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3] 정치의 이름으로 널…. >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예쁜 눈썹을 찡그린 묘령의 여인이 한국어를 구사해줬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야!
무일은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에 감사했다.
말투가 여성스럽지 못하고 딱딱했지만, 그건 이 여인의 기분이 안 좋은 탓이 아니라 언어에 ‘존칭’ 개념이 없는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어색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 여자는 게임이랑 담쌓고 사나 보네.’
가상현실게임 좀 했다면 유키 짱처럼 한국어가 능수능란했을 것이다.
용신 와이츠가 떠나면서 여기저기 휘둘리며 휘청거리고 있지만, 전자게임사업은 대한민국이 여전히 부동의 1위니까 말이다.
고대부터 그랬다. 이유는 무일도 모른다.
세계는 물리적인 교류가 차단되면서 전자통신과 전자오락의 중요도와 선호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당연히 그 수단 중 하나인 가상현실게임도.
『가상현실을 여행하고 싶으면 한국어를 배워라.』
이런 격언이 있을 정도다.
카르 4세는 뭐….
굳이 온라인 RPG 게임을 안 해도 인생 자체가 RPG 서바이벌인 사냥꾼에게, 가상현실게임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요소투성이의 애들 장난이다.
하지만 계약자는 아니다.
수호자의 감시를 벗어나 ‘평범한 여자’로 돌아갈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피부미용, 몸매관리 등의 이유로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한정됐지만, 그래도 수많은 계약자가 가상현실게임을 즐긴다.
즉, 한국어를 못하는 계약자는 세계에 거의 없다.
(...시간대를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만?)
언어가 통한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무일은 지적했다.
요염한 쇄골(鎖骨) 아래로 욕조에 잠겨있는 전라(全裸) 일부를 보고 파악한 나이는 20대 중후반. 하지만 계약자의 발육속도는 반칙이 많으므로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상당한 거물(巨物)일 것 같은데?’
사회적인 지위가 말이다!
가슴도 그 지위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지만.
프로사냥꾼이 무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영상통화인 덕분이다. 코앞에서 벌어진 현실이었다면 먼 산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소.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말이오.)
(목욕 후에 다시 통화해도 됩니다.)
(정말 괜찮소!)
이목구비는 곱고 단아했으며 물에 젖은 머릿결은 요염했다. 하지만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가 그 모든 장점을 상쇄하고 있었다.
이게 소문으로만 접했던 중국의 여걸(女傑)?
조금은 감탄했다.
바짝 힘이 들어간 어깨에서 ‘남자에게 알몸 좀 보여줬다고 허둥댈 순 없어요!’라고 무리하는 자존심이 느껴진다.
한국의 계약자였으면 벌써 비명을 지르고 수호자가 출동했을 텐데.
그 점만은 정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고 싶다.
무일은 입술을 뗐다.
(용건이 뭡니까?)
자기소개도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쪽도 이걸 원하겠지.
중국은 일본처럼 MID 해킹시스템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키 짱이라면 휴대전화의 보안을 뚫고 간단히 하고 싶은 말을 전했겠지만, 중국은 이처럼 번거로운 장비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기술력에서 밀린다.
이 회선도 10분 이내로 막히지 않을까?
담당 부서의 직원이 잠들었거나 딴짓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용신 와이츠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써보지도 못하고 통신이 차단됐을 것이다.
이 여인도 알몸을 자랑하고 싶어서 보여주는 게 아니다.
옷을 걸칠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자존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지만.’
옆에서 힐끔힐끔 구경하는 홍영희가 더 부끄러워하고 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멋진 몸매!
비상시에는 직접전투도 가능한 실용적인 건강미가 돋보인다.
(좋소. 본론만 말하겠소. 본국은 마녀의 잔인한 보복조치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오. 그래서 호위무사로 카르 4세를 고용하고 싶소.)
(주소를 잘못 찾았습니다. 여긴 한국입니다.)
(그래서 하는 의뢰요.)
카르 4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중국의 요원이 서울에 잠입해있는 모양이다.
빠르게 [예측]했다.
‘박선영의 시선을 본토로 돌리는 무리수까지 두며 잠입시킨 중국인. 계약자? 사냥꾼? 아니. 그렇다면 호위가 필요 없다. 비전투원을 보낸 목적은? 용의 계약자!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납치는 불가능. 그렇다면? 아아, 그런 꼼수가 있군.’
순식간에 결론에 도달했다.
힌트는 ‘친구의 친구’에 있었다.
(거절합니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소?)
(끝까지 들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애국심 때문이오?)
많은 사람이 카르 4세를 ‘애국자’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다. 그는 딱히 인종이나 국적을 차별하지 않는다.
인류의 편.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무일이 한국에 머물며 한국인의 사고로 움직이는 건 어디까지나 이 나라가 눈 뜨고 외면해도 괜찮을 정도로 잘 굴러가지 않은 탓이다.
고개를 돌리지 못할 만큼 엉망진창이다.
13살에 버린 가족처럼 ‘애증’에 가깝다.
그리고 과분한 사랑에 보답해줄 수 없는 여자가 사는 땅이기도 하다.
(아닙니다.)
(그럼 왜…?)
(홍영희 양의 남자친구나 지킬 정도로 카르 4세는 한가하지 않습니다. 목숨도 아깝고요. 용의 계약자를 한국에서 낳고 데려가는 것까지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문제에 저를 끼워 넣진 마십시오.)
(퐁당!)
아미파 여인의 손에서 미끄러진 통신장비가 욕조에 빠졌다.
다행히 방수인지 통화가 끊기진 않았지만, 가슴보다 부끄러운 부위가 적나라하게 화면에 드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 떠는 여자는 없었다.
그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무일 씨! 어, 어떻게 그걸 알았죠?!”
“감입니다.”
“말도 안 돼! 무슨 마법을 부린 건가요?”
미지의 공포에 질린 홍영희는 뒷걸음치다가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호위임무란 것만 듣고 거기까지 추론했다고?
과정이 지나치게 생략됐다.
우연히 찍어서 맞춘 것일 수도 있지만, 조금도 우연 같지 않았다. 이 ‘어려 보이는 사냥꾼’의 확신에 찬 말투와 단호한 거절이 그 증거.
망설임이 없다.
‘괴수처럼….’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 없는 괴수처럼.
홍영희는 어렴풋이 이해됐다.
신성한 대법원에서 얼토당토않은 문제로 미녀들이 핏대 세우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녀들은 흔한 남자가 아닌 이런 남자에게 몸과 마음이 끌린 것이다.
계약자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그래서 ‘평범한 남자’에게는 애욕(愛慾)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카르 4세는 어떤가?
『수호자처럼 친숙하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괴수의 날개를 평범한 남자가 벨 수 있을까?
그 속도에 휩쓸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감이라는 한마디로 합리화해버린 능력도 비정상적이다.
사냥꾼이 사용하는 [예감]과 [예측]이 뭔지는 서울방송 기자로 활동하는 홍영희도 익히 잘 안다.
소형 괴수의 [예지]를 모방한 MID 기술.
하지만 여기에도 ‘정도(程度)’라는 게 있다.
‘카르 4세는 규격 밖이야! 괴물!’
규격 밖? 괴물?
살아남기 위해 늘 고민하고 발버둥 치는 프로사냥꾼이 이 여기자의 생각을 읽었다면 도리어 화냈을 것이다.
이건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다.
특별한 혈통도 아닌데 육체적 결함까지 달고 있는 카르 4세는 [반격] 하나로 오늘날까지 버텨왔다.
[예감]과 [예지]는 필수불가결.
물론, 대부분 사냥꾼이 무일과 비슷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예감]과 [예측]은 사냥꾼에게 빼놓을 수 없는 기본기니까.
하지만 카르 4세는 다른 모든 기술을 포기하고 익혔다.
이건 그 결실.
신기(神技)에 가까운 달인이 됐다.
사냥꾼이 아닌 홍영희는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땀내 나는 사나이들의 ‘사냥꾼 세계’에서는 그리 신기한 마법이 아니다.
카르 4세 정도의 프로사냥꾼이 흔하진 않아도 없진 않다.
주목받지 못할 뿐.
날고 기어봐야 5종 수호자보다 약한 탓이다.
(실례했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추태를 보였소.)
남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자세를 추하다고 하는 건 실례다.
손의 탓으로 돌리는 여인의 추정 나이를 18살 밑까지 쭉 떨어트렸다.
속도위반을 당연하게 저지른 가슴 크기에 속고 말았지만, 아직 사춘기도 끝나지 않은 ‘미숙한 소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걸 알아냈는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할 얘기는 끝난 것 같습니다만?)
(카르 4세의 내공 깊이를 과소평가했소.)
다시 말하지만, 괴수를 팡팡 무찌르는 ‘편리한 내공’은 실존하지 않는다.
무림인들이 [예측]과 [예감]을 제멋대로 달리 부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24세기 내공’이라고 칭할 만한 능력이지만, 그런 ‘잔재주’쯤은 간단히 쳐부술 수 있는 계약자가 말하니 뭔가 묘했다.
(계획을 부정하지 않는군요.)
(한국의 초고수로 불리는 자의 내공 수위를 파악했다는 걸로 만족하오. 카르 1세가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소.)
(흠.)
(그리고 외부에 알릴 것 같지도 않고 말이오. 내 말이 틀렸소?)
그 확인질문을 받는 순간,
카르 4세는 [예감]했고 확신했다.
이 여자는 괴수와 계약한 미녀인 동시에, 괴수를 죽이는 사냥꾼이라고.
‘위험한 짓을….’
그러다 비명횡사하면 수호자가 미쳐 날뛸 것이다.
계약자가 위험에 노출되도록 수호자가 허락하지 않겠지만, 기술만 익히는 거라면 어떻게든 가능하다.
그 증거로, 프로사냥꾼의 생각을 [예측]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재능이다.
노력과 경험의 산물?
그건 절대로 아니다. 계약자란 한계와 어린 나이가 걸렸다. 그래도 재능만으로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미모와 능력.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란 쉬운 게 아닌 탓이다. 까딱 잘못하면 둘 다 놓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패의 대가는,
목숨이다.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존경을 담아 물었다.
이 여자는 기억하고 경계할 가치가 차고 넘친다.
무림인 아가씨가 ‘그 말을 기다렸어!’라고 외치듯 좋아서 씰룩이는 입술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시링 팽. 포르 13세라고 불러주십시오.)
한국의 대표미녀로 ‘최연소 7종 계약자 윤소영’이 있는 것처럼 중국도 무력시위 차원에서 공개한 최상위 계약자가 있다.
그 대부분이 중국의 본부와 정부 소속이지만, 국가에서 아무리 용써도 감출 수 없는 ‘무소속 계약자’가 둘 있으니,
『아미파 주지, 미호 첸』
『북해빙궁 궁주, 아이밍 리』
여기서 테러리스트 두목인 ‘아이밍 리’를 논외로 치면, 문외(門外) 활동을 거의 안 하는 ‘미호 첸’만 남는다.
아미파 주지승이라서?
아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최고령 계약자’로도 유명하지만, 중국의 국력 30%를 차지하는 8종 계약자로 더욱 명성이 자자하다.
아무튼,
중국인이 아닌 무일이 기억하는 ‘중국인 계약자’는 이 정도. 본부인사까지 포함하면 좀 더 되지만 무림인 중에는 이 둘뿐이다.
시링 팽?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카르 4세는 사냥꾼답게 그녀의 본명보다 별호에 주목했다.
『포르 13세』
세상에서 두 번째로 날카로운 검, ‘스콜레옹 포르소’의 소유자임을 뜻한다.
보통은 ‘3세’까지만 쳐준다.
하지만 카르세리안 레이소, 타이타니 로니오 같은 유명한 MID 무기에 한에서 ‘6세’까지 인정해준다.
그게 관례.
그 밑은 너무 자주 갱신돼서 의미가 없다.
기껏 거금 들여 MID 무기를 장만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속상해할 필요 없다. 죽지 않고 3년만 열심히 활동하면 누구나 붙는 게 ‘순위’고 명성이니까.
예외가 있다면?
이 여인처럼 그냥 유명하면 된다.
그러니 ‘포르 13세’라고 스스로 소개했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수고하세요.)
(웨이! 기다리시오! 할 말이 그뿐이오? 정녕 나를 모르오?)
(모릅니다.)
외국인 남정네에게 무방비하게 알몸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보다 ‘나는 너 모르는데?’가 그녀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던 걸까?
눈을 휘둥그레 뜬 ‘시링 팽’은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떻게 나를 모를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은데 속사포로 한국어를 구사할 능력이 안 됐던 탓이다.
그래도 한국어를 못하는 건 아니다.
눈썹을 찡그리며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데,
띡!
마침내 통신이 끊겼다.
연결되고 끊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3분.
대한민국의 허술한 안보대책과 경계망은 볼트윙 사건을 계기로 바짝 조여졌는데 그 약발이 여전히 유효한 모양이다.
화장실 다녀온 공무원이 오차범위 내에서 드디어 할 일을 했다.
그나저나….
‘어느 나라에나 착각하는 공주님이 꼭 있군.’
미녀가 어떤 괴수와 계약했느냐에 따라 국운(國運)이 결정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안다고 자부하면 곤란하다.
그 결과.
계약자는 고립된 고정관념에 빠져 ‘세상 모든 시민이 나를 꺼린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만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대단한 착각이다.
인간은 공동체생활을 하지만 담장과 벽까지 허물고 사는 건 아니다.
그래서 참견하길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홍영희 양.”
“네….”
“제 입장도 입장인지라 응원할 순 없지만, 비밀은 지켜드리겠습니다.”
시링 팽의 예상대로 무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그녀는 ‘하수’다.
그래서 겉핥기식으로 [예감]했다.
카르 4세가 비밀을 지키는 ‘이유’를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프로사냥꾼은 ‘연하 숫총각’의 사생활에 관심이 아주 많은 ‘연상 숫처녀’가 벌써 도청 중이란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비밀이고 뭐고 이미 탄로 난 계획이다.
선지혜가 어떤 식으로든 조치할 것이다.
아미파의 ‘계약자 시링 팽’이라면 몰라도 ‘사냥꾼 시링 팽’은 카르 4세의 상대가 못 된다.
노력, 역량, 경험, 재능….
그 무엇이든 말이다.
칼이 더 좋다고 실력마저 앞서는 건 아니다.
부럽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 [9장-3] 정치의 이름으로 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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