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33화 (33/287)

< [8장-2] 공주님? 꿈 깨세요. >

‘시간 제한이 아쉽군.’

하지만 카르 4세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언제 레드군이 강남구를 불태울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다혈질 용왕님에게 지원받을 수 있다고 계약자 윤소영에게 호언장담 들은 게 조금 전인데 그새 계획이 변경됐다.

이대로 그가 후퇴하더라도 욕할 사람은 없으리라.

애초에 ‘그런 침투계획도 있었나?’라며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태반이다. 더 심하면 ‘카르 4세? 그게 누구?’라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사냥꾼은 망설이지 않고 [예측]했다.

레드군의 공격 시기를 어림짐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앞에 2종을 완전히 침묵시키고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신토구리 / 2종 소형】

계약자에게만 난감한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하면 인류에 보탬이 되는 훌륭한 괴수다.

하지만 그 ‘단점’ 등은 당장 중요하지 않다.

현재, 필요한 정보는 저 ‘2종 괴수’의 공략법뿐이다.

거대한 너구리, 신토구리.

소형이지만, 날렵하고 영리하며 목숨 질긴 괴수다.

그렇다고 위험한 괴수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든 일격에 끝내는 절단기’를 보유한 카르 4세에게는 손쉬운 사냥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2종이라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녀석의 특징은 무지막지한 회복력. 그리고 소형 괴수들이 보유한 [예지] 능력을 약간 갖추고 있다.

원거리 저격수, 사수들에게는 3종보다 위험한 괴수.

찰나의 미래를 보는 [예지]는 멀리서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게 해주고, 신토구리 특유의 재생력은 치명상도 순식간에 회복하기 때문에 암담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일격필살.

머리와 네 다리에 심어져 있는 총 5개의 심장을 한꺼번에 끝장내야 한다.

‘꼭 부술 필요는 없지.’

관통상은 순식간에 회복하지만, 절단된 육체는 그렇지 않다.

수많은 괴수가 상처 입은 부위만큼 육체를 축소해서 재구축하는 게 보통이지만, 소형 괴수는 그렇지 않다.

몸을 축소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떨어진 부위를 찾아서 접합하거나 흡수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신토구리는 ‘흡수’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총탄에 맞고 튀는 살점을 순식간에 회수해서 복구하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베어져 허공으로 떠오른 네 다리와 머리통을 곧바로 회수할 방법 같은 건 없다.

몸통을 베는 건?

검신(劍身)이 얇은 카르세리안 레이소로는 무리다.

베자마자 붙어버리기 때문이다.

“크릉?!”

신토구리가 마침내 위기를 [예지]했다.

하지만 이 초대형 너구리는 빠르게 접근해오는 ‘털 없는 원숭이’를 보고도 피하거나 공격할 생각을 못 하고 바짝 굳어버렸다.

몸집만 큰 너구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전기톱처럼 돌기가 흉측하게 자란 발톱을 세워보지만, 그 행동은 발버둥처럼 애처롭기까지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래를 보는 [예지] 때문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죽음으로 귀결되는 미래’가 괴수에게 항거할 수 없는 공포심을 심어준 것이다.

이건 카르 4세의 [예감]과 [예측]이 신토구리의 [예지]보다 뛰어나다는 방증. 그리고 그 능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조화를 이루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너무나 손쉬운 사냥감.

이 프로사냥꾼에게 신토구리는 평범한 너구리보다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서걱!

도망친다는 선택지마저 고르지 않은 초대형 너구리는 머리와 네 다리가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의해 몸통에서 분리될 때까지도 꿈쩍하지 않았다.

도망친다면 시간은 끌 수 있겠지만 ‘죽는다.’는 결과만은 바꾸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영리한 신토구리는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지]만 하다가 절명했다.

카르 4세는 그야말로 천적!

수많은 소형 괴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암투나처럼 ‘죽는다.’는 미래를 알고도 달려드는 멍청한 참치는 예외지만.

하지만 그 반대 상황도 있다.

【레드군 / 7종 소형】

절대적인 ‘승리’를 [예지]하는 괴수에게는 역으로 카르 4세가 짙은 공포를 느낀다.

본능에 충실한 괴수처럼 목을 내밀고 있진 않지만, 평상시보다 몸이 확연하게 둔해지고 성향도 비굴해진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무일이 유독 윤소영에게 약한 이유다.

이 소녀를 만날 때마다 ‘죽음’이란 확정적인 [예측]과 [예감]밖에 안 떠오른다.

‘조금은 씁쓸하군.’

신토구리의 시신을 내려다본 프로사냥꾼은 씁쓸하게 웃었다.

녀석에게서 미래의 자신이 투영됐기 때문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존재들의 싸움.

그건 상대방의 수를 먼저 읽고 대응하는 전략게임이랑 같다. 하수는 고수를 우연으로라도 이길 수 없다.

변수가 일절 없는 ‘확정된 미래’인 탓이다.

고수는 하수의 수를 끊임없이 읽으며 ‘예정된 패배’로 인도한다.

뒤집으려면?

수가 읽히더라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면 가능하다.

“흠…. 지금쯤 계약자가 깜짝 놀라고 있겠군.”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아니다.

수호자 신토구리와 교류하고 있던 계약자가 강남구에 침투한 ‘검을 든 소년’의 위치를 주위의 동료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두를 필요가 있다.

먼저 공격하는 방식은 성미에 안 맞지만, 수호자들에게 포위되면 찍소리도 못해보고 갈기갈기 찢겨 죽는 수가 있다.

3종 둘만 동시에 공격해와도 거의 사망 확정.

상성의 우위라는 놀라운 기적 이벤트가 발생하더라도 승산은 절반 아래다.

‘앙그류 그랑모리, 요 녀석 때문에 또 모르겠군.’

물리적인 반동 85%를 흡수하는 장갑. 일명, 손이 머무는 호텔.

카르 4세가 3종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반격]으로 하나를 쓰러트린 직후에 드러난 허점 탓이 컸다.

하지만 그 허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체력이 받쳐준다는 가정하에 이론상으로는, 몇 마리가 포위하든 전부 쓰러트릴 수 있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

증명하고자 목숨 걸 필요는 없다.

그렇긴 한데….

“웃!”

반란군 측의 대응은 무척 빨랐다. 아니, 괴수의 피 냄새를 맡은 수호자들이 신속했다는 편이 정확하리라.

바닥을 구르며 기습공격을 피했다.

물론,

그 보답으로 [반격]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콰과광!

몸이 좌우로 양분되며 죽은 괴수가 근처 건물이랑 충돌하며 벽을 허물었다.

그 콘크리트 잔해에 깔린 괴수가 ‘어떤 녀석’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또 다른 괴수가 공격해왔다.

동시 공격이나 다름없는 신속함.

하지만 약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카르 4세가 [반격]할 준비를 마칠 시간으로는 그 찰나면 충분했다.

상체를 뒤로 120˚ 젖히며 여자친구를 수평으로 세웠다.

허리에 심한 무리가 오면서 ‘삐그덕!’ 같은 불길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렇다고 안 피하면 허리 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우당탕, 콰당!

건물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판잣집을 우르르 무너트리며 쭉 돌진한 괴수가 몸을 되돌리는 일은 없었다.

절명했으니까.

하지만 처음 녀석이랑 이 녀석이 동료였다면 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절하게 차례대로 달려들어 ‘일대일’ 상황을 만들어줬다.

개인전과 협공은 그 차이가 무척 크다.

집중이 둘로 분산되고 피할 수 있는 공간과 방법은 한정되며 힘은 배로 든다.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렸지만 과연 어떨지….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가다듬는 카르 4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후아!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닌데?’

일주일에 괴수 두세 마리 잡는 게 평균인 ‘힘없는 프로사냥꾼’이 바로 카르 4세다.

그런 그에게 일주일 분량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니 힘들 수밖에 없다.

뚝, 뚝, 뚝….

특공대 전투복은 괴수의 은색 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무일의 검은 두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색으로 뒤집어쓴 상태였다.

이 또한 좋지 않다.

생체기라도 났다가는 그대로 괴수의 피가 혈맥으로 침투할 빌미를 제공하는 까닭이다.

조금만 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빈민가라도 의류점이 없는 게 아니고 주택은 더 많다.

거기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 편이 프로사냥꾼의 준비된 자세를 실천하는 길이다. 괴수 한두 마리를 쓰러트렸다고 흥분해서 날뛰는 건 초짜나 하는 실수다.

무일은 정말 많이 봐왔다.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가 만용으로 죽는 모습을.

그 광경은 허망함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하다. 저렇게 죽으려고 피땀 흘려가며 훈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나답지 않은데….’

육체적 약세를 달고 있는 카르 4세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나태해지지 않도록 늘 스스로 채찍질하고 담금질해야 그나마 남들의 평균 끄트머리를 간신히 쫓을 수 있다.

계약자는 미모 관리로 힘들다고?

이 프로사냥꾼의 일과를 안다면 조용히 찌그러져서 얼굴에 오이나 붙이고 있어야 한다.

타고난 미모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지만, 그의 몸뚱이는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근육이 빠져 있다.

그 대신에 다시 만들기도 남들보다 쉽지만, 괴수랑 부대끼며 사는 사냥꾼인 카르 4세는 최단기간에 최상의 몸 상태를 복구해야 한다.

그건 그야말로 고역이다.

아리따운 공주랑 희희낙락하며 숨만 쉬어도 근육이 붙는 전래동화 왕자들을 전부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누굴 탓하리오….”

돈이 필요해서 ‘실패작’ 같은 걸 먹은 내 운명이지.

해탈의 경지에 진즉 접어든 무일은 첩보위성이 가르쳐준 반란군 아지트로 전진했다. 조금, 아주 조금 쉬었으니 됐다.

꺼칠꺼칠한 벽이나 바닥에 긁힌 작은 생체기만으로도 미쳐버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태였지만, 레드군의 불길에 잿더미로 변하는 것보다는 낫다.

백신도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예 미리 투약했다.

그러면 효과가 반감되지만, 1초도 쪼개서 써야 하는 전투 중에 주삿바늘을 꽂을 시간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히이이잉!”

우렁찬 말 울음소리.

수호자를 몇 마리째 벴는지 신경 쓰지 않고 초연하게 진격하던 카르 4세의 빠른 발걸음이 그 소리를 듣고 멈췄다.

거대한 백마가 흰색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정자세로 저 말의 등에 타려 했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 만큼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호리호리한 미소년 용사’가 아닌 ‘원조 마초 용사’쯤 돼야 제대로 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전설의 용사’만 애용하던 자가용.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실체이자 시조(始祖)인,

【로니콘 / 4종 보통】

이번에야말로 카르 4세는 숨을 가다듬으며 휴식을 취했다.

위치라면 이미 발각됐다.

하지만 로니콘이 바로 공격해오지 않은 건 의도적으로 좁은 골목으로만 이동해온 프로사냥꾼의 조심성이 빛을 발한 덕분이다.

‘지금부터가 문제로군….’

계약자의 안전이 최우선사항이라서 여태까지는 만만한 수호자만 덤벼들었지만, 이 앞부터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공격해올 것이다.

어쩌면 [예감]보다 빠르게 발사된 솔라충의 태양광선이 무일의 작은 육신을 분자단위로 분쇄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1초 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카르 4세는 움직였다.

무모한 발버둥이 될지라도 ‘의미’만 있다면 해보는 것이다.

예정대로 강남구가 레드군의 불길로 소멸하면 기뻐하는 건 극소수의 투기꾼들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즐거움 이상으로 고통받는 건 힘없는 서민들이다.

막아야만 하는 의미는 또 있다.

반란군.

그 의도가 탐욕의 발로였더라도 무작정 죽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죽음으로 사죄할 수 없는 잘못도 있다.』

이번 63빌딩 사망자는 결코 한둘이 아니다.

163층 고층빌딩.

층마다 한 사람씩만 죽었다고 가정해도 163명이다. 하지만 그런 기적이 있겠는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만 명이 죽었다.

어디 그뿐이랴?

강남구의 혼란으로 죽거나 몸과 마음에 상처 입은 시민도 많다.

그 대죄를 화형(火刑)으로 가볍게 끝낸다?

공정한 재판을 받고 그만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돈에 눈이 먼 투기꾼들은 현실을 ‘땅따먹기’ 보드게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열심히 번 돈으로 불로소득을 취하겠다는데 뭐가 나빠?’라고 할 것이다.

그래. 투기꾼들은 나쁘지 않다.

나쁜 건 자본주의를 만든 몽상가들이다.

‘황금의 손?’

인간의 탐욕이 상식의 범주마저 뛰어넘는 바람에 고대의 신들도 어쩌지 못했다.

제우스, 그리스도, 부처, 오딘, 알라…. 그 전지전능하다는 신들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수천 년째 인류를 방관하고 있다.

인간의 발명품(제도)이 인간을 괴롭히는 악순환. 그리고 그걸 악용하는 자들.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일은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러니 강남구가 불타도록 놔둬선 안 된다.

일개 사냥꾼이 발버둥 친다고 바뀔 역사가 아니더라도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신념.

수많은 사람이 ‘한심하다, 어리석다.’고 비꼬면서도 속으로 ‘존경스럽다, 눈부시다.’고 질투하는 미지의 무언가.

내가 안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을 시기하는 모순.

“뭐…. 그런 의미에서 나도 모순되긴 마찬가지지만.”

< [8장-2] 공주님? 꿈 깨세요.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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