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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40화 (40/287)

< [10장-1] 난자 강탈사건 >

[10장] 난자 강탈사건

학명: 신토구리(깐깐한 자연파 너구리)

서식지: 고향

특징: 침 바르면 다 낫는다네~!

위험도: 2종 소형

비고: 옷 벗을 각오가 됐다면….

***

아침부터 미루고 미룬 훈련의 일환(一環)으로 팔굽혀펴기에 들어간 무일은 휴대전화 연락을 받자마자 한걸음에 떠난 홍영희 곁에 있던 사내를 떠올렸다.

깔끔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가상현실게임에 열중한 사람답게 비실비실했지만, 민간인 기준으로는 적당한 근육 잡힌 준수한 체형이다.

확실히 비전투원이군.

카르 4세처럼 ‘[반격]의 달인’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 끽해야 권총을 숨긴 비밀요원 수준?

삐삐삐삐삐-, 띠링!

익숙한 손놀림으로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집주인처럼 거침없다.

운동을 멈춘 프로사냥꾼은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쥘 생각도 안 하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직후,

“오빠. 샴푸랑 수건 좀 쓸게요.”

...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하자마자 이것저것 요구하는 윤소영. 하지만 집주인이 건네주거나 허락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세면도구가 들어있는 서랍을 열고 꺼내 갔다.

잠깐! 거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점잖게 물어보지 못했다.

아름다운 여중생은 콧노래를 부르며 현관문을 닫고 벌써 나간 탓이다.

공용샤워장으로 향한 것이다.

이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무일은 아무런 제지도 못 했다. 집주인인 그가 손님이 된 기분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좋아하는 남녀에게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주는 ‘상인(商人)의 날’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줄줄이 미녀가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하아…. 일단은 문제가 없도록 해야겠지.”

귀찮다는 듯이 일어선 무일은 상체의 땀을 닦은 후에 건성으로 ‘특무대 활동복’을 걸쳤다.

옷의 기능보다 통행증으로 유용한 물건이다.

금전적인 손실을 끼치지 않는 한에서 공공시설, 사유시설 그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리의 상징이다.

그 범위에는 금남(禁男)의 ‘여성전용’도 포함되어 있다.

“꺄아아아!”

“엄마!”

여성 탈의실 앞에 설치된 성별식별장치에서 ‘남성 탈의실은 우측입니다.’라는 경고음이 들렸지만, 깔끔히 무시한 카르 4세.

들어서자마자 쩌렁쩌렁 울리는 여자들의 하모니에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홀딱 벗고 있는 여인이 둘.

속옷만 남은 소녀 하나.

씻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데 둘씩이나?

윤소영 혼자 있을 거라고 여겼던 무일은 ‘위기’가 아니라서 작동하지 않는 [예감]의 불완전성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에는 셋 다 계약자처럼 보인다.

어디 하나 나무랄 곳 없이 아름답고 요염하다.

하지만 알몸의 두 여성은 ‘성형수술’이나 ‘유전자조작’ 같은 의학(醫學)의 힘을 빌린 민간인이다.

아니었다면 카르 4세는 탈의실 앞에서 멈춰 섰을 것이다.

명백한 ‘위기’ 상황이니까.

계약자의 알몸을 훔쳐본 ‘털 없는 원숭이’를 수호자가 가만 놔둘 리 없다.

“오빠? 정말로 무일 오빠예요?”

완전히 무방비한 알몸인 두 여성이랑 달리 속옷이라도 걸친 윤소영은 침착했다.

반대로 무일이 긴장하고 있었다.

‘뭔 아가씨가 옷 벗는 속도가 이렇게 빨라!’

바로 뒤따라왔는데 속옷만 남았다.

저 상태에서 더 벗었다면?

레드군이 출동했을지도 모른다.

무일은 자신의 머리통이 여전히 제대로 붙어있는지 목을 쓰다듬으며 확인한 후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교복에 주름이 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훌러덩 벗어서 잠금장치가 달린 옷장에 쑤셔 넣는 과격한 결단력!

계약자에게 ‘여성스러움’이 뭔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보호자들의 업무태만을 지적 안 할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참고해야겠군.

생명연장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정보도 소중하다.

“공무 중입니다.”

“여성 탈의실에서요?!”

무일이 덮친(?) 것보다 ‘공무(公務)’라는 발언에 더 놀라는 윤소영.

눈치 없이 계속 소리 지르던 두 여성은 타올 등으로 알몸을 가리고 탈의실 구석에 바짝 밀착한 후에야 진정됐다.

그녀들이 조용해진 이유는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장검(長劍).

소년의 신장보다 조금 더 작은 상아색 검은 모조품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이는 기분을 선사했다.

저주받은 검이라서?

그런 흉흉한 소문을 무시하더라도 수많은 괴수를 벤 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성(魔性)을 띄고 있었다.

“몰래카메라를 철거하러 왔습니다.”

“어머!”

“알몸이 인터넷 등에 유포되면 큰일 나는 건 당사자가 아니라 서울입니다.”

윤소영의 초특급 알몸 영상이나 사진을 보고 가슴이 활활 타오른 남자들은 정말로 온몸이 활활 타올라 잿더미가 될 것이다.

무고한 수천만 시민들이랑 함께.

“죄, 죄송해요.”

카르 4세의 말뜻을 이해한 윤소영은 대뜸 풀이 죽었다.

하지만 레드군이 이 사냥꾼의 머리를 물어뜯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계약자에게 도움되는 일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걸 노린 거지만 장담하진 못했다.

‘요즘 목숨을 너무 함부로 굴리는 것 같은데.’

경계의 눈초리로 노려보는 두 여성을 피해 걸어간 카르 4세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벽을 향해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대뜸 찔러 넣었다.

일단은 하나.

벽에 낸 흠집으로 손가락을 넣은 카르 4세는 바늘처럼 얇고 기다란 봉을 꺼냈다. 23세기에 유행하던 구닥다리 카메라다.

“우와….”

윤소영은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벽에서 수상한 무언가를 꺼내는 오빠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반대로 두 여자는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저 벽에 바늘이 심어져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육안(肉眼)으로 찾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네가 그 몰래카메라 주인 아니야?』

그렇게 묻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대답해줄 필요성을 못 느낀 무일은 계속해서 [예감]에 집중했다.

누군가의 감시.

그 정보가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에 따라서 ‘위기’가 될 수 있다.

호기심 왕성한 여중생에게 ‘찔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한마디 하며 ‘바늘 카메라’를 넘겨준 프로사냥꾼은 샤워장으로 향했다.

“이봐요! 사과해야 할 것 아니에요!”

“꼬맹이가 무슨 탐정놀이야! 당장 나가!”

진검에 겁먹었던 두 여인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해치지 않을 거란 ‘상식’이 그녀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다.

발걸음을 멈춘 무일이 고개만 돌려서 말했다.

정말 귀찮다는 듯이.

“주소 514동 123호, 나이 24세, 직업 웨이트리스, 이름 장한별, 사이버 사생활 의견 불일치로 신랑과 별거 중.”

“헉!”

“주소 514동 127호, 나이 21세, 직업 대학생, 이름 박수지, 하교 시간이 아닌 걸로 보아 수업을 땡땡이침.”

“그건?!”

이웃의 신상정보는 기본적으로 암기하고 있다.

괴수에게 살해되거나 잡아먹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됐을 경우에 누군지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실종돼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전투에 도움이 되는 이웃이 있다면 협조를 구할 수 있고,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용의자를 좁힐 수 있다.

주거지의 안전확보는 무기손질 다음으로 최우선사항이다.

괴수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수집은 괴수의 기습으로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아주 많이 도움된다.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고.

“아직도 장난으로 보입니까?”

“실례했습니다.”

“조용히 있을게요.”

개인신상정보는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위축시키는 동시에 신뢰를 끌어낼 수 있다.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카르 4세는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윤소영이 쪼르르 따라오며 소곤소곤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척 냉정해 보였어요, 오빠.”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냉정한 거 맞습니다, 윤소영 양.”

“하지만 예쁜 언니들이잖아요.”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경쟁심리 같은 게 슬그머니 올라온 모양이다.

카르 4세는 대답 대신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며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휘둘렀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있는 점(초파리로 추정되는)을 베었다.

그 물체는 두 동강 난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윤소영이 잽싸게 그 둘을 주워들었다.

“이건 뭐예요?”

“모짜리나 바글버글. 버전까지는 모르겠지만, 원격조종으로 움직이는 MID 감시카메라입니다. 환풍구 등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아! 벌레 카메라! 맞죠?”

“...이걸 개발한 일본 용신이 들으면 분개할 비유지만 맞습니다.”

무일의 집에도 곧잘 서식하는 녀석으로 파리, 모기보다 많다.

누가 침투시켰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가격은 크기와 무게에 반비례하고 방수코팅, 태양열발전, 은폐장치 등의 옵션이 첨가될 때마다 천문학적으로 급상승한다.

『모짜리나 바글버글(멀리서 기다리는 눈과 귀)』

인터넷에 떠도는 야한 동영상은 모두 이걸로 찍었다고 보면 된다.

퇴치용 방해전파가 사방에 깔린 괴수대응본부와 국정원, 국회의사당 등에는 거의 없고 있더라도 지나가던 사냥꾼들이 제거하지만, 민간업소는 그렇지 않다.

특히, 여탕과 모텔은 최우선 표적이다.

무일도 이것 덕분에 ‘여체의 신비’ 같은 환상은 품고 있지 않다.

목이 없는 여성의 시체를 한 번만 부검해보면 그 뒤로는 아랫도리가 바짝 서는 일은 웬만해선 없을 것이다.

선지혜의 알몸쯤 되면 얘기가 또 다르지만.

‘그러니 유감은 없어.’

매년 찾아오는 ‘상인의 날’을 싫어하는 동정남들을 위해 노력하는 누군가의 비싼 카메라를 부순 건 미안하지만, 서울이 불타오르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흠잡을 데 하나 없는 미녀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다.

뱃살이 나오면 지방분해수술, 가슴이 빈약하면 지방삽입수술, 눈이 작으면 동공확대수술, 턱이 이상하면 골격재활수술 등등.

여성이 아름다워질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남성이 훔쳐보는 방법도 그만큼 치밀하고.

하지만 그중 ‘자연미인’만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된다.

“무일 오빠.”

“네.”

“이런 벌레 카메라는 어디서 구해요?”

“...밀수부터 시작해서 경로는 무척 다양하지만, 윤소영 양처럼 착한 아가씨는 본부 정비과나 정보과에 부탁하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부디, 정비과와 정보과가 무사하길 빈다.

또 있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무일은 좁쌀 크기의 ‘모짜리나 바글버글’을 손수건으로 싸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윤소영 양.”

“네, 오빠.”

“전에 여기서 목욕했던 적이 있습니까?”

이미 동영상이나 사진 등이 유출됐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공용샤워장 같은 ‘누추한 장소’에 계약자가 온다는 상황 자체가 흔하지 않은 까닭에 카르 4세도 방심한 것이다.

세면도구의 위치를 아는 것으로 보아선 전에 썼을 확률이 매우 높다.

“어…. 오빠가 동해에 있을 때 가끔 썼어요.”

“신이시여.”

신은 대한민국을 버린 게 분명해다!

하지만 아직 쓰레기통에 넣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머리 감고 얼굴만 씻는 정도였어요. 오늘처럼 속옷으로 돌아다닌…. 어? 앗?!”

“...반응이 없어서 괜찮은 줄-,”

“오빠!”

미소녀가 가슴을 가리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의 아미파 계약자, 시링 팽의 발육속도가 옐로카드라면, 중국에서 여신으로 통하는 윤소영은 반론의 여지 없는 레드카드였다.

그녀의 실제 나이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앙증맞은 속옷뿐.

...우선은 살고 봐야겠다.

“기억에서 당장 지우겠습니다!”

< [10장-1] 난자 강탈사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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