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31화 (31/287)

< [7장-4] 이 길이 오지랖일지라도. >

차에 올라타자마자 시끄럽게 외치는 헌병대장 둘째 아들내미.

유지수 못지않은 미남의 택시운전기사(?) 문세웅은 어떻게 운전면허를 땄나 싶을 정도로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고 하더라.”

“정말이라니까요! 지금, 서울 남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둘로 나뉜 계약자 부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정말 살짝만 건드려도 사달 날 것 같다니까요!”

흔하진 않지만 뜸한 사건도 아니다.

한국에서만 처음 일어난 ‘계약자 반란’일 뿐이다.

여태까지 ‘사냥꾼의 희생’과 ‘시민의 무관심’으로 거짓된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온 것이다.

그 팽팽한 줄타기를 조절하던 와이츠가 없으니 문제가 터질 수밖에.

볼트윙 테러가 도화선으로 작용했으리라.

“아직 안 싸웠다는 거군.”

“아니요. 한 번 붙었는데 불똥이 멀리 떨어진 63빌딩으로 튀면서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 아! 맞다! 실제로 본 바람의 마녀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무너지려는 63빌딩을 날려서 한강에 빠트렸다니까요!”

유지수랑 대화한 그 잠깐 사이에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변했더라, 수준을 넘어섰다.

운전기사 문세웅이 모는 초고속 스포츠카 ‘나브랑모스 레비터’는 어느새 올림픽 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반대편 도로는 강남구를 빠져나가려는 차량으로 꽉 막힌 상태.

그 때문에 초조해 하는 시민들을 헌병대가 통제하는 광경이 여기저기 보였다.

“정말로…. 63빌딩이 사라졌네.”

무일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서울의 땅이 현격하게 부족해지면서 숭례문을 비롯한 국보(國寶) 대부분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농경지와 고층아파트가 세워졌다.

그 결과, 63빌딩만 남았다.

남산 위에도 철거하지 않은 무슨 타워가 있었다는데, 그건 무일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사라져서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타워 꼭대기에 초대형 돼지 플라돈이 앉아서 몇 번 흔들었더니 모로 쓰러졌다나?

각설하고,

매년 내부공사와 보강공사 등으로 63빌딩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163층에 달하던 ‘서울의 상징’은 문세웅의 말처럼 한강에 가라앉은 모양이다.

아! 저기 보이는군.

깊지 않은 한강 위로 튀어나온 잔해가 다리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구명보트를 탄 구조대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이거…. 사냥꾼 나부랭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저걸 보고도 마음 약한 소리를 안 할 사내가 있을까?

문세웅만큼은 아니겠지만, 8종 괴수의 신위를 간접적으로 목격한 프로사냥꾼 카르 4세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막연히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심했다.

인류의 첨단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163층짜리 빌딩을 한강까지 단번에 옮겨서 빠트리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흔적도 없이 파괴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바람의 여왕은 이 뒤에 뭘 하고 있어?”

“어딘가로 날아갔습니다.”

“날아가? 서울을 이 지경으로 놔두고?”

“네. 정말 어이없죠?”

하지만 그 선배의 표정은 후배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귀찮은 문제를 껴안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8종 계약자 박선영이 치매 걸린 게 아니라면, 이번 쿠데타는 힘으로 밀어붙여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란 뜻이다.

특공대장이 카르 4세를 호출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끼이이이익!!

난폭운전, 속도위반, 신호위반. 그 모든 걸 한꺼번에 해치운 문세웅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나브랑모스 레비터를 세웠다.

오는 내내 노인이나 어린이를 치지 않은 게 기적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을 내뱉을 시간조차 무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도착했으면 빨리 내려!”

차내 방음처리가 제법 잘 되어있어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인의 연분홍빛 입술 모양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싫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는 걸로 답변을 대신한 무일은 잠금장치를 풀고 어기적거리듯 천천히 스포츠카에서 내렸다.

실물로 보니 더 괴롭군.

특공대장이 심술궂은 누나처럼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그 가벼운 복장은.”

선지혜는 한국 여성의 필수품인 브래지어조차 하지 않은 맨살 위에 ‘I ♡ Seoul’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흰색 티셔츠 단벌이었다.

이래저래 곤란하게 속이 비치진 않았지만, 가슴부터 허리까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굴곡을 과시했다.

하의는 여학생 교복처럼 건전한 연갈색 치마.

하지만 그녀가 걸치니 조금도 건전하지 않았다. 치마폭을 줄이진 않았으나 쭉 뻗은 우월함 때문에 무언가 많이 허전해 보이는 맨다리가 훤히 드러난 까닭이다.

얼굴은….

볼 때마다 옛날 일이 떠오를 만큼 사랑스럽게 생겼다.

청순한 눈매, 청순한 입술, 청순한 턱선, 청순한 콧등, 청순한, 청순한….

시커먼 세상에서 격리된 진짜 공주님 같다.

만약, 정말 만약에 선지혜의 4차원 사고방식을 몰랐다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경탄했을 것이다.

아니면 원래 천사는 4차원에서 사는 걸까?

시답잖은 생각 중인 카르 4세에게 아름다운 특공대장이 말했다.

“가벼워? 아! 날씬해 보인다는 거지? 코디에 신경 좀 썼어.”

골반에 손을 얹고 잘록한 허리를 과시한다.

무일은 무심코 그녀의 ‘8종 계약자’다운 몸매에 점수를 매기고 말았다.

억지로 흠잡으면 천벌 받을 ‘완성체’다.

저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절대로 폄하(貶下)할 수 없다. 노력하는 이유까지 안다면 더욱!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방탄코트는 어디에 놔두고 그리 무방비한 차림으로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듣자하니 여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거라면 방금까지 걸치고 있었어.”

주변인들의 표정이 정말이라고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두꺼운 ‘특공대장 코트’로 감싼 알맹이가 저리 무방비한 복장이라고는 그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무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질렀다.

그렇다고 가만히 지적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특공대 선배로서 ‘칠칠치 못한 후배’ 앞에 자연스럽게 섰다.

선지혜와 마찬가지로 방탄코트는 안 걸치고 있지만, 카르 4세는 [예감]과 [예측]이 최고의 방패이자 무기.

그리고 보호구라면 있다.

앙그류 그랑모리, 카르세리안 레이소.

이 둘이면 4종 이하의 웬만한 괴수 공격은 거뜬하게 쳐낼 수 있다. 그리고 카르 4세에게 쳐낸다는 의미는 ‘반격해서 죽인다.’는 뜻이다.

소년이 자신보다 큰 여인을 호위하듯 섰다.

프로사냥꾼이 선배다운 엄한 눈초리로 싱글거리는 후배에게 말했다.

“방금까지 걸치고 있었다?”

“응.”

“아, 네. 그러시겠죠. 그런데 답답해서 벗었다. 이렇게 주장할 생각입니까. 또?”

“하지만 정말인걸~☆”

정말 민폐가 따로 없다.

호위라는 건 마네킹처럼 멀뚱멀뚱 서 있는 업무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대신 죽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괴수는 그나마 정직해서 낫다.

인간의 지능적인 저격과 가스, 포탄 등은 ‘회피불가’의 상황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네.’

방탄코트만 걸쳐도 위험도가 절반 아래도 떨어지는데 그걸 내팽개쳤다.

카르 4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건 분명 아닌데….

지금처럼 모호한 상하관계가 아닌, 명확한 선후배 관계일 때부터 그랬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절세가인은 그를 ‘인간의 탈을 쓴 수호자’쯤으로 여긴다.

어느 전래동화를 뒤져봐도 공주에게 아름다운 치마 대신 튼튼한 갑주를 걸치라고 득달하는 괴수는 없다.

공주는 괴수 뒤편에서 ‘겁 없이 달려든 용사’가 패배하거나 승리하는 광경을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건 계약자도 마찬가지. 모든 위협은 수호자가 처리한다.

그래서 선지혜가 문제라는 거다.

와이츠가 곁에 없으면 신변에 신경 써야 하는데 그녀는 그런 게 없다.

물론,

한무일이 근처에 있을 때만 이런다.

파주시의 대지주(大地主)이며 대부호(大富豪)이기도 한 선지혜의 방탄코트는 한국에서 최고로 비싸다. 탄도미사일을 맞아도 끄떡없다는 소문이….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예쁜 후배의 마음을 걷어찬 선배를 골탕먹이고 싶은 것뿐이다.

“잘 알겠으니 상황설명이나 부탁합니다.”

“설명할 게 별로 없는걸.”

“...그렇습니까? 간단명료한 설명 감사합니다.”

저것도 설명이라면 설명일 것이다.

해줄 말이 없다는 건, 강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이 외국의 사례를 똑같이 답습 중이란 뜻이다.

창의력이 부족한 걸까?

수호자만 믿고 세상 무서울 줄 모르는 공주님들은 어느 나라에나 꼭 있다.

한국은 그 비율이 낮았는데 그래도 조금씩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어느새 ‘반란’을 획책할 수 있는 규모로 커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계약자만으로는 새 정부를 세울 수 없다.

단정하는 이유?

계약자를 기고만장하게 하는 근간인 수호자는, 온라인 RPG 게임에 나오는 괴물 동료처럼 편리하고 친절한 꼭두각시가 아닌 까닭이다.

박선영?

바람의 여왕은 정말 이례적인 경우다.

그렇게 따진다면 엘로엘도 와이츠처럼 별난 수호자임이 분명하다.

“선배. 뭘 해야 하는지도 알아?”

“...대충.”

“미안하지만 지원병력은 없어. 강남구를 포위하는 건 고사하고 물에 빠진 63빌딩에서 사람을 구해낼 인력도 모자라는 형편이야.”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피난민의 행렬은 여전히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차도(車道), 인도(人道) 할 것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실탄이 장전된 총기로 무장한 헌병대의 강압적인 기세 덕분에 시내는 제법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볼트윙 때처럼 아비규환은 아니었지만, 이 혼란을 기회 삼아 ‘짐승이나 할 법한 만행’을 저지를 인간이 대한민국에 무척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똑같겠지.

그렇게 위안 삼는 수밖에 없었다.

프로사냥꾼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는 탓이다. 그는 전문싸움꾼이지 메시아(messiah)가 아니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마음에 드는 길을 선택해봐.”

“...어차피 단독임무인데 선택할 수 있는 겁니까?”

반란을 진압하는 방법은 총 3가지다.

무차별 섬멸전, 계약자의 친인척 확보, 반란군 수호자 제거.

카르 4세가 선택 가능한 길은 푸른색뿐.

붉은색과 노란색은 괴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강남구가 서울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평화적인 인질극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할까?

쿠데타를 일으킨 계약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보다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편이 더 쉽고 깔끔할 것 같다.

“선배를 도와줄 계약자라면 있어.”

“누구…?”

“엉큼한 이팔청춘, 윤소영 양!”

그 직후, 깜찍한 비명이 뒤편에서 터졌다.

두꺼운 코트와 후드로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던 소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달려왔다.

목적은 선지혜의 입을 막는 거였던 모양이지만, 키가 닿지 않는 과일나무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윤소영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언니! 정말 못됐어요!”

“틀린 말도 아닌걸. 그리고 이건 63빌딩을 날려 먹은 벌이야.”

“제가 안 그랬어요! 오빠가 듣고 오해하잖아요!”

서둘러 변호하기 시작하는 레드군 계약자, 윤소영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랬다.

엘카르(레드군 애칭)가 공격을 막지 않고 피한 방향에 63빌딩이 있었고, 연약한(?) 163층 문화재(대한민국의 마지막 국보)는 유리파편처럼 부서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닌가?

프랑스 ‘에펠탑(사르르 녹아버린)’과 미국 ‘자유의 여신상(횃불만 남은)’보다 오래 버텼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63빌딩의 명운은 볼트윙이 박지 않은 시점에 다했던 게 분명하다.

“자자, 윤소영 양. 울지 마십시오.”

“훌쩍! 믿어주시는 거예요?”

“믿고 말고 할 것 없이 윤소영 양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수호자는 계약자의 하수인이 아니라 대등 이상의 존재니까요.”

“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음에도 소녀가 머뭇거린다.

역시,

이 애송이 같은 얼굴은 뭔 말을 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래도 카르 4세는 최선을 다했다. 윤소영의 정서가 불안정하면 레드군의 협조를 받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윤소영 양.”

“네.”

“당신에게 레드군은 친구입니까, 부하입니까?”

“당연히 친구예요!”

무일은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도한 답변은 나왔다.

“친구의 잘못까지 감수하는 친구는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아….”

책임 전가는 주종관계일 때만 성립된다.

소란을 일으킨 공주님들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7장-4] 이 길이 오지랖일지라도.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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