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39화 (39/287)

< [9장-4] 정치의 이름으로 널…. >

“아직 확정된 사항은 아니에요. 맞선 정도….”

“무서운 여왕님의 눈을 피해 바다 건너온 남자친구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같은 남자로서 장담할 수 있습니다.”

꼬마를 간신히 벗어난 소년이 ‘남자’ 운운하니 전혀 설득력 없었다.

하지만 홍영희는 웃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 사냥꾼이 ‘그럴 것이다.’라고 말해서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예언자의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기자는 말해야만 했다.

“...한무일 씨.”

“네.”

“그이가 정말로 저를 사랑할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초능력자가 아닙니다, 홍영희 양.”

“정말로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 같은 건 없습니다. 하물며 만나보지도 않은 남자의 생각 같은 건.”

카르 4세는 ‘또 상담인가?’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론이라면 진즉 났다.

그 중국인 남자친구는 홍영희의 ‘아름다운 몸’을 사랑한다.

순수한 민간인이라면 긴가민가했겠지만, 아미파 같은 계약자 단체랑 깊은 연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도적인 접근’이 확실하다.

이건 [예측]할 필요도 없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사실은 왕자님이었다니!』

그런 전개는 없다.

유리구두가 벗겨진 신데렐라 이야기가 불러온 폐단이다.

무도회에서 잠깐 만난 ‘수상한 미녀’에게 푹 빠진 난봉꾼이 멋진 왕자님? 그런 왕자가 신데렐라의 무엇에 반했을까?

아름다운 몸.

춤추는 무도회에서 ‘착한 마음씨 테스트’ 같은 걸 했을 리 없다.

전래동화에서 빠지지 않는 진리.

소녀들이 꿈꾸는 사랑이랑 조금 다른 ‘육체적 사랑’이다.

‘이게 대답이 필요한 질문인가?’

신데렐라는 내세울 게 ‘아름다운 몸’뿐이었지만, 홍영희는 아니다.

아름다운 몸이라는 점은 같지만, 중국이 갈망하는 ‘용의 계약자’를 출산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여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와이츠 2대 계약자’ 선지혜다.

태어나자마자 용신과 계약한 혈통.

진짜 공주님이다.

그 피를 진하게 이은 홍영희도 대단한 미녀다. 인공임신이란 태생적인 결함만 없었어도 진즉 계약자가 됐을 것이다.

용이랑 계약했을지는 미지수지만.

“...우리는 가상현실에서 만났어요.”

홍영희는 사연을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는 무일 관점에서는 ‘첫 만남’부터 수상했지만, 그녀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과감하게 합리화했다.

달콤한(지루한) 일화가 쭉 이어졌다.

하지만 이 눈치 없는 여기자는 숫총각의 기분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주절주절 설명했다.

결론.

연애경험이 없는 무일이 듣기에도 홍영희의 남자친구는 멋진 녀석이었다.

잘생기고 친절하고 부지런하다.

덤으로, 가상현실게임 기준으로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는 인간 같다. 그리고 그녀는 첫 만남부터 그 힘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던 모양이고.

“홍영희 양.”

“네?”

“당신의 중국산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겠으니 슬슬 최근 관계에 대해 얘기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결혼했어요.”

후손을 가질 수 없는 가상현실의 부부관계.

그 대신!

임신 빼고는 뭐든 가능한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현실에 영향을 주진 않지만, 홍영희에게 그 중국인 남자친구는 특별했다.

몸을 준 남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속살을 보여준 남자였다.

‘그게 중요한가?’

카르 4세도 RPG 게임은 간간이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처럼 ‘장시간’ 투자하지 않으면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게임은 일절 손대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순결을 내준 것도 아닌 ‘간접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강하게 집착하는 홍영희의 사고방식은 비논리적이다.

“알콩달콩 잘 살던 어느 날, 그 남자친구가 현실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는 겁니까?”

“결혼한 사이니까요.”

가상현실은 가상현실이다.

화목한 잉꼬부부도 ‘가상현실에서의 사생활’은 불문율로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공개를 강요하면?

사랑이고 뭐고 바로 이혼이다!

비좁고 한정된 현실에서 만난 짝보다는 광대한 가상현실의 다양한 선택지에서 만난 이성(異性)이 더 마음에 드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안전하다.

아리따운 미녀를 마음껏 쳐다보고 심지어 성희롱해도 괴수가 튀어나오는 사망복선으로 직결되진 않는다.

여성들도 더 선호한다.

태어날 때부터 잘났던 아름답고 고결한 계약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질투를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가상현실의 관계는 가상현실로 끝내야 합니다.”

현실까지 끌어들이면 불행해진다.

현실의 남편, 아내, 남친, 여친이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하면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고 끝내 몸이 망가진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지하지 않는다.

몸이 망가져서 죽거나 병들어도 대처할 ‘새 생명’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수명의 한계가 흐려진 결과다.

사냥꾼이 아니면 죽을 일이 없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프리카에서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어려운 현실은 외면하고 게임으로 인생을 불태우십시오!’라고 정부에서 권장하기까지 한다.

한국은 생존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강하지만….

뭔 정책을 꺼낼 때마다 일단 야유부터 하는 ‘털 없는 원숭이’들을 침묵시키려고 가상현실게임산업을 비정상적으로 부흥시킨 와이츠.

국민을 ‘게임 바보’로 만들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했다.

그 덕분에 모든 정책이 일치단결(?)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지만,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은 머릿수 채우는 용도라고 인증한 느낌이다.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가상현실은 가상현실일 뿐이다.

교과서적인 정론으로 지적당한 홍영희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와이츠는 음모론이 떠돌지 않도록 교과서 구석에 ‘가상현실은 적당히 즐깁시다.’라고 써놓고 그 위험성도 솔직하게 밝혔다.

하지만 정책상으로는 ‘가상현실에 틀어박히십시오.’라고 해놨다.

정말, 먹고 싸며 일하는 최소한의 6시간을 제외한 하루 전반을 게임만 하면서 보내도 괜찮도록 세밀하게 짜놨다.

그만큼 죽어나는 건 사냥꾼.

노는 국민이 많아질수록 고생하는 건 ‘현실파’인 생산직종이다.

그 대신이랄까?

사냥꾼이 길거리에서 발견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얼마 줄 테니 하룻밤 어때?’라고 물으면 거의 80% 확률로 성사된다.

계약자가 아닌 여성이 할 일이 그만큼 없다는 방증이다.

현실에서 직장이 없다고 완전히 가상현실게임만 하면서 보낼 순 없다. 현실의 음식물을 ‘구매’해서 먹고 마셔야 살 수 있으니까.

게다가 게임이든 현실이든 ‘사치’를 부리려면 또 돈이 필요하다.

게임으로 돈을 벌어 생계가 유지되는 일반인은 프로게이머뿐이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돈 나올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구멍’을 활용한다.

“그런가요.”

“네! 저를 구멍 헐거운 창녀쯤으로 보셨다면 오산이에요!”

홍영희는 현실에서 ‘남편’을 직접 만나본 후에 결혼 가부(可否)를 결정할 계획이다.

그녀는 스스로 ‘리얼충’이라고 믿는다.

게임 속에서 거의 20시간씩 보내는 일반 시민들이랑 다르다. 10시간밖에 안 한다. 가끔 초과하긴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무일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창녀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이의 됨됨이부터 장래, 외모, 집안, 재산…. 시, 심지어 음경 크기까지 전부 따져볼 거란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사냥꾼의 눈은 ‘믿지 않습니다.’라고 쓰여있었다.

홍영희가 활짝 웃으며 남자친구의 장점을 주절주절 설명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무일은 안다.

이 여기자는 카르 4세가 의심을 접고 ‘진짜 사랑 같습니다.’라고 현실결혼을 인정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사랑의 노예다.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쓰였다.

그런데 인제 와서 무슨 설득이 귀에 들릴까.

‘정치 다음은 연애? 좀 봐달라고….’

올해 태양신은 숫총각에게 너무나 잔인한 일을 시킨다.

무일은 저물기 시작한 태양을 노려보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방송 여기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 탓이다.

카르 4세에게 인정받는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남자친구(남편)가 여태까지 보여준 사랑이 ‘혈통을 노린 가식(假飾)’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시작된 의문은 점점 부풀어졌고 금세 중국에서 넘어온 남자친구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워졌다.

홍영희는 기자(記者)다.

그리고 카르 4세가 진저리쳤을 정도로 집요한 여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방심했다.

모든 사건결말을 의심해보는 기자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탓에 자신은 ‘정의로운 진실’로만 뒤덮인 안전지대에 있다고 과신했다.

이것이 바로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걸까?

홍영희는 가녀린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서리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무일 씨. 남의 인생이라고 막말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진실과 거짓. 무엇을 듣고 싶습니까?”

이 여기자에게 너무나 무의미한 질문이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변했더라도 직업병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진실이요.”

“그럼 진실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거짓은 없습니다. 홍영희 양이 무슨 선택을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정부에 알리실 거란 뜻인가요?”

눈물로 화장이 엉망이 된 홍영희가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

그녀가 이 사냥꾼에게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남자친구’라고만 소개하고 이름 등을 일절 밝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과정이 어떻든 마음(가상의 몸)을 준 남편이다.

한국 정부에 발각되면 좋게 끝날 리 없다.

“이 또한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럴 일 없습니다.”

이 집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떠든 것부터가 실수다.

무일이 구차하게 나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라는 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그 중국인 남자친구가 무슨 준비를 해놨든 상관없습니다. 아기를 하루아침에 태어나게 할 수 없는 이상 발각될 겁니다.”

이 부분에서 카르 4세는 짐작 가는 계획이 있다.

서울에서 은둔생활을 해도 홍영희가 실종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헌병대가 움직일 테고 금세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서울 밖이라면?

수색대는 고사하고 첩보위성 잠깐 띄워보고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잠입한 중국인은 괴수가 시시각각 출몰하는 위험지대에서 홍영희의 출산 날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기 위한 ‘호위무사’다.

계집아이가 안 태어나면 뒷골 땅기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만약 50% 확률로 당첨되면 그 즉시 본국에 연락해서 다시 한 번 은밀히 개선장군처럼 귀국하면 된다.

덤으로 ‘용의 계약자 제조공장’인 홍영희도 데려가고.

좋다. 인정한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발각됐다고 할까.

카르 4세가 사는 이 임대주택은 겉보기랑 달리 프라이버시라는 게 없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아는 윤소영 탓에 누가 집주인인지 불분명해졌고, 선지혜가 설치해둔 감시카메라는 아무리 치워도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가르쳐줄 순 없다.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처음부터 망명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말은?

죽음.

카르 4세는 진한 [예감]을 받았다.

“발각되면 어떻게 되죠? 낙태? 극형?”

“...너무 앞서가지 마십시오, 홍영희 양. 지금이 고리타분한 21세기도 아니고, 애를 낳아야만 사랑이 완성되는 건 아닙니다.”

“그, 그건 그렇네요.”

내심을 들킨 게 부끄러웠던지 얼굴을 사르르 붉히는 홍영희였다.

조금은 진정된 것 같은 여기자를 안도의 눈으로 바라본 무일은 주차장에 막 들어선 낯선 차량을 힐끔 보며 말했다.

“진정한 사랑인지 확인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요?”

“데이트는 대낮에만 하십시오.”

< [9장-4] 정치의 이름으로 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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