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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34화 (34/287)

< [8장-3] 공주님? 꿈 깨세요. >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로니콘을 향해 도약할 수 없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모순.

이길 수 없는 괴수에게 덤벼드는 인간의 모습은 어리석음을 넘어 숭고하기까지 했다.

“히이이잉!!”

힘차게 울부짖은 백마가 앞발을 치켜든다.

똑똑하군.

이마에 송곳처럼 돋아난 뿔을 믿고 머리를 들이밀었으면 가볍게 멱을 따줄 예정이었던 카르 4세는 혀를 차며 [반격]하길 포기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완전한 회피’ 동작.

부딪혀보진 않았지만, 로니콘의 ‘사람 머리통만 한 말굽’이 카르세리안 레이소 못지않게 단단하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일은 땅을 구르거나 하진 않았다.

회피라고?

가당치 않은 생각이다. 인간보다 빠른 괴수를 상대로 날렵한 회피 동작이란 게 통할 리 없는 탓이다.

있다면 후퇴(後退) 혹은 우회(迂廻).

거대한 백마의 신체 구조상 드러나는 허점인 옆구리로 몸을 틀며 순백의 깃털로 뒤덮인 날개를 노렸다.

“하앗!”

최대한 절제해오던 기합성마저 넣은 혼신의 일격.

카르 4세로서 드물게 [반격]이 아닌 [공습]이란 상급기술을 사용했다. 익숙지 않은 만큼 무리수가 따랐지만, 그 시도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럴 줄 알았지!’

이 야색마의 머릿속은 ‘순결한 미소녀’로만 가득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그렇기에 ‘털 없는 원숭이 수컷’도 무척이나 경계한다.

놈은 멀리서 카르 4세의 전투방식을 쭉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나서진 않았다.

동료들의 수호자가 하나둘 살해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계약자의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멋지게 ‘짜잔!’하고 등장해서 처리하고 싶은 ‘신사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런 괴수가 로니콘.

괜히 야색마(野色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히이이이잉?!”

미래를 읽는 [예지] 능력도 없으면서 ‘승리’를 과신했던 초대형 백마는 한쪽 날개와 균형을 잃자마자 대지를 굴렀다.

튼튼한 아스팔트 도로가 부서지고 그 위에 은색 피가 길게 흩뿌려졌다.

경마장에서 흔히 있는 사건.

뛰다가 자빠진 경주마의 다리가 완전히 못 쓰게 망가지는 상황을 그대로 연출했다. 뼈가 탈골되고 근육이 파열되는 것이다.

하지만 로니콘은 4종 괴수.

이 정도 부상쯤은 금방 수복한다.

하지만,

푹!

다리가 부러져서 움직임이 제한된 거대한 백마의 정수리에 낙뢰처럼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떨어졌다.

그야말로 [예측]과 [반격]의 정수.

로니콘이 쓰러진 위치를 확인한 후에 던졌다면 한 박자 늦었을 것이다.

즉, 보지도 않고 무모하게 던져서 정확하게 맞췄다는 뜻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네.”

“푸르르릉….”

짙은 콧숨을 내쉬며 눈을 크게 뜬 로니콘은 써보지도 못한 이마의 뿔 옆에 박힌 날카로운 송곳니를 저주하듯 노려보다가 끝내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뇌가 파열되며 일시적으로 몸의 활동이 멈춘 것뿐이다.

철두철미한 프로사냥꾼은 여자친구를 위로 뽑지 않고 좌우로 흔들며 로니콘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냈다.

『주인님! 저를 너무 험하게 다루는 것 아닌가요? 던진다든가!』

그렇게 항의하는 환청이 들린 것 같은 카르세리안 레이소.

하지만 ‘저주받은 검’이 주인보다 먼저 부러질 가능성을 ‘매우 낮게, 극도로 낮게!’ 전망하고 있는 카르 4세는 망설이지 않고 계속 휘둘렀다.

로니콘의 상체와 하체에 하나씩 뛰고 있는 심장을 베어내고 끝으로 새로운 적의 방패막이로 시체를 활용했다.

콰직!

굳이 카르 4세가 마무리 짓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위력으로 로니콘이 뭉개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드러난 빈틈.

어떤 괴수인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반격]했다.

동급의 로니콘을 쓰러트린 ‘털 없는 원숭이’를 경계하며 계속 선공(先攻)을 택한 괴수는 팔과 허리 절반을 베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원숭이가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 뒤편에 도사린 ‘공포’라는 단어를 부정하며 포효했다.

“어흐으응!!”

“큭!”

쫙 벌어진 주둥이에서 토해진 ‘괴수의 분노’가 작은 사냥꾼의 고막을 뚫고 달팽이관을 뒤흔들며 균형을 빼앗아갔다.

겁에 질린 개는 더욱 크게 짖는 법.

그 속담은 괴수에게도 어느 정도 통용됐다.

자신의 상식을 무너트린 ‘미지의 원숭이’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이 노련한 사냥꾼의 노림수라는 것도 모른 채,

균형을 잃더라도 [예감]만으로 휘두른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정확했다.

프로사냥꾼에게 눈과 귀는 반쯤 장식품.

모든 괴수 사냥은 ‘감’으로 시작돼서 ‘감’으로 끝난다.

정상적인 방법과 수단으로는 인간이 괴수를 쓰러트릴 수 있겠는가.

재빠른 괴수를 따라잡으려면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고, 강력한 괴수를 상대하려면 미리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서걱!

옅게 베였던 허리가 이번에야말로 양분됐다.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상당히 번거로웠을 텐데 괴수의 성급한 판단이 그의 체력 부담을 덜어줬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다.

슬슬 몸은 한계점에 도달했는데 솔라충은커녕 그 아래 5종 수호자조차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크아아앙!”

몰골이 송연해지는 ‘용왕의 포효’가 서울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인간보다는 크지만, 괴수치고 작은 저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웅장하고 압도적이었다.

무일이 힘겹게 다다른 아지트 앞까지 순식간에 날아온 레드군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날갯짓 한 번이다. 카르 4세.』

그렇게 비웃는 것 같은 위용을 과시했다.

강남구 하늘을 느릿느릿 선회하며 옅은 불길을 입으로 뿜어내는 용왕의 행동은, 어디부터 바싹 태워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광경을 올려다보는 프로사냥꾼의 표정은 묘했다.

[예감]이 ‘죽음’을 경고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탓이다.

‘이런 무방비상태인데도 안 죽는다고?’

지금쯤 안전한 지하벙커나 지하대피소로 허겁지겁 이동 중이어야 맞다.

하지만 [예감]은 침묵.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라고 보채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레드군이 ‘강남구를 태우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무일이 노릇노릇 익지 않도록 피해서 강남구만 불태울 거라는 가정은 당연히 없었다.

괴수에게 ‘적당히’란 없기 때문이다.

쓸어버릴 거면 전부! 아니면 시작조차 안 하던가!

팡야!

파공성이 터지며 레드군의 옆으로 막대한 빛의 줄기가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2차, 3차로 똑같은 공격이 연쇄적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붉은 용왕님은 유유히 회피하며 순식간에 공격자와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화르르륵!

작은 주둥이에서 뿜어져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화염을 토해냈다.

하지만 피해규모는 그 위력을 고려하면 매우 협소했다.

이건 무슨 의도일까?

레드군이 높은 상공에서 방사형인 브레스를 썼다면 강남구 전체가 숯덩이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란군 아지트 옥상이랑 맞닿는 근거리에서 내뿜었다.

위력은 ‘적당히’가 아니었다.

무너지기도 전에 용암처럼 녹아내린 철골콘크리트 건물이 그 증거.

저럴 거면 처음부터 탄도미사일로 끝낼 것이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솔라충이 버티고 있는 이상 어림도 없다. 붉은 용왕님도 그 때문에 여러 번 회피하며 접근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미사일이 ‘하나’도 없다.

발사 기지를 세울 땅도, 유지보수 할 돈도 없는 탓이다.

(오빠!)

(윤소영 양?)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 꺄앗?! 언니!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욧?! 요 엉큼한 여중생이 어디서 점수를 따려고. 저, 점수라니요?! 이건 그냥 오빠를 돕는, 앗! 돌려주세요! 싫은걸~☆ 요건 압수, 꺅?! 간질이는 건 반칙이잖아!)

(......)

무전기로 깜찍한 비명이 쉴새 없이 들려왔다.

소녀(少女)와 숙녀(淑女)의 쟁탈전으로 첨단기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곧 잠잠해졌다.

승자는 역시나 어른스럽지 못한 철부지 후배 선지혜였다.

(선배. 솔라충을 포함한 모든 수호자는 박멸된 상태야.)

(네 공로처럼 말하지 마!)

(하지만 소영이는 내가 정말 아끼는 동생인걸. 그러니까, 동생의 노고는 언니의 공로. 그런 셈이야.)

(도대체 뭐냐. 그 친자매보다도 착취하는 구조는….)

따지길 포기한 무일은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어디 권력자들이 윤소영을 둘러싸고 한 ‘부탁’을 멀리서 들은 레드군은 계약자의 거부 의사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네.’라는 식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언제’ 태울지는 아무도 몰랐다.

계약자를 통해 ‘이러쿵저러쿵 해주세요!’라고, 레드군에게 간접 명령한 것만으로도 목숨 건 일(총대 멘 사람들은 승진했다.)이었던 탓이다.

즉,

강남구 소거 시각은 레드군 마음이다.

바로 이것이,

선지혜가 까먹고 한무일에게 전하지 않은 내용(진짜 중요하잖아!)이었다.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을 뻔했다고?

그 사실을 깨달은 카르 4세는 주변에 열기가 한가득함에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선배가 선배의 목숨을 살린 거야.)

(무슨 뜻이지?)

(레드군이 카르 4세의 분투를 보고 생각을 바꿨어, 라고 말하면 이해하려나? 용처럼 이성적인 사고에 두뇌를 할애하는 괴수에게만 있는 경쟁심리야.)

(...질투?)

(요약하자면 그렇지.)

그래서, 내가 도착하자마자 최대의 난적과 목적지를 통째로 녹여버리셨군.

제대로 물 먹은 셈이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던가 그렇지는 않았다.

7종 수호자 레드군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27세 동정남 사냥꾼 한무일’은 ‘16살 꽃다운 나이의 이팔청춘 미소녀’를 어떻게 해볼 생각이 티끌(이보다는 많다.)만큼도 없다.

물론 본심은….

블랙박스에 고이 넣어두자.

결론만 말하자면, 무일은 용왕의 경쟁자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생명연장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빠져도 되나?)

(첩보위성이 생체반응을 포착했어. 맞아. 선배의 생각대로야. 저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 건물 아래에 계약자와 일가족들이 살아있어.)

(나보고 끄집어내라는 거군.)

(아니면 이번 반란은 민간인 피해로 마무리될걸.)

(그건 안 될 말이지!)

그 피해자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부모를 죽이고 어린 시절을 망친 원수가 누군지 모르는 탓에 그 원한을 무차별적으로 발산하는 비틀린 청년을 말이다.

유지수는 한 명뿐이지만, 이번에도 반복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

반란군 신원은 인권을 들먹이며 감춘 채 ‘그들은 죗값을 치렀습니다.’라고 거짓 보도할 정부와 본부의 태도가 뻔하다.

레드군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다.

(그들의 처분 방식은 선배 마음이야. 일단은 국가반역자들이니까.)

(높으신 분들은 싫어하겠군.)

강남구 부동산 투기는 ‘대(大)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 피해액을 만회하려면 ‘유죄가 뻔한 계약자’들의 신상정보보호와 사면을 빌미로 이것저것 떼먹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르 4세는 그러도록 놔둘 생각이 없다.

투기도 따져보면 투자.

실패했으면 그 부담과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내 몸과 마음은 언제나 선배 편이야. 알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몸은 됐고 마음만 아군이면 안 될까요, 15금 공주님.)

(어머! 냉큼 거절할래요, 나의 용사님.)

(쯧.)

슬쩍 운을 때봤는데 역시나 안 먹힌다.

무일은 혀를 차며 녹아버린 아지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겨울이라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일대는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선배.)

(.....)

(선배!)

(왜?)

(지금부터 처녀 사냥꾼으로 돌변할 거야?)

법의 보호를 못 받는 아리따운 처자(국가반역자)들이 밑에 한가득했다. 카르 4세가 그녀들을 어떻게 하더라도 광분할 수호자도 없다.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용사지망생’은 정론으로 답했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내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리 없잖아.)

(알아. 그냥 해본 소리였어.)

(어?)

지하통로 계단을 막 내려가던 무일은 걸음을 멈췄다.

이 음흉한 후배가 갑자기 고분고분하게 나오네?

(선배는 줘도 못 먹는걸~☆)

(너였구나! 카르 4세가 고자라고 본부에 소문낸 원흉이!)

< [8장-3] 공주님? 꿈 깨세요.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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