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41화 (41/287)

< [10장-2] 난자 강탈사건 >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위험한 사건은 무사히 해결됐다.

탈의실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나온 무일은 본부에 연락해서 ‘기물파손 보고와 사유’에 대한 브리핑부터 했다.

다 씻은 윤소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나왔다.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

공용샤워장으로 향할 때부터 즐거워 보였다.

“오빠. 학교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를 초능력자로 아는 아가씨가 여기 또 있군.

무일은 ‘민폐가 분명한 미소녀’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호응해줬다.

윤소영은 카르 4세가 감당할 수 없는 7종 계약자임은 분명하지만, 과거에 만났던 아가씨들(특공대장 포함)이랑 비교하면 ‘천사’다.

그 때문에 곤란할 때도 있지만 싫진 않았다.

‘수호자보다 무질서한 개차반도 있으니.’

전래동화에 곧잘 등장하는 ‘마음씨 착한 아름다운 공주님’은 전국을 다 뒤져서 한두 명 있으면 많은 거다.

평범한 여성들은 아름다운 계약자가 행복하리라고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봐도 그렇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수많은 특권 뒤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외모관리』

계약자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경 써야 한다.

성형수술, 화장 등을 일절 할 수 없는 그녀들이 몸매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먹는 알약 숫자만 평균 30알.

그 밖에도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외모관리’에 허비한다.

심지어 ‘자연미인(계약자)’보다 예쁜 ‘성형미인(실패자)’이 심심찮게 돌아다니고 있다.

이러니 짜증이 안 날까?

계약자의 성격이 이상해지는 건 괴수의 영향뿐만 아니라 열악한(?) 환경도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그런 계약자를 사람들은 쉬쉬한다. 그러면 계약자는 더욱 이상해진다.

악순환의 반복.

그 고리를 끊고자 선지혜가 ‘공동책임’으로 묶었다.

하지만,

카르 4세는 이 정책의 성공사례(외국)를 본 적이 없다.

“반 애들이랑 말뚝박기게임을 했어요!”

“그렇습니까.”

“정말이라니까요! 영희가 ‘같이 할래?’라고 말해줬다니까요!”

“그래서 옷에서, 아닙니다.”

윤소영의 교복에서 나는 땀내는 말뚝박기게임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열중했으면 땀이 다 났을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넘긴 카르 4세는 ‘여중생들은 말뚝박기게임을 즐긴다.’는 새로운 상식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보다….

계약자를 ‘격한 게임’에 끼워줬다는 게 놀랍다.

허리만 조심하면 괜찮다고 판단한 걸까? 말뚝박기게임은 그나마 안전하지만, 계약자가 포함된 ‘피구’ 같은 스포츠는 명백한 자살게임이다.

‘즐거워 보이네.’

계약자만 모아놓고 가르치는 특수학교는 없다.

집중공격이라도 받았다가는 아까운 인재를 몽땅 잃을 수 있다는 위험성 외에도, 필연적으로 마주친 수호자들끼리 십중팔구 마찰이 생기는 까닭이다.

그래서 여학교에 분산해서 다닌다.

외모관리만 하면 되는 계약자에게 ‘공부’가 왜 필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친구를 사귀고 사회를 알아가는 ‘배움의 장’이다.

공부만 할 거면 무일처럼 독학(학원)해서 검정고시를 치는 편이 효율적이다.

“오빠도 이제 아셨죠? 윤소영이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윤소영 양.”

말뚝박기게임이 어째서 어른으로 가는 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체형이 절대 어린애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아무튼, 그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걸까?

기분이 더 좋아진 윤소영은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며 학교 혹은 가상현실에서 겪었던 즐거운 얘기를 한 보따리 푼 후에 떠났다.

‘자랑거리가 참 소박하네.’

일반 여학생들이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윤소영을 끼워준 건 아닐 것이다.

이건 7종 계약자가 노력한 결실.

교우관계뿐만 아니라 레드군을 설득했기에 가능한 ‘단체놀이’다.

유키 짱의 판타이탄처럼 ‘아기 만들기 빼고 전부 OK!’라거나, 박선영의 엘로엘처럼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같은 관대함을 붉은 용왕님에게 기대하긴 힘들다.

그런데 해냈다!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기꾼들보다 훨씬 ‘어른’이다.

“...질 수 없지.”

17살 소녀보다 10년을 더 산 어른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다시 운동을 재기한 무일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루, 이틀, 닷새….

특공대로 돌아왔지만, 카르 4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원은 하나도 없었다. 이 프로사냥꾼보다 ‘선배’라고 할 사냥꾼들은 전부 죽거나 이민, 은퇴, 전근(轉勤)하고 없기 때문이다.

특공대장 선지혜의 말대로였다.

지금의 특공대는 ‘카르 4세의 시대’였다.

그렇다고 대단한 감투인 건 또 아니었다. 볼트윙 사건으로 너무나 많은 프로사냥꾼을 잃는 바람에 특공대는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은 줄지 않았다.

괴수가 인간의 사정을 신경 쓸 턱이 없잖은가.

『다리 벌린 그대도 아름다워~♪ 예이~♬』

스마트폰 노래가 또 바뀌어있다.

이런 노래를 작곡하는 양반들의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주고 싶다.

무시무시한 8종 아가씨를 혼낼 순 없으니.

(무슨 일입니까, 특공대장님.)

(선배가 맡아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바쁩니다.)

선지혜가 무슨 ‘일’인지 말해주기도 전에 딱 잘라 거절하는 카르 4세였다.

그녀의 부탁이라서 매정하게 군다거나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바빴다. 풀 뜯고 있는 무고한 괴수를 찾아다니며 사냥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경비대와 수색대를 ‘사냥’하고 다니는 괴수를 역으로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한 마리’를 채우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다 1% 확률로 실수라도 하면 여지없이 사망 확정.

올해 연말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홍영희 양이 실종됐어.)

(놓쳤다는 겁니까?)

(응.)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일이 중요도를 아신다면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중요도? 없는데?)

(음?)

유전정보가 사실은 ‘가짜’라는 삼류드라마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설마하니 중국이 가장 중요한 유전자의 조작 가능성도 조사 안 해보고 물었을까.

유전자는 ‘진짜’다.

카르 4세의 예상대로, 홍영희는 ‘와이츠 1대 계약자 선유나’의 난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중국은 가장 결정적인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중국뿐만 아니라 용(龍)이 없는 모든 나라가 하는 착각이다.

『희소성』

이걸 깨닫지 못한다면 용의 계약자도 없다.

미녀의 기준은 무엇일까?

고대(古代) 미인도와 벽화를 보면 현시대의 ‘가녀린 미녀’하고는 차이가 매우 크다. 농담이 아니라 당시의 미녀는 ‘돼지’였다.

자식을 한번에 8명씩 쑥쑥 나아줄 것 같은 여자가 미녀였다.

호리호리한 몸에 오장육부를 어떻게 다 욱여넣었는지 신기한 요즘 미녀하고는 다른 의미로 ‘비현실적인 미녀’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여자가 ‘희소’했다.

살이 찌는 건 고사하고 굶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선배. 선유나는 선지혜에게 ‘왜’ 계약을 물려줬을까? 어여쁜 딸이 ‘야생 와이츠’와 계약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한국에 와이츠가 둘이면 더 좋잖아.)

(그건…. 어라?)

(이제야 눈치챘나 보네.)

(그랬었군.)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계약이 파기되는 건 아니다.

극히 드물지만, 왕자님과 결혼한 공주님을 축복해주는 용이 등장하는 전래동화도 있다.

유대감.

공주님과 용 사이에 견고한 신뢰가 형성된 덕분이다.

사람들은 계속 착각하고 있었다.

와이츠 1대 계약자 선유나는 ‘유부녀’라서 계약이 해지된 게 아니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계약자가 임신하고 출산할 때까지 수호자가 기다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왕자님과 첫날밤을 함께한 순간 깨졌으리라.

아니, 그전에 왕자님이 밟혀 죽었을지도?

하지만 대한민국 용신은 선지혜가 태어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선유나와 와이츠.

함께한 세월만 따지면 반백 년을 훌쩍 넘겼다.

내세울 거라고는 ‘고추’뿐인 수컷 따위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유대관계가 형성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어머니가 계약을 내게 물려준 거야.)

국모(國母) 선유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멋대로 ‘계약을 유지할 수 없어서 물려줬다.’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상하긴 했다.

까다로운 8종 괴수 와이츠가 흡족해할 만큼 예쁘게 성장한다는 보장도 없는 딸에게 ‘자연스럽게’ 계약이 이전됐다는 게 말이다.

무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선지혜가 평범한 여자로 성장했다면 들통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와이츠와 계약하기에 합당한 ‘경국지색 공주님’으로 자라줬다.

고귀한 혈통(血統)?

미녀의 유전자?

그게 아니었다. 잘못 짚었다.

대한민국의 근대 100년 역사를 홀로 쓴 와이츠는,

『계약자의 ‘부탁’으로 계약자를 바꿨다.』

선지혜의 말대도다.

홍영희의 ‘아름다운 몸’은 중요하지 않다.

와이츠 1대 계약자 선유나의 유전자를 이은 그녀가 딸을 몇이나 낳든 용과 계약한다는 보장이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혹시라도 계약하게 된다면 그건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다.

순결한 자연미인, 누구에게나 열린 가능성.

즉,

중국은 허공에 삽질하는 중이다.

(그래서 경계를 소홀히 했다는 겁니까.)

(응.)

(여동생 아닙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은 아니지만, 선배는 내 여동생이 홍영희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어머니가 제공한 난자는 한두 개가 아니었어. 심지어 남동생도 있지. 그 애들을 전부 편애하고 보호할 순 없어. 해줘도 안 되고.)

장난스러움을 지운 선지혜가 냉정하게 말했다.

가뭄에 콩 나듯 극히 드물지만, 이럴 때의 그녀는 현명하고 공명정대하다.

수호자 와이츠처럼.

그 능력을 ‘선배 골탕먹이기’에 쏟아붓지 말고 대한민국 발전에 보태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5년 전,

『시끌벅적한 한국이 더 재미있는걸~☆』

명백한 위기상황에 빠진 프로사냥꾼이 넌지시 던진 질문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듯 업혀온 후배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민폐의 여신(女神)이다.

하지만 청혼을 걷어찬 전적이 있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이 또한 ‘업보’려니 하고 있다.

(그래서 제게 연락 주신 겁니까?)

홍영희가 어찌 되든 상관없는데도 신경 써주고 있다.

이렇게 해야 ‘선배를 귀찮게 할 수 있다.’는 공식이 완성되기 때문이지만, 결과만 보면 선지혜는 ‘상냥한 여자’라고 해도 좋다.

한무일을 움직일 방법.

그건 선지혜가 카르 4세의 ‘이해할 수 없는 정의감’에 동조하는 것이다.

(응. 내가 심어둔 ‘보글보글’의 감시망에서 사라지고 7분쯤 지났어.)

(장소를 알려주십시오.)

일본 용신의 회심작이며, 세상의 수많은 동정남을 구원한 ‘모짜리나 바글버글’의 명칭을 똑바로 부르라는 핀잔은 생략했다.

말해봐야 듣지 않을 테니까.

카르 4세는 자신이 안일하게 대처해서 벌어진 실종사건에 집중했다.

하지만 어떻게 놓칠 수 있을까?

선지혜가 감시를 허술하게 하긴 했어도 고의로 놓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긴 해도 장난치진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무일이 싫어한다.』

싫어한다는 의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은 ‘민폐만 끼치는 후배’에게 그냥 져주며 끊임없이 끌려다니는 정도다.

얄밉지만 정말 싫지는 않다고 할까!

하지만,

한무일이란 소년이 13살에 가출하게 된 계기가 된 ‘정의(正義)’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말로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 그건 이 남자를 죽을 만큼 사랑하는 선지혜에게 있어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그러나!

선지혜는 철두철미한 와이츠의 계약자.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꿈에서조차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보내줄게. 그리고 운전기사가 5분 이내에 도착할 거야. 저번에 시켜보면서 문뜩 생각난 건데, 적성에도 맞는 것 같던걸.)

(문세웅입니까.)

(응. 헌병대장 아들이라서 교통법에도 안 걸리는 최고의 운전기사야.)

(적성이라고 한 건 그쪽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헌병대장 아들’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선지혜가 예상한 5분은커녕 3분도 안 돼서 스포츠카 한 대가 요란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카르 4세의 앞에 멈춰 섰다.

최고의 운전기사라는 점은 동감한다.

하지만 ‘헌병대장 아들’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선배님! 모시러 왔습니다! 어서, 중국의 첩자를 잡으러 가시죠!”

< [10장-2] 난자 강탈사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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