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1] 공주님? 꿈 깨세요. >
[8장] 공주님? 꿈 깨세요.
학명: 솔라충(광합성 하는 딱정벌레)
서식지: 햇볕
특징: 태양을 가리는 구름을 싫어합니다.
위험도: 6종 보통
비고: 장마철에는 건들지 맙시다♪
***
대략 100년 전에 터진 ‘제4차 세계대전’ 당시, 인류의 무기 수준은 우주에서 일방적으로 팡팡 쏴댈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 기술력으로 지상의 괴수들을 폭격하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강대국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해보니 ‘이건 아니올시다!’였다.
전략가와 과학자들의 분석대로 어느 정도는 정리됐으나 7종 이상은 우주에서 뭔 짓을 해도 끄떡하지 않았다.
물론….
지구를 소멸시킬 기세로 화력을 퍼붓는다면 쓰러트릴 순 있을 것이다. 괴수도 피가 흐르는 생물(몇몇 제외)인데 계속 멀쩡할 수만은 없잖은가?
그러나 이 또한 논외.
지구의 주인 격인 인류가 괴수랑 공멸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조금 ‘양보’하는 걸로….
양보?
어린애들도 안 믿는 교과서적인 얘기다.
『인류는 괴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정말로 양보하는 정도였다면 이렇게까지 인류가 비좁은 땅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일방적인 공격?
성층권에서 활동하는 볼트윙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열권 밖에서 인공위성처럼 떠돌거나 달에서 서식하는 괴수도 있다.
녀석들이 역으로, 일방적으로 우주에서 인류를 학살했다.
그나마 그건 극소수.
정말 무서운 존재는, 판타이탄이나 엘로엘 같은 ‘무형의 괴수’였고, 그다음이 지상(地上)에서 우주를 떠도는 인공위성, 전함, 미사일 등마저 정밀하게 저격하는 괴수였다.
가장 가까운 예로 7종 괴수 레드군.
하지만 이 다혈질 용왕님은 정밀한 저격이라기보다는 ‘쓸어버린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용이 작정하고 내뿜은 브레스는 범위와 사거리, 위력 등의 모든 면에서 인류의 첨단무기를 겸손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특수한 강력함이고,
보통은 저격한다.
【솔라충 / 6종 보통】
이 딱정벌레처럼.
광합성으로 축적해놓은 태양열을 레이저 형태로 쏴서 목표물을 관통한다.
63빌딩을 부러트린 것도 이 솔라충이다.
상대가 이놈이라면 레드군이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계약자인 윤소영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고 회피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저격이란?
연사가 느린 대신 ‘한 방’이 강력하다.
동해에서, 레드군이 7종 동급의 판타이탄의 ‘첨단무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도 싸울 수 있던 것은 오기도 오기지만 한 방의 위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솔라충의 ‘태양광선’이라면 ‘열 내성이 강한 레드군 비늘’도 녹아버린다.
게다가 상성도 나쁘다.
레드군은 ‘소형’이기 때문이다.
덩치와 부피가 작은 만큼, 이런 관통 속성의 ‘일점사(一點射) 공격’이 몸을 완전히 꿰뚫었다가는 절명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레드군이 7종인 이유?
극소수 괴수에게만 있는 [예지]를 보유하고 있다.
사냥꾼의 [예감]과 [예측]의 기원이기도 한, 이 능력 덕분에 레드군은 그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쓰러트릴 수 없는 ‘7종’으로 자리매김했다.
아! 물론,
강력하기 짝이 없는 브레스도 대책 없고.
‘김민지? 역시, 라고 해야 할까. 처음 듣는 계약자 이름이군.’
이번 반란의 핵심인물은 ‘광합성 하는 딱정벌레’ 솔라충과 그 계약자, 김민지다.
부모와 친인척 대부분이 대한민국 정계에 최소한 발 한 짝씩은 담그고 있다는, 계약자의 흔한 배경을 가진 미인이었다.
겨우 6종 하나 때문에 피난?
민간인들은 그렇게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자 대부분은 4종 이하랑 계약했고, 5종은 드물게, 6종부터는 ‘나라를 뒤흔들 절세미녀’만큼이나 정말 희귀하다.
4종 괴수 로니콘?
젊고 순결한 자연미인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야색마?
녀석이랑 계약할 바에 1종 괴수랑 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팬티가 남아나지 않는 건 둘째치고, 청결해야 할 여성의 목욕탕, 탈의실 등을 가리지 않고 침범해서 영역표시(똥오줌)를 해대는데 정말 답이 없다.
그러니 로니콘과 계약하는 건 정말 최후의 보루.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이 야색마는 자기 싫다는 미녀에게 찝쩍거리진 않는다.
나름 신사라고 할까?
각설하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6종 이상의 계약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이 비좁은 반도(서울)에 8종 계약자가 둘씩이나 태어난 걸 보면 대한민국은 축복받은 나라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다.
6종 수호자를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할 여력은 없다.
아! 제거라면 할 순 있다.
하지만 갑충(甲蟲) 특유의 단단한 껍질을 깨부수려면 강남구는 없는 셈 쳐야 한다.
즉,
‘나보고 어쩌라고….’
솔라충은 공격력 999 카르세리안 레이소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방어력 MAX 딱정벌레다.
이건 달걀로 바위 치기다.
게다가 수호자는 솔라충만 있는 게 아니다.
김민지 주위에는 5종과 4종 계약자도 있으며, 3종 이하는 그 이상으로 잔뜩 있다.
그런데 이 대책 없는 특공대장은,
(선배는 내 선배니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 맞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시민 대피가 ‘대충’ 완료되는 대로 레드군이 강남구를 소거할 예정이거든.)
무너진 63빌딩만으로도 버겁다는 뜻이다.
반란군의 요구조건인 ‘계약자와 일가족 대우 상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상세한 내용까지 전해 듣진 않았지만, 그 ‘대우’라는 게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여왕님이 되고 싶은 걸까?
일가족까지 ‘왕족’처럼 대접해달라고 생떼 부린 걸로 봐서는 십중팔구.
그래도 새 정부나 왕국을 세우겠다고 안 한 점만은 기특하다고 칭찬해야 할 것이다. 반란군 측도 민간인(63빌딩) 피해가 커져서 당황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이래선 대우는커녕 박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박해(迫害)라….’
계약자와 수호자는 ‘무기창고’ 같은 장소에 처박아뒀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계약자는 ‘아름다운 전쟁노예’로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성적인 건 아니다.
정부와 본부를 싸잡아서 ‘멍청하다, 무능하다.’고 욕하는 시민과 기자들이 인터넷과 방송매체 등을 통해서 매년 온갖 쓰레기 같은 아이디어를 ‘익명’으로 토해놓는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반항 못 하도록 계약자(수호자)의 목에 폭탄을 매달자!』
『예쁜 계집아이를 추려 어릴 적부터 세뇌교육을 하자!』
이렇게 하면 간단한 걸 왜 못해!
그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정말로, 진지하게,
무지(無知)하면 용감한 법이다.
정부와 본부에는 ‘나보다 멍청한 사람만 일한다.’고 믿는 걸까?
그게 가능했으면 인류평화란 위명 아래에 계약자의 인권 따위 무시하고 진즉 시행했을 거란 생각을 못 하는 걸까?
좋다! 무능하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정부와 본부가 무능해도 계약자와 수호자가 등장한 세월이 자그마치 100년을 훌쩍 넘겼다. 그 정도 유예기간이면 한 번쯤 ‘우연’으로라도 생각해냈을 것이다.
『안 하면, 안 하는 이유가 있는 거다.』
괴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쓰레기 아이디어’가 전부 무용지물이란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계약자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스트레스로 피부가 푸석해지는 문제만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지배받는 걸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의 여성이 매우 적다. 그런 취향을 보유한 ‘아름다운 여성’은 더욱 적고.
무엇보다도….
그녀들이 싫다고 반항하면 달리 방도가 없다.
죽여? 때려? 혼내?
수호자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여기를 소거한다고?)
(응.)
세뇌받은 계약자가 ‘내가 모시는 주인님이야! 적대하면 안 돼!’라고 수호자에게 명령하더라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
역으로 더 화내며 난동부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만,
『괴수는 미녀의 봉이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6종 계약자 김민지가 수호자 솔라충에게 ‘적당히 위협만 해줘!’라고 명령 아닌 부탁 내지는 설득하더라도 듣지 않는다.
적당히?
괴수의 어휘사전에는 비슷한 단어조차 없다.
그 결과,
요구를 관철하려던 무력시위가 순식간에 전쟁으로 탈바꿈했다.
(왜?)
(본부와 정부의 의견이 방금 일치했거든. 본부는, 63빌딩 구조작업과 강남구 피난작업만으로도 한계. 정부는, 야당의 일각을 무너트리고 민심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판단. 아주 간단한 이치지.)
(이치라고?)
(응.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렸다.
무거운 무언가를 토해내듯 격해진 음성으로 프로사냥꾼이 말했다.
(이유가 그뿐일 리 없잖아! 구조? 민심? 예전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면 63빌딩이 무너지자마자 대통령과 본부장관이 길거리에 무릎 꿇고 대국민사과부터 했겠지.)
(그래서?)
(돈 냄새를 맡은 거야.)
(어머! 거기까지 내다본 거야? 역시, 내 선배야.)
강남구가 ‘빈민가’라는 것도 주효했으리라.
여기에 기반을 둔 정치인과 재산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등으로 ‘강남구 부동산투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강남구 땅값이 바닥을 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왕창 사들인 뒤에 국가발전사업의 하나로 강남구 전체를 ‘재건축’한다면?
떨어진 땅값이 쭉 올라갈 것이다.
레드군이 홀라당 태워버린 뒤라면 안 할 수 없는 사업이다.
(특공대장님도 땅 좀 샀습니까?)
(응. 조금. 시키지도 않았는데 밑에 애들이 충성한답시고 발 빠르게 사들였어.)
(그렇습니까.)
파주시 대지주인 선지혜에게는 유능한 자문단이 있다.
그들마저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이지?
대한민국의 천재들이 한다는 생각이 돈뿐이라서 상당히 언짢았다.
(너무 비난하진 마. 그 돈으로 선배의 무덤은 휘황찬란하게 해줄게. 옆자리에 내가 누울 건데 그 정도는 신경 써야지.)
(제 죽음은 확정입니까! 그리고 그 무덤 계획은 또 뭡니까!)
(죽기 싫으면 막아보던가.)
(솔라충 때문에 심기 안 좋은 레드군을 무슨 수로 막아!)
(아니면 나랑 같이 묻히던가.)
살벌한 내용을 무사태평하게 내뱉는 선지혜.
[예감]과 [예측]을 총동원하여 강남구 시내 깊숙이 잠복한 카르 4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강남구를 통째로 태워버린다고?
돈 냄새 맡은 양반들 때문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계획이 실행되려 하고 있었다.
이건 빨간색.
전 세계의 근대 100년 역사를 다 뒤져도 몇 번 없었던,
무차별 섬멸전이다.
거기에 휩쓸리면 카르 4세는 뼛가루랑 카르세리안 레이소(저주받은 검의 6번째 희생자 기록)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야! 선지혜! 사람을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법이 어디 있어!)
(어어?!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됐는데, 이름으로 ‘뜨겁게’ 부르는 건 반칙!)
정말로 당황한 목소리로 항의하는 특공대장이었다.
하지만 무일은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극상을 따질 때냐!)
(심장이 너무너무 두근거리는 바람에 해줄 말을 까먹었어. 조금 미안.)
(미안하면 기억해내! 중요한 얘기일 수도 있잖아!)
강남구를 통째로 태워버린다고 설명하던 중에 멈췄다. 뒤에 이어질 내용이 쓰잘머리 없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선지혜는 ‘죽어버리면 저승까지 쫓아갈 거야.’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사후세계로 도망쳐도 평탄하지 않음을 암시하고는 제멋대로 통신을 종료했다.
이런 협박이나 하라고 준 무전기가 아닐 텐데….
무일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좀 더 위험한 중심가로 향했다.
‘지하도가 울림만 없으면 안성맞춤인데.’
지구에서 남성이나 여성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끊이지 않을 ‘강간범으로 돌변한 민간인’들의 두개골을 후려치며 은밀하게 전진하길 수차례.
인적이 뜸해졌다 싶은 순간이었다.
반란군에 소속된 괴수가 마침내 프로사냥꾼의 시야에 잡혔다.
‘다행히 2종인가.’
3종만 됐어도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 이곳이 인간에게 익숙한 도시만 아니었어도 카르 4세가 먼저 발견하는 상황은 없었으리라.
인간의 체취와 잡음으로 가득 찬 공간.
그 조건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제대로 살려준다.
찰칵.
카르 4세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왼편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여친이 제멋대로 뽑히지 않도록 해주는 안전핀을 해제하고 손잡이를 꽉 쥐었다.
괴수보다 먼저 발견했다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최적의 시간과 장소로 불러들여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8장-1] 공주님? 꿈 깨세요.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