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3] 이 길이 오지랖일지라도. >
“이 세상에는 다양한 계약자만큼이나 다양한 사냥꾼이 있어. 목적은 제각각이지. 돈과 명예, 복수, 모험, 도전, 자살. 응? 마지막은 무시해도 돼.”
“......”
“정말 많지만 따져보면 두 부류로 나뉘어. 이기적이냐, 희생적이냐. 중간은 없어. 그런 멀쩡한 정신으로 괴수에게 달려들 수 있을 리 없잖아?”
모든 나라의 괴수대응본부가 거대한 ‘후천성 정신병자수용소’다. 눈앞에서 사람이 갈기갈기 찢겨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인간들로 한가득하다.
거기에 ‘왜?’라는 상식적인 이유를 붙이면 곤란하다.
그건,
인간이 이길 수 없는 괴수에게 어째서 저항하십니까?
...라고 묻는 거나 다름없다.
초식동물 무리는 육식동물 한 마리만 돌진해와도 우르르 도망친다. 머릿수를 믿고 함께 대항할 생각을 못 한다.
하지만 그게 본능이고 정상이다.
발톱이나 이빨만 스쳐도 죽는 연약한 인간이, 무한한 체력과 재생력으로 무장한 괴수에게 덤빈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그 사실은 ‘4차 세계대전(워낙 일방적으로 끝나서 세계대전으로 취급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결과로 진즉 밝혀진 사실이다.
인간은 괴수를 이길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덤비려면 사고가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형님은 희생적이란 겁니까?”
무의미한 질문이었음을 유지수는 말하고서 깨달았다.
형님은 처음 만난 10년 전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방금 말해놓고 무슨 딴소리를 한단 말인가.
카르 4세는 원리원칙을 따지는 박애주의자였다.
본인은 ‘이기적인 남자’라고 곧잘 말하지만, 진짜 헛소리다.
그 사냥꾼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타국과 비교해도 한국인들은 판타지를 지나치게 좋아하니까. 어른이 똥오줌 못 가리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애들의 동화는 지켜줘야지.”
아이들의 꿈은 소중한 법이다.
이제 답답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한 형님의 발언을 들은 유지수는 질렸다는 얼굴로 홍차만 찔끔찔끔 마셨다.
여기에 항변할 수 없다.
그건 유지수란 어린 소년이 무사히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을 전면부정하는 꼴인 탓이다.
그는 이 ‘답답한 형님’에게 구원받았다.
하지만 닮고 싶은 마음은 없다. 유지수는 한무일이 아닌 까닭이다.
“형님 뜻이 정 그렇다면 아이들만 지키시면 됩니다, 외국에서.”
“그 애들을 지켜주는 건 내가 아니라 계약자다, 유지수. 그걸 잊으면 곤란해.”
“그 미친년들을 믿는 겁니까?”
계약자 대부분은 아름다운 몸과 달리 마음은 썩어 문드러져 있다.
썩기만 했으면 다행이다.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보다 괴수랑 오랫동안 교류한 그녀들이 ‘정상적인 여성’이길 바란다면, 그 사람은 ‘이상향을 그린 판타지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이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시민 중에도 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은 뒷전이고, 주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훨씬 애지중지하며 온종일 껴안고 뽀뽀하는 사람들.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이 아닌 이상 ‘평범’하다고 볼 수 없다.
하물며 괴수?
민간인들이 계약자를 보는 시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류탄’이다.
굳이 당사자가 아니라도 그 시선이 ‘매우 불쾌하다.’라는 걸 쉬이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마음의 병이 된다.
정서(情緖)가 혼탁해진다.
‘이 녀석도 세상을 너무 쉽게 보네.’
외국에서 지키라고?
망명이란 걸 이웃집 산책하는 정도로 너무 가볍게 여긴다.
어느 나라에서 ‘잘해줄 테니 이리 와!’ 한다고 얼씨구나 손을 잡고 바다나 산맥, 국경선만 넘으면 다 끝나는 줄 안다.
그게 가상현실게임을 너무 많이 한 자들이 쉽게 저지르는 실수고 오판이다. 유지수도 민간인이기에 예외가 못 됐다.
게임에서는 특수한 설정이 아닌 이상 ‘약속’이 반드시 준수된다.
가상세계 한정으로 전지전능한 ‘게임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스템이 보장해주는 까닭이다.
현실은?
낯선 땅을 밟자마자 강제노역에 시달릴 수 있다.
변호해줄 지인 하나 없고 실종돼도 수상하게 여길 사람 하나 없다. 그러니 외국으로 망명한다는 건 인생을 새롭게 쓴다는 뜻이다.
텃세?
그 정도면 정말 천운이다.
인권 자체를 부정당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얼마든지 당할 수 있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복종시키는 약물을 강제주입하거나 ‘말 안 들으면 고통을 주는 기계’를 몸속에 심는 수단도 있다.
망명이란?
여태까지 쌓은 모든 관계를 끊고 목숨을 건 최후의 도박이다.
“계약자에게 모든 의무와 책임을 얹힐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사냥꾼이 그녀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줘야 해.”
평범한 여자들은 이걸 몰라준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계약자들이 ‘괴수의 본능’에 이성이 잠식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말이다.
유지수가 진심이 담긴 ‘핀잔의 일격’을 날렸다.
“꼭 중2병 같습니다.”
“...낮에도 누군가에게 그 소리를 들었는데.”
“그분이 제대로 진단한 겁니다. 그러니 당장 진료받으시고 조금 차도가 있는 즉시 망명 가십시오. 이 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는 너는 왜 안 떠나는데?”
“내세울 게 없는 저 같은 걸 써줄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꽤 겸손한 태도지만, 저 ‘왕자님’ 같은 얼굴만 팔아도 굶어 죽진 않을 것 같다.
나라가 어쩌니 해도 못 떠나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복수를 달성하기 전까지 한국에 남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너스레 떠는 말투에서, ‘폭삭 망해버린 한국’을 두 눈에 직접 담기 전까지 안 떠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렇다면 한 마디 해줘도 좋겠지.
“이 나라는 안 망해.”“지나치게 단정하시는데요, 형님. 그것도 감입니까?”
“아니. 물증이 있지.”
아주 확실한 증거가 있다.
대한민국이 망하긴커녕 도약할지도 모를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유지수가 쌀쌀맍게 대꾸했다.
“어째서요? 이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오늘내일하고 있습니다. 정계에 있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이랑 합병할 생각도 하는 중입니다.”
“그건 좀 심했다.”
아무리 흔들렸다지만, 얼마 전까지 세계 1위도 찍었던 한국이다.
그 영광이 용신 와이츠 하나로 지탱된 모래성일지라도 중국과 일본이 무시할 정도가 되려면 아무리 못해도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
당장 무너지려면?
8종 엘로엘 계약자가 죽거나 망명하면 그리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
바람의 여왕 박선영만 버티고 있으면 이 작은 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이랑 전면전을 해도 지지 않는다.
‘아! 그렇군.’
카르 4세는 매국노가 등장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지 않는다.
그건 이긴다는 의미도 아니다.
한국의 국방력 70% 이상을 차지한 박선영은 ‘정치인’들의 목숨과 재산까지 보장해주진 않는다. 이번 볼트윙 사건으로 죽은 고위인사가 많다는 게 그 증거다.
우습게도….
학연, 지연, 혈연으로 국가안보에 구멍 숭숭 뚫어놓은 놈들이 ‘한국은 살 수 없는 동네!’라고 먼저 규정한 것이다.
인생 참 쉽게 산다.
마음대로 안 되니 도망친다고?
이러니 윤소영 같은 17살 소녀에게까지 무거운 책무가 전가된 것이다. 어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어린애가 맡았고 끝내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됐다.
7종 계약자가 한낱 사냥꾼에게 의지하게 된 이유다.
정치인이란 걸 떠나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입니다.”“그런 모양이네. 하지만 그뿐이야.”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와이츠가 돌아온다. 계약자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런 거겠지.”
“...계약이 해지된 거 아니었습니까?”
유지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특공대장 선지혜.
그녀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생활을 해왔는지는, 괴수대응본부에 발 한 짝이라고 걸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구도 계약 파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
용신 와이츠가 미치지 않았다면 하나뿐인 계약자를 특공대처럼 위험한 부서에 보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연막이었다면?
아니라고만 할 수만은 없다.
한국에 상륙한 와이츠는 별난 구석이 많은 용신이었기 때문이다.
계약자의 딸을 새 계약자로 받아들인 점도 그렇다.
이 초유의 ‘계약 대물림’ 사건으로, 세상의 수많은 괴수학(怪獸學) 권위자가 자신들의 학설을 뒤엎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잘 생각해봐. 그녀가 남자랑 동침한 적 있어?”
“...형님이랑 하신 걸로 아는데요.”
“안 했어! 누구야!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린 놈이!”
“놈이 아니라 년입니다. 신년회에서 특공대장 본인이 술김에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밤새 시달렸다나 어쨌다나….”
“또 꿈에서겠지! 신년회를 빼먹은 틈에 그런 짓을!”
무일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수제폭탄의 출처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전할 말은 다 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한국이 안 망한다는 사실을 안 이상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와이츠가 관리하는 정보과는 지금처럼 허술하지 않다.
일본의 해킹?
역으로 유키 짱이 오늘 입은 팬티 색깔을 알아내리라.
그게 와이츠다.
사소한 인력손실도 용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손실이 발생한다면 정말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뿐이다.
지금처럼 ‘막장’들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없다.
필요하다면 없는 증거도 만들어내서 용의자를 사형 아니면 추방하는 ‘화끈한 판사’가 용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기에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다.
재물, 권력, 인맥, 평판, 후환 등의 사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도 없다.
쓸모없는 원숭이는 소거(消去)!
단지 그뿐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용신(龍神)의 저의(底意)를 파악하려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그래.”
“...한무일 형님.”
“왜?”
“또 오실 겁니까?”
카르 4세는 걸음을 멈췄다.
또 온다면 그때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뽑는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다음에는 네가 와라. 생일파티에 와줄 사람이 적어서 걱정이거든.”
“...알겠습니다.”
“잊지 말고 선물 사와라.”
이걸로 된 거겠지.
무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유지수가 수제폭탄의 제조자란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렇다면 굳이 올 이유가 있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꼭 필요했다고 카르 4세는 호언장담할 수 있다.
녀석은 얼굴만 잘난 게 아니다.
괴수의 공격으로 다정한 일가족, 유능한 직원, 중요한 설비, 그 모든 걸 다 잃고 밑바닥부터 다시 일궈낸 능력자다.
그게 11살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정말 터무니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와이츠 앞에서는 무의미하지.’
세상의 모든 천재가 와이츠 앞에서는 둔재로 추락한다.
과정보다 결론에 먼저 도달하는 그 지혜랑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천재들은 용신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던가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며 자살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이츠를 번거롭게 했다!
자취를 감추고 유리한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업적이라고 칭송할 만하다.
막 공장을 나설 때였다.
『누나는 내 여자라고~♪ 장모도 내 여자라고~♬』
발을 떼기 무섭게 스마트폰이 울었다.
선지혜가 주인 몰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음악으로 바꿔놓은 모양이다.
받아보니….
(선배. 남자랑 무슨 대화를 그렇게 오래 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만. 내 몸속에 추적기라도 심어뒀어? 선지혜 양?)
(첩보위성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몰랐어?)
(국민의 세금을 모욕하지 마!)
선지혜랑 대화하면 차분했던 마음도 활화산처럼 터진다.
무슨 여자가 사람 울화통 터질 얘기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만, 와이츠의 미녀 취향을 의심 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직후,
특공대장이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간혹 보여주는 이 진지함 때문에 카르 4세는 그녀의 연락을 무시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강남으로 와줘.)
(...무슨 일입니까?)
(설명은 근처에서 대기 중인 운전기사가 해줄 거야.)
24세기에는 웬만한 괴수보다 빠른 최신형 스포츠카, 나브랑모스 레비터를 모는 택시운전기사가 흔하게 있는 모양이다.
그 24세기에 사는 한무일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지금쯤 동네 순찰 중일 헌병대원 문세웅이 김포시까지 와서 그에게 손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이란?
초짜 사냥꾼이 처녀전(處女戰)을 치르러 갈 때랑 판박이였다.
(흠. 소규모 국지전인가.)
(선배는 정말 재미없는 남자인걸. 찍어서 맞추는 건 적당히 해. 못 맞출 때마다 선지혜가 옷을 벗는 벌칙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건 누구를 위한 게임?! 농담이지?!)
벌칙게임의 규칙이 뭔가 심각하게 어긋났다.
와이츠 계약자가 발가벗으면 대한민국은 용신의 분노로 초토화된다!
누가 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몸을 누군가 봤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진심인데. 구석구석 또 보여줄까?)
(...안 당해. 여기서 긍정하면 바로 책임지라고 할 거잖아.)
(응. 하지만 진심인걸. 정말로 홀딱 벗었었어.)
(꿈속에서 스트립쇼 수고. 끊는다.)
서울 강남구가 대한민국의 패션, 교육, 문화의 중심지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옛날 옛적에는 이랬는데….’ 같은 설명은 서울 토박이 고대인들의 넋두리고, 현재는 서민 아래의 빈민층 보금자리가 된 지 오래다.
그렇게 된 계기는 200년도 더 된 강남의 고층빌딩에 있었다.
과거, 22세기 전후까지만 해도 현대적인 디자인의 최신건물로 들어찬 강남구였으나 현재의 기술로 보면 지나치게 낙후된 주상복합아파트가 밀집된 지역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괴수의 등장으로 철거할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당장 비바람 피할 주거지도 부족한 상황에서 고층아파트를 무너트리고 재건축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탓이다.
그렇게 미루고 미룬 세월이 자그마치 100년.
와이츠가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불도저로 밀어버릴 지역이기도 했다.
“선배님! 강남에서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 [7장-3] 이 길이 오지랖일지라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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