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45화 (45/287)

< [11장-2] 무림의 지배자 (유료↑) >

요사스런(살가운) 통화음을 듣자마자 괜히 전화했다고 후회한 무일은, 유키 짱의 빠른 대응에 끊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걸었으니 낚였다.

낚시꾼이나 할 법한 언어체계다.

카르 4세는 이 여인의 한국어가 아직 멀었음을 통감하며, 헌병대에게 제압된 미청년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키 짱. 하오 쟝이란 녀석을 알아?)

(조또마떼! 안부도 안 묻고 바로 본론이야?)

(끊는다.)

(기다려! 아우으으. 한껏 기대했는데 너무해, 카레 짱!)

(...안부를 묻는 게 더 실례 아닌가? 판타이탄을 무시하는 처사 같은데.)

그 레드군도 내빼게 한 7종 수호자가 온갖 첨단장비를 동원해서 계약자를 지키고 있다.

경호만 잘하느냐?

휴대용(?) 단독주택, 자가용 비행기, 최첨단 컴퓨터 등의 모든 문명생활이 가능한 범용성은 완전히 사기다.

그런데 안부(安否)?

유키 짱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사는 여자다.

“헐….”

“설마….”

카르 4세의 통화내용을 조용히 듣고 있던 두 미청년은 서로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문세웅은 ‘일본인 여자친구가 정말로 있었어?!’란 얼굴이었고, 하오 쟝은 ‘일본의 판타이탄이라면? 설마!’라며 눈을 부릅떴다.

덤으로, 카르 3세도.

하지만 영상통화가 아니라서 일본 상황까지는 프로사냥꾼도 알지 못했다.

너무하다고 칭얼대는 말투랑 달리 싱글벙글한 얼굴로 ‘호감도 MAX’ 상태인 유키 짱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엑시온이 방금, 제법 예의를 안다고 카레 짱을 칭찬했어.)

(아아, 별말씀을.)

문세웅은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귀엽게 툴툴대는 여자친구를 배려할 줄 모르는 저 건조한 대사가 통하다니?

선배의 경지가 한 치 앞도 안 보이기 시작했다.

(하오 쟝? 중국인이지? 나를 안다면 가상현실에서 만난 인연일 거야. 이름은 모르고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지도.)

(게임이라고?)

(하잇! 근데 왜?)

(...나를 ‘카레 공’이라고 부르는 놈을 잡았거든.)

(쏘까.)

모르는 야만인이 ‘은어(隱語)’를 알아?

유키 짱의 부탁을 받은 판타이탄은 중국의 허술한 보안을 뚫고 ‘하오 쟝’이란 인물의 데이터를 뽑아서 그녀의 스마트폰에 전송했다.

카르 3세처럼 빤질거리게 생긴 얼굴.

나이는 24살. 하지만 실제 나이는 18살 코흘리개.

소속된 집안은 ‘화산파(花山派)’라는 곳이다.

...누구지?

당연하게도 유키 짱이 모르는 녀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잊었다. 하지만 판타이탄이 압축해놓은 ‘불필요한 파일’에 정리해놓은 영상자료가 있었다.

(누군지 알아?)

(하잇! 가상현실에서 사귄 친구의 소꿉친구.)

(또 그건가. 친구의 친구.)

카르 4세는 정말 싫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인간관계가 한국의 서울로 한정된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찾아보면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가상현실게임을 안 한다는 데 있다.

지는 게임.

누구나 하기 싫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계약자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갔던 ‘카르 4세’지만, 게임에 관한 재능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게임에서는 [예측]과 [예감]을 쓸 수 없는 탓이다.

그나마 [예측]은 시간과 노력으로 어떻게든 가능하지만, 사냥꾼인 그에게 가상현실에 투자하라는 건 죽으라는 뜻이다.

게임 속 지인(知人).

무일에게는 머나먼 얘기였다.

(카레 짱에게 의심받는 건 싫으니까, 그 남자에 대해 아는 정보를 전부 보내줄게. 출처는 중국 괴수대응본부 정보과. 신뢰할만하지?)

한 여인의 여심(女心) 때문에 한 사내의 인권이 간단히 유린당했다!

카레 짱의 스마트폰으로 그 정보가 도착했다.

하지만 그 대가일까?

파일에 덤으로 끼워진 바이러스가 카르 4세의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유키 짱의 비키니수영복 차림으로 바꿨다.

당연하게도 변경불가!

힐끔 본 문세웅이 ‘오오!’ 하면서 선배의 여자친구(?) 미모에 감탄했다.

반대로 하오 쟝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유키나 미나미….”

일본 사내들의 망상을 집결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사랑스러운 얼굴과 비현실적인 몸매를 과시하는 묘령의 미인.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누워서 가슴을 강조한 배경사진은 가히 국보(國寶)급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헤벌쭉 웃을 수 없었다.

그랬다가 죽을 뻔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머릿속에 각인된 탓이다.

(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배경화면이….)

이런 배경화면을 보면 그 어떤 여자도 가까이 안 온다.

그 정도는 무일도 안다. 경험으로.

선지혜가 ‘어머? 실수로 떨어트렸네.’라고 말하면서 ‘완벽하게’ 부순 무일의 휴대전화만 십여 개에 달한다.

숫총각의 스마트폰에 폭거를 저지른 유키 짱이 말했다.

(카레 짱. 다음에는 목욕장면으로 보내줄게. 당장은 마음에 드는 컷이 없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많이 찍어두는 건데!)

(하지 마!)

(또 궁금한 거 없어?)

(...도움만 받아서 미안하다, 이만.)

(아레?)

카르 4세는 그녀가 놀라는 음성을 끝까지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멋대로 용건만 묻고 끊은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업무 중이다. 한 여인의 몸과 마음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남자의 재판.

판타이탄이 보내온 자료는 곧바로 헌병대 노트북으로 펼쳐졌다.

『하오 쟝』

한 남자가 살아온 인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혈연, 교우관계, 학급성적, 신장, 몸무게, 재능, 특기, 취미, 성격 같은 일반적인 것부터 습관, 사상, 철학 같은 알기 어려운 정보까지 들어있었다.

그중 가상현실게임 캐릭터정보가 압권이었다.

무일은 봐도 뭐가 뭔지 몰랐으나, 문세웅을 포함한 헌병대에서, 우와! 진짜? 대박! 등을 외치며 감탄하는 것만 봐도 대단한 녀석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을 구원해주진 않는다.

맞다. 그래야 정상인데,

“...홍영희 양. 어째서 돌아오신 겁니까?”

마취에서 풀려난 홍영희는 몸을 추스르고 본부 의무대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되돌아오고 그 뒤편에는 인솔자로 지정된 헌병대원 둘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엇이 이 여인을 되돌려보냈는가.

카르 4세는 [예측]할 수 없었다.

“하오 씨를 어떻게 할 거죠?”

“보다시피 심문 중입니다만.”

“끝까지 지켜보겠어요. 비윤리적인 행위가 벌어지는지를. 피해자신분인 저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법(法)이 그렇게 바뀌긴 했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편리한 방향으로 조작되고 있다. 그 조작과 왜곡을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이 ‘카르 4세’였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지금.

그 법이 수사에 방해된다는 점이다.

홍영희가 평범한 시민이었다면 법이 그렇게 바뀐 줄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더라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모텔에서 일단 빠져나가고 봤으리라.

“...연민입니까?”

“저도 모르는 마음을 묻지 마세요.”

문세웅이 눈으로 ‘강제집행할까요?’라고 묻는다.

개정된 법의 보호를 받는 그녀에게 ‘진실을 감추려는 행위’를 할 순 없다. 하지만 헌병대에는 ‘환자를 조속히 병원으로 옮긴다.’는 명분이 있다.

나중에라도 알 수 있는 진실보다는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난자 좀 없다고 당장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좋습니다. 하지만 참견은 안 됩니다.”

“비윤리적인 일만 안 일어난다면요.”

홍영희는 ‘학살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당돌함에 4급 사냥꾼은 혀를 찼다.

장소를 옮겼어야 했나?

현장에서 즉각 처리하는 사냥꾼 습성이 수사에 방해될 줄은 몰랐다.

조금 후회의 마음도 들었지만, 무일은 담담했다.

카르 4세가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대상은 [예감]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양심’과 대적할 수 없는 ‘5종 이상의 계약자’뿐이다.

대한민국 헌법?

수틀리면 뒤집을 수 있다.

사냥꾼 숫자가 많이 줄긴 했지만, 카르 4세는 ‘4급 사냥꾼’이다. 그가 작정하고 움직이면 한국의 모든 사냥꾼이 동조할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현재 몸을 사리고 있다.

볼트윙 테러, 강남구 쿠데타. 모두 정치를 잘못해서 벌어진 일인 까닭이다. 그들의 최대 무기인 여론마저 밀리는 상황이다.

이 치명적인 실수로 얼마나 많은 사냥꾼이 죽고 떠났던가?

정치인들은 분노한 사냥꾼의 칼날이 잠잠해지길 숨죽이고 기다리는 중이다.

“윤리(倫理)라…. 인간의 도리. 이자는 짐승입니다만.”

“그럼, 사람을 함부로 살해한 당신도 짐승인가요? 카르 4세.”

“정당한 처분이었습니다.”

“아니요. 충분히 설득했다면 공모한 사냥꾼들도 순순히 투항했을 거예요.”

홍영희의 야무진 반박에 여기저기서 실소를 터트렸다.

판타지 코미디 애니메이션 같은 평화를 외치던 ‘21세기 사극(史劇)’에나 나올 법한 대사였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에서 매일 떠드는 주제는 하나다.

인구문제.

『어떻게 하면 ‘정당하게’ 먹는 입을 줄일까?』

모든 국가의 공통된 고민거리다.

무기징역이 사라지고 사형제도가 활성화된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카르 4세의 행동은 ‘어차피 사형일 반역자’들을 편안하게 죽여줬다는 점에서 투항보다 의미가 있다.

“홍영희 양. 이 남자의 사형은 거의 확정입니다.”

“어째서죠!”

“이 남자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헌병대에서 판단했습니다. 중국에서도 그걸 알고 파견한 거겠지요. 당사자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하오 쟝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무림 문파인 화산파에서 그는 천덕꾸러기였다. 여자가 아닌 건 둘째치고 내공에 재능이 없어서 무림인으로서 실격이었기 때문이다.

미청년의 뛰어난 게임 실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동문(同門)의 어른들과 형제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으며 기다린 끝에 ‘용의 계약자 혈통’을 가상현실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장대한 계획을 짰다.

협력자는 아미파의 유망주 ‘시링 팽’으로 그의 소꿉친구였다.

바람의 여왕에게 곧 살해될 계약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홍영희 양.”

“그렇다면 그 쓸모없는 남자를 저에게 주세요.”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카르 4세의 감이 틀릴 때도 있네요. 농담처럼 들렸나요? 저는 괜찮아요. 그까짓 난자쯤 없어졌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피해자라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홍영희 본인이 알고 한 선언인지 모르겠지만, 일이 복잡해졌다.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헌병대에서는 ‘포로로서 가치 없는 가해자’를 빠르게 처분하고 사건을 마무리하길 원하고 있었다.

판결이라면 진즉 났다.

육체적 고통을 주며 천천히 굶겨 죽이는 것이다.

(...특공대장님.)

(뜻밖의 문제에 봉착했다는 목소리인걸?)

(그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만.)

(응. 미호 첸이 나왔어.)

미호 첸이라면….

중국의 최강자로 불리는 아미파 주지승이다.

8종 계약자 박선영은 피라미를 잡으러 갔다가 동급의 강적이랑 마주친 것이다.

사건이 단숨에 커져 버렸다.

전쟁(戰爭).

그렇게 봐도 무방한 비상사태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접전지가 서울 근처라는 점이다.

‘중국은 한국과 전쟁을 원하는 건가? 바람의 여왕을 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아니면 시링 팽이란 계약자가 미호 첸에게 그만큼 중요한 건가?’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두 국가의 전면전만 기다리고 있다.

모텔 창문을 내다보니 바람이 심상치 않다.

(특공대장님. 중재나 협상이 가능할 것처럼 보입니까?)

(선배는 안 싸웠으면 좋겠어?)

(...인류의 생존을 위한 싸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응. 참고할게.)

정말로 참고만 할 것 같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선지혜였다.

이게 참고만 할 사항인가?

24세기의 전쟁은 땅따먹기가 아니다. 서로에게 대량살상무기를 퍼붓지 않더라도 누가 이기든 불행해지는 외길이다.

패자는 승자에게 먹히고, 승자는 괴수에게 먹힌다.

그 역학관계를 무시하고 ‘우리나라는 예외야.’라는 자신감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멸망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포로의 정보를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중국에서도 버린 패 아니야?)

(...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와야 움직일 겁니까?)

(응.)

시간이 멈췄다.

영문도 모른 채 주마등까지 경험한 문세웅은 침을 꼴깍 삼켰다.

존경하는 선배가 말했다.

(......부탁해,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님.)

(응. 나의 착한 용사님. 녹음 완료~♪)

< [11장-2] 무림의 지배자 (유료↑)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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