 내일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취약해진다.
그런 중요한 계약자를 위험에 빠트리려 했다.
의심만 사도 궁지에 몰리는데 남자친구가 중국인 첩자?
한국사회에서 매장당하기 딱 좋다.
“앗! 선배님! 그런 좋은 정보가 있으면 일찍 말씀해주셨어야죠!”
“그랬다면 바로 싸대기 날렸을 거잖아.”
“그야 당연하죠!”
이년은 맞아도 싸다.
여론도 그렇게 흘렀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헌병대장까지 가세해서 손을 쓰면 한 여자의 인생을 시궁창 밑바닥까지 떨어트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지혜가 ‘착한 용사님’이라고 부른 건 이런 의미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폭력이 능사가 아니야.”
문세웅도 정의감이라면 투철하다.
괴수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은 친형처럼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하지만 ‘용사’는 아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까지 돌보진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철된 신념은 문세웅이 프로사냥꾼이 돼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배님. 그래서 돈 얘기를 하신 겁니까?”
“그래. 네가 쓰는 장비 중에서 헌병대 비품(備品) 아닌 거 있어?”
“에…. 없죠.”
문세웅은 카르 4세처럼 임상시험으로 목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됐다.
가진 거 전부가 헌병대장이 마련해준 ‘최고급 장비’다. 이 미청년이 직접 돈을 모아서 샀다고 할 수 있는 물건은 자동차뿐이다.
물론, 나브랑모스 레비터가 싼 차는 아니지만.
“전부 세금이야. 국민이 부담하는 거지.”
“아! 그건 안 될 말이죠! 그년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낭비한다는 건!”
문세웅이 쓰는 홍영희의 호칭은 ‘그 여자’에서 ‘그년’으로 하락해있었다.
헌병대장의 비호 없이 치른 첫 실전,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를 욕보인 그녀에게 유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장비는 모두 ‘최상급’이다. 상실의 아픔을 이미 한 번 겪었던 헌병대장이 하나 남은 아들에게 싸구려를 줬을 리 없잖은가.
그 비용은 무지막지하다.
당연히 이 또한 가만 놔두면 세금으로 막았을 것이다.
“그 비용만 홍영희 양에게 돌려도 네 울분은 많이 풀릴 거다.”
“정말로 그럴까요?”
“나를 믿어라. 모텔 수리비만 해도 허리가 휠 텐데, 네가 쓰는 장비의 소모품 충전비용까지 얹어지면 일개 기자가 갚을 수 있는 비용을 아득히 초월해.”
“아하! 몸 팔고 다니겠네요.”
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문세웅이었다.
지나치게 앞서가는 청년을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카르 4세는 인생의 선배로서 따끔하게 말했다.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면 인생이 고달파진다.”
“쩝.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홍영희 양의 부친이 부자야. 딸의 인생이 망가지도록 수수방관하진 않겠지. 하오 쟝이란 녀석도 양심이 있으면 뭐라도 하겠고.”
“이래서는 보복이라고 할 것도 없겠는데요.”
문세웅은 너무 약한 거 아니냐고 투덜댔다.
하지만 이어진 선배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부친께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한다고 생각해봐. 홍영희 양도 부친이랑 관계가 아주 껄끄럽거든.”
“아아, 그렇겠네요. 인공임신이라고 했었죠.”
“불쌍한 아이지.”
“불쌍은 개뿔요! 선배님. 이제 자세요?”
“오냐.”
무일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난폭한 스포츠카의 흔들림마저 자장가처럼 달콤했다.
문세웅이 누군가와 통화로, ‘첩자의 여자친구’ 앞으로 댈 청구금액을 부풀리는 비리가 귓가에서 맴돌았지만 모른척하기로 했다.
나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군.
쓰게 웃은 카르 4세는 깊은 수면에 빠졌다.
“선배님! 이만 일어나세요!”
“...벌써 도착했어?”
“특공대 앞입니다.”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직장 앞? 집이 아니라?”
정말로, 괴수대응본부 특공대 막사가 보였다.
부서져도 금방 고칠 수 있도록 제작된 목조건물은 고품격 별장을 떠올리게 했지만, 대낮에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기운을 품고 있다.
“귀가하려 했는데 특공대장님의 긴급호출이 있었습니다.”
“아아, 이럴 수가!”
“선배님?”
“세웅! 다음부터는 무시해! 그 여자는 긴급호출의 용도를 제대로 숙지하고 있지 않으니까! 레스토랑 초인종쯤으로 안다고.”
“예?”
무일은 ‘차차 알게 될 거야.’라고 격려해준 후에 차에서 내렸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더 피곤했다.
특공대 막사 입구는 ‘상실의 아픔을 겪은 남자’ 혹은 ‘복수뿐이 안 남은 남자’ 같은 얼굴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전부, 입대 희망자다.
특공대에 들어가면 괴수를 죽일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몰려든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글쎄?
이들 중 75%는 정신력, 체력 심사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도 합숙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포기할 게 분명하다.
그래도 열심히 모집해볼 수밖에.
특공대는 늘 인력이 부족하니까.
모집을 한 달이라도 쉬었다가는 특공대는 ‘빈집’이 될지도 모른다.
“오셨습니까, 카르 4세.”
“아아, 승필. 여기서도 문지기를 시켜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후배는 많을수록 좋지요.”
특공대로 복귀한 대원이다.
유지수의 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이승필’은 ‘타로 5세’라고 불렸던 과거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카르 4세보다 먼저 특공대에 입대했지만, 휴면기간이 너무 길었다.
무엇보다도 특공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참전횟수’는 아예 상대도 안 된다.
34회 토벌전, 186회 섬멸전.
전설을 뛰어넘어 조작의혹마저 받고 있는 카르 4세의 기록이다.
토벌전은 아무나 몇 번이든 가능하다. 몸을 사리면서 출석만 해도 인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멸전은 다르다.
괴수와 인간.
둘 중 한쪽이 몰살될 때까지 싸우는 종족전쟁이다.
후퇴할 곳이 없기에 사망률도 터무니없이 높다. 그리고 카르 4세는 그 지옥에서 186번을 살아남았고 전멸시켰다.
알아주는 사람은 서울 전체로 따지면 극히 드물지만.
“특공대장님은?”
“접견실에서 손님들과 대화하고 계십니다.”
“이 시기의 손님이라….”
< [11장-3] 무림의 지배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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