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43화 (43/287)

< [10장-4] 난자 강탈사건 >

헌병대 후배의 임무는 공격이 아닌 위치사수다. 적들은 ‘위기’로 뒤덮인 계단을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

엘리베이터를 벌집으로 만들 태세를 갖춘 문세웅은 사각지대로 몸을 감췄다.

카르 4세가 경고한 ‘저격’에 대비하는 것이다.

곧 다가올 ‘미래’를 아는데도 죽는다면 사냥꾼으로서 실격이다.

‘나머지는 선배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후배의 신뢰를 한몸에 받은 무일은, 알아서 해결하려다가 죄 없는 여성을 휘말리게 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뻐근한 손목을 문지르며 시체를 힐끔 내려다봤다.

빈방이라고 생각하고 올라왔는데 ‘한국인 공모자’가 있었다.

카르 4세를 ‘위기’에 빠트릴 수 없는 ‘피라미’였던 탓에 [예감]이 미약해서 빗나간 것이다.

장비는 제법 좋지만, 실력이 형편없다.

무전기는 장식품이 아닐 텐데 동료란 놈들은 올 기미가 안 보인다.

“괜찮습니까?”

“흐읔…. 흐읔…. 살려, 주세요.”

“여기서 조용히 있으십시오.”

기관총이 쓸고 간 방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무사했다. 깨진 유리나 물건 파편이 튀면서 예쁜 몸에 생체기가 많이 생기긴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 없었다.

탄피가 그녀를 전부 빗겨간 걸까?

그런 기적이 있을 리 없다.

카르 4세가 전부 빗겨내거나 막은 것이다.

그렇다고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총구의 방향을 [예측]하기 쉬운 근접전이었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충격의 85%를 흡수하는 장갑 ‘앙그류 그랑모리’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살리지 못했을 거란 의미다.

‘질로 안 되면 양이란 건가?’

카르 4세는 ‘깜짝 놀라서 발포한 무고한 사냥꾼’일 가능성은 배제했다.

알몸의 여자를 침대에 눕혀둔 남자는 완전무장하고 방문 앞에 잠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수상하고 말고 할 것 없이 공범!

복도로 나가려던 카르 4세는 멈칫했다.

이미 천장을 뚫고 ‘은밀히’ 올라왔는데 굳이 이점을 버리고 위험한 복도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가씨.”

“네!”

“욕조에 들어가서 바짝 엎드려 계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수호자가 ‘있는 미녀’와 ‘없는 미녀’의 극명한 차이.

고분고분하게 지시를 따르는 여인이 안전을 확보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카르 4세는 옆방의 사냥꾼 위치를 어림짐작해봤다.

창의력 없게도 문앞이다.

오른손에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꽉 쥐었다.

왼손에는 죽은 사냥꾼의 기관총.

간단히 준비를 마친 카르 4세는 ‘흉흉한 여자친구’로 콘크리트 벽을 두부처럼 부드럽게 ‘소리 없이’ 도려냈다. 그리고는 발로 ‘뻥!’ 차고 돌입!

이후에 보지도 않고 문 쪽으로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

드드드득!

사냥꾼은 자신이 어째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고꾸라졌다.

나중에 신분확인을 위해 머리는 피했지만, 허술한 등을 뚫고 박힌 총알이 내장기관을 세탁기처럼 휘저었을 것이다.

절명(絶命).

사냥꾼의 승패는 이처럼 순식간에 판가름난다.

누구의 [예감]이 더 뛰어나느냐에 따라 사냥꾼과 사냥감으로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이다.

이번에도 공모자는 ‘하룻밤 즐기려는 사냥꾼’으로 위장 중이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 몰라요.”

이불을 뒤집어쓴 여자는 벌벌 떨며 횡설수설했다.

안심하라고 한마디 해주려던 무일은 포기하고 다음 벽을 부수고 같은 방식으로 또 한 명을 제거했다.

그다음은 빈방.

건너뛰어서 또 한 명을 간단히 처리했다.

카르 4세는 살인에 망설임이 없었다.

‘망명은 몰라도 배신은 안 될 말이지.’

한국인이 한국인을 괴롭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괴롭힐 거면 ‘외국인’이 된 후에 정정당당하게 덤벼라.

결과적으로 ‘제거한다.’는 건 변함없겠지만.

그래도,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친구’라는 선택지도 열려있다.

슬슬 목적지에 다 왔다고 느낄 때쯤이었다. 카르 4세는 위치가 발각됐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놈들도 일단은 사냥꾼. 아무리 둔하더라도 [예감]으로 눈치챌 때가 되긴 했다.

“...이해할 수 없군. 들킬 걸 알고 경비까지 세워두면서 뭘 하려던 거지?”

이 많은 호위병력은 시간끌기용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누구를 호위하고 있는지도 모를 수 있다.

즉, 잔챙이다.

카르 4세에게 중요한 건 홍영희를 납치한 ‘중국인 남자친구’의 목적이다.

서울을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걸까?

더는 쓸모없어진 기관총을 버린 카르 4세는 복도와 뚫린 벽이란 양쪽 길을 놓고 망설이는 사냥꾼들의 태도를 [예측]했다.

모텔 2층은 더는 일방통로가 아니었다.

정글짐처럼 자유롭게 방과 방을 넘나들 수 있게 변했다.

“저쪽이다! 그림자를 봤어!”

“아니야! 이쪽이야!”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여기야! 여기라고!”

한두 명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죽자마자 공황에 빠져버리는 꼬락서니들은 사냥꾼이라고 하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저들로서는 어쩔 수 없으리라.

상대는 세계를 다 뒤져도 몇 명 없는 ‘4급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4급 사냥꾼』

공식적으로 사냥꾼은 ‘3급’까지만 있다. 인간이 홀로 쓰러트릴 수 있는 건 3종 괴수까지이기 때문이다.

카르 4세 같은 ‘4급’은 돌연변이다.

괴수로 치면 [예지]를 가진 ‘4종 소형’으로, 사냥꾼이 못 쓰러트리는 강적으로 명시된 포식자다. 그리고 같은 인간이란 점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희망을 걸어보자면?

이 4급 사냥꾼의 몸에는 괴수의 ‘은색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대만 맞추면 쓰러트릴 수 있다!

그 ‘한 대’의 가능성이 절망적인 수준이지만 말이다.

“...시간을 끌면서 뭘 하려고 했는지 볼까.”

카르 4세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혼자 남은 복도를 저벅저벅 걸었다.

총성이 흔한 노원구라서 공포가 전염되진 않았지만, 창문이 깨지고 사람의 처절한 비명이 들린 모텔은 어느새 헌병대가 포위한 상태였다.

하지만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모텔 로비에는 신분이 확실한 ‘헌병대장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 2층을 봤어도 그들이 과연 차분했을까?

카르 4세가 지나온 뒤편으로 몸이 동강 난 시체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덜컹!

다른 방보다 고급스러운 특실 문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간 무일은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홍영희를 보호하듯 선 잘생긴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한국인이랑 다를 게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무림인 특유의 격투술 자세가 은연중에 묻어났다.

변변찮지만.

“이게 무슨 만행이오!”

“그건 홍영희 양이 정말로 잠들어있을 때나 가능한 말 아닌가. 기절시키고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남녀가 모텔에서 하는 일이야 뻔하지 않소!”

“...목소리를 낮춰라.”

“흡!”

남자는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감각에 휩싸이며 무릎이 접혔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가상현실게임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완전한 죽음’의 공포를 체험시켜줄 순 없다.

말하면 죽는다.

움직이면 죽는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아미파의 ‘시링 팽’과 죽마고우 사이인 ‘하오 쟝’은 태어나서 ‘두 번째’로 죽음의 경계까지 한 걸음 남았음을 깨달았다.

“중국의 침술인가? 사람을 깊은 수면에 빠트리는?”

“그렇소.”

“하지만 너는 할 줄 모르지.”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 침 끝에 마취성분을 발라놨어. 계획은 나쁘지 않아. 침술을 보여준다고 꾀어서 모텔로 온 후에 조용히 제압한다. 괜찮은 시나리오야.”

“......”

하오 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계획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 있고 한국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침입자는 침대 위에 쥐죽은 듯이 누워있는 홍영희를 힐끔 본 것만으로 거기까지 알아맞혔다.

내부의 배신자?

있어도 이건 불가능하다.

든든한 호위무사를 고용하는 데 실패했다는 ‘시링 팽’의 보고를 받자마자 계획을 전면수정했다.

출산까지 10개월씩이나 야생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자만 채취(採取)’하기로 했다.

“에어컨 안에 재미난 장난감을 숨겨뒀군.”

“헛?!”

“의료도구? 흠…. 난소에서 난자를 추출하는 장비인가.”

옷장과 서랍도 안 보고 바로 에어컨 수색?

누군가 봤다면 두 남정네가 벌이는 희극(喜劇)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속속들이 아는 것이오?”

“너의 눈동자가 비밀을 알려줬고 나는 들췄다. 간단한 이치지.”

“그런….”

저 설명의 어디에 간단한 이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까?

하오 쟝은 ‘죽음의 공포’도 잊고 허탈하게 웃었다.

가상현실에서는 시간(낮)과 장소(야외)를 따지지 않고 몸을 맡기던 홍영희의 태도가 180˚ 변했을 때부터 조짐이 이상하긴 했었다.

현실이라서 그런 걸까?

단둘이 있는 상황을 노골적으로 꺼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난자를 추출할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침술’이란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짜낸 ‘하오 쟝’은 솜씨를 보여주겠다는 말로 꼬드겨 간신히 ‘단둘’인 상황을 이끌어냈다.

순조로웠다.

물론, 금방 들키리라고 예상하긴 했다.

홍영희의 몸에 붙은 ‘모짜리나 바글버글’을 가만 놔두고 수술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간이수술이라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의료장비를 삽입하는 일이다. 감시자가 수술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추출한 난자를 내놔라.”

“없소.”

“인공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다. 이 이상 괴롭히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느꼈다면 넘겨라.”

“정말로 없소.”

무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중국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굳이 물어보고 설득했던 이유는 [예감]할 수 없었던 탓이다.

에어컨 속에 감춰둔 의료장비를 찾아낸 것처럼 ‘홍영희의 난자’도 가능했다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이름은?”

“하오 쨩. 한국에서는 장준호라는 이름을 쓰고 있소.”

“공모자의 이름은?”

“나도 모르오. 순진하게 단독범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렇다고 끄나풀도 아닌 것 같은데.”

카르 4세는 당장에라도 벨 기세로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수마(睡魔)에서 해방된 홍영희는 소리 죽인 채 울고 있었다.

이 자리에 그가 나타나서 훼방만 놓지 않았다면 그녀는 짐작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저 중국인 남자친구의 침술에 놀라는 정도로 그쳤으리라.

나중에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시간 끌지 말고 벨까?’

한순간 그런 생각을 한 무일이었지만 꾹 참았다.

죽음은 언제든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문제로 살려둬야 한다면 ‘죽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끔찍하게 괴롭힐 방법도 무궁무진하다.

진즉 눈치챘어야 했다.

고립된 건물 안에서 농성한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홍영희의 몸을 원했다면 노원구가 아니라 서울을 완전히 빠져나갔어야 했다.

지나치게 ‘감’에 의존한 결과다.

사냥꾼의 [예감]은 ‘타인의 위기’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일은 스마트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세웅.)

(네! 선배님!)

(제압이 완료됐다. 헌병대를 이끌고 생존자와 시체를 수습해라.)

(알겠습니다!)

문세웅은 부상이나 정황 등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봉쇄한 계단 밑까지 전해진 ‘공포’만 들어도, 위층에서 일방적인 전투가 진행됐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고 종료까지.

노원구까지 달려온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다른 곳으로도 연락했다.

(...특공대장님.)

(안녕.)

(몽유병 환자처럼 인사할 때가 아닙니다만!)

(응. 수고 많았어, 선배.)

(제가 놓친 부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따로 보고할 필요도 없다.

척하면 척이다.

기분 언짢지만, 카르 4세가 못하는 일은 선지혜가 할 줄 안다.

모든 문제를 비논리적인 본능으로 해결하는 프로사냥꾼의 약점을, 지혜로운 공주님은 철저한 논리규명으로 보완한다.

(이모가 대기하고 있어.)

바람의 여왕님이 직접 나선 모양이다.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홍영희의 난자’를 조속히 회수하기 위해 은밀한 비행수단을 갖춘 계약자를 파견했을 것이다.

박선영이 기다리는 이유다.

폭풍은 중국의 공모자와 계약자를 한꺼번에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

(꼬맹이가 부탁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응. 그럴게. 아마, 이모도 회수하고 싶으실 거야. 조카의 난자인걸.)

(...결국은 제가 안 나섰어도 될 문제 아니었습니까?)

(그건 아니지.)

모텔을 빠져나간 손님 모두를 감시하긴 어렵다.

본부에서 무리했다면 가능했겠지만, 63빌딩 붕괴와 강남구 반란 뒷수습도 끝마치지 못한 상태라 ‘수단(手段)’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냉정한 얘기지만, 홍영희의 ‘의미 없는 난자’보다 시민의 목숨과 안전이 우선이다.

박선영의 주목적도 ‘중국의 계약자 제거’에 있다.

카르 4세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며칠 잠복하며 조용해지길 기다리다가 꼬리 자르듯 다른 공모자에게 넘겨줬을 것이다.

그러면 찾을 방도가 없다.

다행히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처럼 서울 밖으로 곧장 빠져나간 공모자는 ‘죽음의 마녀’가 뒤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파견요청을 보냈다.

“그렇다는군. 중국의 하오 쟝.”

“...카레 공. 어째서 이번 일에 나선 것이오.”

“카레 공?”

“아니면 카르 4세로 부르겠소.”

너무나 예상 밖의 호칭에 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 ‘카레 짱’의 짝퉁이 나온 걸까?

“너.”

“하오 쟝이오.”

“그래, 너. 살기(殺氣)를 거뒀다고 기어오르지 마라.”

“......”

“유키 짱이랑 무슨 관계지?”

< [10장-4] 난자 강탈사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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