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4] 공주님? 꿈 깨세요. >
성장이 완전히 멈추긴 했지만,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남자로서 제구실할 수 있는 시기를 넘긴 후에 멈췄다.
아니었으면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했을 것이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꿈도 희망도 없이 평생 홀몸으로 자고 일어나며 살다가 죽고 싶을 리 없잖은가.
침대 위의 격렬한 행위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후손을 남기고 싶어서도 아니다.
남자에게 ‘2차 성장’이란 전투적인 측면에서도 ‘남자답게’ 변화시켜주는 중요한 시기다.
초등학교 때까지 여자애들에게 밀려 빌빌거리던 웬만한 남자애들도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역전한다.
『테스토스테론』
아침마다 불끈 솟는 아랫도리는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정상적으로 분비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 호르몬이 아니었다면 카르 4세가 매일 열심히 단련해도 근육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십중팔구 여자처럼 매끈한 몸매가 됐다.
매끈한 몸매?
뭐, 좋다. 외모가 인생 전부는 아니니까.
하지만 현재보다 더 ‘약골’이 된다면 [예감]과 [예측]으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괴수는 고사하고 야생동물도 위협적으로 다가올 게 뻔하다.
(소문? 금시초문인걸.)
(아, 그래. 잘 알겠으니 지금부터는 듣기만 해. 진짜 싸움이니까.)
(응. 그럴게. 건투를 빌어.)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내용 자체는 진지하게 대답하는 신지혜였다.
위험성은 괴수랑 맞붙을 때보다 덜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다. 단순히 죽이는 거라면 정말 간단하다.
하지만 살리려면?
명부(冥府)에 사는 염라대왕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다.
카르 4세는 무너진 천장 잔해를 두부처럼 베어 막힌 통로를 뚫었다.
‘...내부 상황이 딱히 좋진 않은 것 같군.’
벙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예감]이 안 가는 게 좋다고 경고한 것이다.
패배자들이 보여주는 추태.
그건 패전의 원인을 동료에게 떠미는 것이다.
하물며 저 안쪽의 주모자들은 ‘정신력을 키운 군인’도 아닌 민간인. 그것도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길 밥 먹듯 하는 현직 정치인이 과반수 이상이다.
쿵!
두꺼운 강철 문이 약간의 저항감만 주며 뒤로 넘어갔다.
그 묵직한 소리에 벙커 내부가 조용해졌다.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 없는 미녀들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그렇게 만든 ‘가족’이란 족속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봤다.
은색의 소년.
머리부터 발끝까지 괴수의 피로 뒤집어쓴 침입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른손에 ‘유명한 검’을 사선으로 늘어트린 채 걷는다.
“카, 카르 4세….”
삼류 악당처럼 ‘누구냐!’ 같은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저 소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예전부터 ‘카르 4세’를 쭉 관찰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계약자도 아닌 사냥꾼은 정치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사는 상원의원을 ‘간접적으로 살해한 남자’의 이름은 한동안 화제가 됐었다.
그렇다. 간접살해.
대한민국의 웬만한 수호자보다도 많은 괴수를 살해한 ‘저주받은 검’에 욕심냈던 임철중 의원을 죽인 ‘검의 주인’이다.
검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고 헛소문이나 미신도 아니었다.
저 프로사냥꾼에게만 빗겨갈 뿐이다.
“지식인답지 않은 작태로군.”
그 소년이 좌우를 쓱 훑어보며 말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야만적인 침략군에게 유린당한 공주님’들도 여기 계약자들보다는 대우가 좋을 것 같다.
레드군의 브레스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앞으로 영영 계약할 수 없게 된 미녀’가 다수 발생했다.
수호자가 없는 계약자란 이렇게나 무력하다.
“여긴 사냥꾼 나부랭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물러나라! 카르 4세!”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다가오면 발포하겠다! 이건 국민의 자위권을 행사하는 정당방위다!”
프로사냥꾼을 향해 총구를 가리키는 반란군들.
이미 쏴봤다는 걸 증명하듯 비좁은 벙커 구석에는 적지 않은 ‘동료였던 자’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도 계약자의 몸을 더럽히려는 작자도 있었다.
반항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후려치고 우아한 다리를 좌우로 벌린다. 이미 옷이 찢기고 없는 그녀의 눈빛은 공허하고 체념이 빛이 역력했다.
꼭 남자들만 나쁜 건 아니었다.
그 뒤에서 재미난 구경거리 보듯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여자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실패자였던 그녀들의 질투는 남성의 성욕을 뛰어넘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구제불능이군.’
완전히 허수아비 취급당한 카르 4세는 기가 막혔다.
이 와중에도 저럴 수 있다니?
인간적으로 대화할 생각이었으나 그 계획을 빠르게 접었다.
그리고,
“탕!”
기습적으로 외쳤다.
그걸 총성으로 착각한 정치인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군중심리라는 것이다.
너도 쏘니 나도….
저들이 카르 4세를 ‘사냥꾼 나부랭이’로 안다면 그는 정치인들을 ‘송사리1’보다도 못한 잔챙이로 보고 있다.
깜짝 놀라서 발포?
총기 다루는 사람으로서 실격이다.
‘이런 비좁은 공간에서 총이라….’
지친 프로사냥꾼의 몸은 눈으로 못 쫓을 만큼 빠르진 않았지만, 총알이 그의 몸을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기둥 하나 없는 벙커 내부.
하지만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의 방패막이가 됐다.
“꺄아아!”
“쏘지 마! 쏘지 말라고!”
“이 병신들이?!”
“크악!”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경각심에 사로잡힌 자들이 카르 4세가 있는 방향으로 무작정 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총에 맞는 사람은 동료라고 불렸던 고깃덩어리뿐이었다.
그렇다고 멈추는 자는 없었다. 패배한 시점부터 그들 사이에 ‘동료’라는 개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기를 몰래 소지하고 있었다.
다만, 양패구상을 피하고자 적대하지 않았을 뿐이다.
주검이 된 정치인들.
유린당한 계약자들.
그들이야말로 동료를 신뢰했다가 당한 피해자였다. 물론, 국가반역자인 그들에게 피해자란 호칭은 과분하지만.
“내가…. 그동안 우리나라를 과대평가했던 모양이군.”
괴수대응본부에도 ‘나만 아니면 돼!’라는 명언이 떠돌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아군의 희생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정신머리를 달고 있는 자들은 정말 극소수다. 그리고 그 극소수는 발각 즉시 본부에서 솎아낸다.
총알도 무한하지 않았다.
카르 4세는 빈 탄창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공허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자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곧 총을 버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 탓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본인들이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그 많은 총탄을 유유히 피하며 오롯하게 서 있는 ‘은색 소년’이 더는 자신들이랑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괴물?
아니다. 그랬다면 좀 더 현실감 있었으리라.
『마법사』
모든 총탄이 소년을 피해 가는 것 같았다.
그건 그야말로 마법!
고전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기적’이랑 다를 게 없었다.
비전투원에 가까운 그들이 총구를 정조준해서 쐈다고 말하긴 민망하지만, 그래도 몇 걸음이면 도달할 근거리에서 탄창이 빌 때까지 쏘고 또 쐈다.
한둘이 찔끔찔끔 쏜 것도 아니고 십수 명이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그 전원이 ‘우연히’ 못 맞췄다고 할 순 없었다.
“흠…. 계약자 중에는 사망자가 안 나온 건가?”
무일이 움직이기 전부터 이미 ‘강압적으로’ 엎드려 있던 그녀들은 높은 확률로 총탄을 피할 수 있었다.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의로 실패자가 된 그녀들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국가반역자에다가 ‘재활용’도 불가능한 탓이다.
옷이 벗겨지지 않고 여전히 방탄코트를 걸치고 있는 계약자들은 그나마 낫다.
정신머리가 붙어있는 일가족의 호위로 유린당하지 않은 그녀들은 여전히 ‘쓸모 있는 계약자’로서 정부와 협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그걸 노린 거겠지.
하지만 그 가족 대부분이 죽고 생존자는 정말 극소수만 남았다.
‘괴수가 난입한 거랑 별다를 게 없는 결과로군.’
카르 4세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재판장에 세우고 싶었던 자들은 죽고 이용당한 계약자들만 살아남은 형국. 수호자의 보살핌 속에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그녀들이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까.
사람을 ‘증오’하는 미녀들이?
프로사냥꾼은 울음 섞인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전부,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 때문이야! 한무일!”
심하게 반항한 흔적이 알몸 여기저기 남은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계약자다.
하지만 목소리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임보연 양입니까?”
“가식은 집어치워! 너도 즐거워하라고! 기뻐하라고! 바지 내리고 죽은 저 개자식들처럼! 고고한 척하던 계약자의 망가진 모습을 마음껏 비웃으라고!”
거의 홀몸으로 이 반란군 무리에 합류한 임보연.
그녀는 패배가 확정되자마자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지목된 계약자였다.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저주로 부친 임철중을 잃고 수호자 로니콘마저 그 ‘저주받은 검의 주인’에게 살해된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비웃으라고?
반대로 가여웠다.
이런 무리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그녀의 순진함이 안타깝고, 그들에게마저 버림받은 그녀의 인생이 또 불쌍했다.
“원망할 힘이 아직 남아있다면 해보십시오.”
“뭐?”
“당신에게 저는 원수 아닙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수호자도 죽인 원수. 듣자하니 이 반란군 무리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도 저 때문인 것 같군요. 아닙니까?”
“그, 그건….”
임보연은 ‘겉보기에만 소년’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점에서는 주위에 죽어 나자빠진 ‘악마 같은 작자’들이랑 똑같았지만, 그 시선에 내포된 감정과 내용은 한없이 진지했다.
원수?
혼란스럽다.
이전의 임보연이었다면 ‘당연히 원수다!’라고 확언할 수 있었을 테지만, 모든 걸 잃고 ‘평범한 여자’가 된 지금은 아니었다.
‘죽고 싶어.’
더럽혀진 몸과 마음 때문만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수호자를 잃은 공주님에게 ‘하고 싶었던 조언’을 마음껏 방출한 자들의 방식은 크게 잘못됐지만, 그 내용마저 틀린 건 아니었다.
부끄럽다.
철없이 행동해온 자신이 혐오스럽다.
사람들이 그녀를 ‘괴물’ 보듯 하던 껄끄러운 시선은 계약자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든 건 인과응보(因果應報).
평범한 사람을 벌레처럼 깔보며 살아온 임보연이 자초한 일이었다.
“저를 도발해도 죽여주진 않습니다. 로니콘은 죽기 전에 제가 아닌 임보연 양을 보고 있었습니다. 혼자 남게 될 계약자를 걱정한 거지요.”
미안하게도 거짓말이다.
로니콘이란 괴수는 그 정도로 감성적이지 않다. 미소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진 않는다.
하지만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강하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아….”
“그러니 눈앞에 원수가 무릎 꿇고 빌 때까지 힘껏 살아보십시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독기가 빠진 여인의 평범한 음성.
여기저기 멍들고 흉터가 생겼어도 예쁜 얼굴이, 이 끔찍한 지하벙커 내에서 홀로 오롯이 존재감을 뽐내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촉구했다.
하지만 답해주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이 반란의 주동자를 상대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김민지 양입니까?”
“그렇게 묻는 당신은 정말로 카르 4세라는 사냥꾼이 맞나요? 아니, 인간이 맞긴 하나요? 뱀페스트 혹은 데빙걸 아닌가요?”
“흡혈귀도 아니고 좀비도 아닙니다.”
카르 4세는 쓰게 웃었다.
민간인 눈에는 프로사냥꾼이 그렇게 보일 것이다.
물론, 계약자를 민간인 범주에 놓는 건 무리지만, 수호자보다 약한 사냥꾼의 실력에 관심 두는 계약자는 거의 없다.
이 미녀를 김민지라고 확신한 이유는 별거 아니다.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만은 절대로 쏘지 않았던 탓이다.
그녀는 자신들이 회생할 가능성을 품은 마지막 ‘구명줄’이었으니까.
6종 계약자.
윤소영과 선지혜, 박선영처럼 그 우월한 미모만큼이나 희귀한 인재.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불리는 여인이다.
모든 나라의 실질적인 국력(國力)을 좌지우지하는 절세미녀! 그 의미는 고사성어랑 미묘하게 다르지만 말이다.
“믿기지 않는군요.”
“김민지 양. 그 믿음이 부족한 이유를 가르쳐 드릴까요?”
“네? 네에….”
생소했다.
계약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겠다는 남자는.
김민지는 은근히 기대하며 경청했다.
“꿈 깨십시오, 공주마마.”
“......예?”
“믿음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 찾는 법입니다.”
< [8장-4] 공주님? 꿈 깨세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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