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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44화 (44/287)

< [11장-1] 무림의 지배자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6

[11장] 무림의 지배자

학명: 엘로엘(폭풍 그리고 폭풍)

서식지: 바람

특징: 바람의 정령?

위험도: 8종 특수

비고: 정보가 부족합니다.

***

일본의 천왕(天王)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겪으며 그 위세가 크게 줄고 상징적인 세습귀족의 성향이 짙어졌다.

그러다가 ‘괴수 vs 인류’의 4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다시금 부활했다.

천왕 가(家)를 멸족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9종 괴수가 ‘일본의 공주님’과 계약하면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공주님의 계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에는 ‘계약 조건’을 아무도 몰랐던 탓이다. 그래서 외모관리를 소홀했고 1년도 안 지나 공주님의 계약은 파기됐다.

화풀이?

계약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조용히 해지됐다.

그렇다고 피해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오니오프 / 9종 소형】

재앙의 범주마저 초월한 ‘도깨비’는 일본의 수도 도쿄에 자리한 메이지 신궁에 누워 100년째 ‘죽은 척’하는 중이다.

만약 이뿐이었다면 피해라고 할 것도 없다. 잠꼬대 한 번 없이 쥐죽은 듯이 있는 ‘오니오프’는 사소한 민폐조차 안 끼치고 있었으니까.

문제라면 주변에 생겼다.

무수히 많은 ‘요괴(妖怪)’가 섬나라 일본으로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은 세계에서 괴수 밀도가 가장 높은 ‘위험국가’로 손꼽히게 됐다.

“나랑 쏙 빼닮았는데. 하아!”

“외할머니. 그 한탄은 질리지도 않으세요?”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여인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외할머니라고 불린 쪽은 일본 전통복장인 ‘기모노’였고, 반대쪽은 풋풋한 학생복 차림이었다.

“그 교복은 또 뭐니? 입을 나이가 한참 지났는데.”

“아시잖아요. 코스프레.”

“그거 할 나이도 지난 것 같은데. 하아!”

천왕 가(家) 내에서는 가장(家長)인 천왕보다 발언권이 강한 ‘옛 공주님’은 바닥이 꺼질 기세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의 멸망을 막고 ‘최초의 9종 계약자’라는 타이틀까지 단 그녀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이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다.

특히, 눈앞에 숙녀에게는 ‘외할머니’일 뿐이었다.

“외할머니. 저는 포기하고 어린 이모를 낳는 게 어떠세요?”

“...유키.”

“네.”

“지금도 이모가 너무 많다는 생각 안 드니?”

옛 공주님은 자신의 부주의로 계약이 해지된 것을 자책하며 정말 많은 딸을 낳았다.

도깨비와 재계약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하지만 메이지 신궁에 드러누워 있는 오니오프는 그 모든 딸을 시큰둥한 얼굴로 한 번 쳐다보고는 ‘죽은 척하기’만 계속했다.

이게 무슨 9종?

그런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도쿄는 오니오프가 누워있다는 이유만으로 4종 이하의 괴수는 얼씬도 안 하는 특수지대가 됐다.

그 이상으로 강력한 괴수 비율이 높다는 게 함정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들의 이름은 엑시온이 그때그때 가르쳐주거든요.”

“판타이탄….”

옛 공주님은 원망스럽다는 듯이 괴수의 명칭을 불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미모를 한 다리 건너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외손녀가 태어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상세계 하느님, 판타이탄.

7종 수호자면 절대로 낮은 성적이 아니지만, 9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죽은 척하는 도깨비, 오니오프.

일본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동시에 ‘제국으로 도약할 열쇠’이기도 했다.

“그보다 외할머니. 하실 말씀이란 게 뭐예요?”

“에쏘드.”

“그게 어쨌는데요?”

“시치미 떼도 소용없-, 하아! 됐다. 그렇다면 카르 4세라고 하면 알겠니?”

“카레 짱은 멋진 신랑감이죠.”

유키나 미나미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가슴을 감싸 안으며 황홀하게 웃었다.

그런 외손녀와 반대로, 옛 공주님의 이마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온 세월만큼 깊은 주름이 그어졌다.

신랑.

지긋지긋하다 못해 저주하는 단어다.

옛 공주님은 일본에서 잘났다는 사내를 수없이 만났지만, 그들 누구도 그녀가 바라는 딸을 선물해주지 않았던 탓이다.

전부 실패작!

9종은커녕 8종이랑도 계약 못 했다.

표정이 달라지니 여태 똑같게만 보이던 둘이 전혀 다른 인물처럼 구분됐다.

“내 앞에서 남자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외할머니가 먼저 하셨잖아요?”

“그건…. 됐다. 누굴 닮아서 이리 얄미울까. 하아!”

습관을 넘어 생활이 된 한숨.

그런 외할머니에게 착한 외손녀의 모습만 보여주는 ‘유키나 미나미’였으나 속마음까지 그런 건 아니다.

본인의 후회를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전가하려는 옛 공주님을 반쯤 증오하고 있다.

헌신적인 참견쟁이!

스스로 ‘딸 만드는 기계’가 된 외할머니의 삶을 동정하고 어떤 의미로는 존경하지만, 딸들마저 ‘계약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태도는 그녀의 이해범주를 넘어섰다.

그래도,

겉으로는 착한(?) 외손녀다.

권력의 노예가 된 어머니를 이용해서 이것저것 그녀에게 지시하는 정부 겁쟁이들보다는 그나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하실 말씀은 끝나셨나요?”

“얘야. 오니오프를 잃은 우리나라가 한국과 미국의 무력도발을 저지하려면 에쏘드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단다.”

“그 힘을 다룬다고 용쓰다가 어제도 사냥꾼 하나가 죽었죠.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오니오프만 돌아오면 없어도 되는 희생이잖니.”

“틀렸어요. 에쏘드를 탐내지 않으면 없었을 희생이죠.”

이 여자의 머릿속에는 ‘오니오프’밖에 없는 걸까?

진절머리가 난다.

현재, 전 세계를 통틀어 9종 계약자는 단 한 명뿐. 고대의 절세미녀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미망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 여인의 9종 수호자는 이집트를 초강대국 반열로 단숨에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파라오(Pharaoh).

이집트에서 계급제도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곧 국가고 군단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옛 공주님’도 그렇게 될 뻔했다.

“외할머니. 또 그런 말씀 하시면 확 시집가버릴 거예요. 그것도 외국인 남자에게. 그러면 제 딸은 누군가에게 시달리지 않겠죠.”

“...가시가 있는 말이구나.”

“아끼는 외손녀가 벌써 아줌마가 되길 바라시나요?”

“혹시, 그 외국인 남자는 카르 4세니?”

“비밀~♥”

옛 공주님의 이마에 더욱 깊은 주름이 잡혔다.

돌이킬 수 없는 100년 전의 실수 이후로 ‘사적인 욕망’은 전부 포기한 그녀에게 외손녀의 자유로운 삶은 너무나 부럽고 눈부시다.

자신과 똑같은 외모로 너무나 다른 인생.

판타이탄은 ‘아기 만들기 빼고 전부 OK!’인 이상적인 수호자다. 그리고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치기에 ‘이해자’로도 안성맞춤이다.

여기에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범용성까지 더해지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계약자가 완성된다.

‘죽을 때가 된 건가.’

옛 공주님은 ‘행복한 외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망가트리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을 혐오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건 자아(自我) 성찰을 통한 반성의 의미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옛 공주님은 현대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망가진 상태다.

잃어버린 순결을 되찾고 오니오프가 다시 봐주지 않는 한, 그런 불가능한 기적이라도 없는 한 그녀에게 구원이란 없다.

그래서 지나가듯 말했다.

“카르 3세가 너를 찾더구나.”

“그 오줌싸개가요?”

세상에서 세 번째로 날카로운 검,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쥔 채 괴수 앞에서 오줌을 지린 프로사냥꾼은 ‘카르 3세’가 유일할 것이다.

그 괴수가 대적불가의 7종이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지만.

야생괴수가 아닌 수호자였다. 수틀리면 망설이지 않고 공격하는 수호자도 아닌 ‘별종’ 판타이탄.

계약자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수호자의 ‘장난’에 혼비백산하는 ‘유명한 사냥꾼’의 꼬락서니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보다 더 짜증 나는 건….

부친이 ‘총리(總理)’라고 까분다는 것이다.

“그가 마음에 안 드니?”

“외할머니라면 마음에 드시겠어요?”

“집안, 외모, 성격, 능력. 딱히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구석은 안 보이는구나. 계약자인 네게 결혼은 말도 안 되지만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다고 본단다.”

그렇게 해서 판타이탄이 떠나준다면….

하지만 그건 옛 공주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그렇게 괜찮으면 외할머니가 친하게 지내시는 게 어떠세요?”

“나이가 있잖니, 유키.”

“언제부터 나이를 신경 쓰셨다고요. 너무 많아서 잊으셨겠지만, 외손녀보다 젊으신 어른들의 함자를 전부 나열해볼까요?”

“...괜찮단다.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옛 공주님은 우아하게 차를 홀짝이며 말을 아꼈다.

외손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좋은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못생긴 주제에 어리석기까지 한 딸’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유지되고 있지만, 이 이상 자극하면 돌이킬 수 없다.

힘으로?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유키나 미나미』

정계의 중추에 있다는 사람 중에서 이 이름을 모르면 첩자다.

한국에 ‘박선영’이 있다면?

일본에는 ‘유키나 미나미’가 있다.

수호자 엘로엘처럼 판타이탄도 계약자의 요구를 100% 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이었다면 차라리 낫다. 8종 ‘바람의 정령’의 무시무시한 능력은 물리력으로 한정되어있기라도 하니까.

하지만 7종 판타이탄의 범용성은 ‘답’이 없다.

일본의 첩보위성과 감시카메라, 통신장비는 ‘가상세계 하느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비밀이 없다.』

권력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다. 청렴결백하다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대처법은 판타이탄이 해독하지 못한 ‘최신 MID 백신’으로 해킹을 저지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며칠 못 버티는 임시방편이다.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드는 용신에게 백신은 ‘의미 없는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털 없는 원숭이들이 사정사정해도 업데이트를 기대하기 힘들다.

언젠가 뚫린다.

뚫린 백신은 쓸모없다.

완벽과 효율을 중시하는 용신에게 이보다 시간 낭비인 일도 없다.

“미나미 상!”

미청년이 두 가인에게 서슴없이 다가오며 반갑게 외쳤다.

딱히 나무랄 곳 없는 남자다운 목소리였지만,

“...어째서 저 인간이 여기에 있나요, 외할머니.”

“알잖니. 막무가내인데. 하아!”

방금까지 괜찮은 사내라고 칭찬하던 옛 공주님은 없었다.

그녀는 자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천왕 가에서도 큰 어른으로 대우해주지만, 그게 실질적인 권력은 아니다.

총리의 아들조차 막지 못할 만큼 변변찮은 체면이다.

프로사냥꾼 ‘카르 3세’답게 귀가 밝은 청년이 넉살 좋게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타미에 사마.”

“...젊은이들끼리 유쾌한 시간 보내세요.”

옛 공주님 ‘미오 타미에’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절세미녀의 불똥이 튀면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키나 미나미는 짧은 치마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다가온 멋진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다기보다는, 팬티를 보여주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숙녀로서 당연한 몸가짐이지만….

그 의미는 미묘하게 달랐다.

“여긴 무슨 일이야, 땀내나는 야만인.”

“미나미 상이 보고 싶어서 잠복근무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땀은…. 하하! 땀 흘리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틀렸습니까?”

“어쩐지! 고년들의 아이템이 갑자기 좋아졌다 싶더라.”

친구라는 유부녀 중에 믿을 년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싫다는 얼굴로 카르 3세를 상대해주던 유키나 미나미는 스마트폰의 진동음을 확인하며 ‘이번에는 또 누구야?’라는 짜증 섞인 표정 그대로 정지했다.

혼또니? 정말로?

전화번호로 발신자를 확인하고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카르 3세가 자라처럼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미나미 상. 누구입니까? 혹시….”

“쉿!”

새침한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우며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위협)한 유키나 미나미는, 다 식은 찻물로 목을 축이며 목소리를 점검했다.

좋아! 이걸로 ‘유키 짱’ 완성!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꾹 누르고 간드러지게 입술을 뗐다.

(모시모시~♥)

(...잘못 걸었습니다.)

(잘못 아니야! 제대로 낚았어, 카레 짱!)

< [11장-1] 무림의 지배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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