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7화 (27/287)

< [6장-4] 5평짜리 단칸방 >

문세웅처럼 그를 ‘선배’라고 부르지만 ‘연하’냐고 묻는다면 ‘연상’이다. 그리고 남자가 아닌 여자였으며 목소리는 살벌하다.

원인?

그녀의 지적처럼 윤소영의 숨소리 때문이다.

호기심 왕성한 소녀가 무일의 등에 바짝 몸을 붙인 채 통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신이시여….

본능과 이성을 넘나들며 아랫도리가 바짝 섰다고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집입니다. 특공대장님.)

방금까지 윤소영이 ‘애인’ 운운하며 의심했던 당사자였다.

이게 노린 거라면 정말 최적의 타이밍이다.

감시카메라가 집안에 몰래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해봤었지만 없었다. 그러니 이건 그냥 운이 더럽게 없었다는 뜻이다.

(잠깐! 집인데 내게 존댓말? 정말로 옆에 누구야? 아니, 기다려봐. 이 귀여운 척하며 소곤거리는 숨소리는 무척 귀에 익은데….)

(누가 귀여운 척했다는 거예요! 언니!)

삑 소리 지른 윤소영은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선지혜가 생글생글(이글이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라~☆ 소영이였네.)

(어멋?!)

(청순한 소녀의 뒷면은 엉큼한 여중생~☆)

(아니에욧!!)

심리전으로 이 여자를 당해낼 순 없다.

특공대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용신 와이츠의 계약자’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윤소영은 중학생.

상대의 생각과 의도를 [예측]하고 [예감]해서 빠르게 읽어내는 프로사냥꾼쯤 되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용신의 초대 계약자는 그녀의 친어머니.

그리고 2대가 바로 그녀, ‘선지혜’였다.

‘지혜(知慧)’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여자로 태어나자마자 모친으로부터 ‘계약’을 물려받았다.

그 독특한 계약방식 때문에 ‘최연소 8종 계약자’란 신기록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고귀한 혈통’이 실존한다면 그녀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특공대장님.)

(당신 아기가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몰라서….)

(장난치지 마!)

(진짠데? 꿈속에서.)

(당장 취소해! 이 마을을 통째로 불태울 생각이 아니라면!)

역시나 이 여자는 구제불능이다! 곁에 위험한 계약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 태연히 거짓말하다니!

그게 순진한 소녀에게는 치명타였던 모양이다.

상상력의 임계점을 돌파한 윤소영은 얼굴 한가득 홍조를 띠며 그대로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르르르….”

어느새 창문에는 레드군의 얼굴이 투영되어 있었다.

방음벽을 뚫고 옆집에서 ‘용이다! 사람 살려!’를 외쳐대는 소리마저 들렸다.

저렇게 괴수를 자극하는 행동이 생존 가능성을 큰 폭으로 단축한다는 걸 어째서 아무도 안 가르쳐준 걸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 가능성이 줄어든 건 카르 4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말 전화 한 통 받은 죄로 죽게 생겼다.

(너무 뭐라고 하진 마. 선배가 없는 특공대가 너무너무 심심해서 장난쳐본 거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걱정해도 돼. 화난 레드군이 코앞에 있어.)

(응. 힘내.)

정말로 소유물 취급입니까.

못 가질 바에 바짝 태워서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심상 같다.

레드군은 사냥꾼이 분투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선배가 내 돈 떼먹고 일본으로 도피해버리면 어쩌나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걱정했는걸~☆)

(안 떼먹어! 후배의 돈을 떼먹고 희희낙락할 정도로 난 타락하지 않았어!)

문세웅에게는 ‘용사’가 어쩌고 했지만 결국은 ‘돈’ 문제였다.

이 세상의 수많은 가정을 파괴한 원인은 돈이고, 화기애애한 잉꼬부부를 갈라놓는 것도 돈이며, 누군가에게 굽실거리며 잡혀 사는 것도 돈 때문이다.

선지혜의 자살 협박이 지나치게 막강하긴 하지만 ‘돈’도 무시할 순 없다. 이건 ‘양심’이 걸린 문제인 탓이다.

악연의 시작을 묻는다면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르세리안 레이소』

싸게 살 수 있다는 ‘특공대 후배’의 말에 혹해서 90억을 빌린 게 화근이었다.

의심?

당시에는 신뢰가 무척 두터웠다.

총을 쏘는 건 고사하고 쥐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실패자 신지혜’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준 ‘어린 선배’가 한무일이었다.

그래서 동침, 동거 같은 낯뜨거운 농담(이때까지 농담인 줄 알았다.)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던 것도 사실이다.

90억?

소시민에게는 매우 큰 돈이 분명하다.

하지만 와이츠의 인구이전계획의 핵심인 파주시의 ‘대지주’인 그녀에게는 푼돈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선뜻 손을 내밀은 거였는데….

제대로 코 꿰였다!

청혼을 거절했을 때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무일 선배.’라고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녀의 원한(怨恨)은 무섭다.

(응. 선배는 착하니까.)

(......)

(결혼하면 90억뿐 아니라 선지혜의 모든 게 선배 소유가 되는데 갚으려고 너무 애쓰는 거 아니야? 기분 나빠.)

그렇다. 못 갚으면 데릴사위로 끌려갈 판이다.

눈물 나게 고마운 협박이지만, 한국은 ‘8종 수호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

그 생각과 각오는 변함없다.

(미안. 절대로 싫어서는 아니야.)

(응. 알아. 선배는 누구에게나 착한 용사님인걸.)

(......)

세상에서는 그걸 박애주의자라고 한다.

하지만 선지혜는 ‘착한 용사님’이라고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냥 감상 그대로 말한 것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되새김해보는 것이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나를 마음껏 더럽혀놓고 무책임하게 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줄 알고 걱정했어.)

(네가 못 가게 막았잖아!)

무쌍한 ‘바람의 여왕’이란 수단을 이용해서!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초대 와이츠 계약자’와 여전히 현역인 ‘엘로엘 계약자’가 친자매보다도 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

여전히 숫처녀인 바람의 여왕 박선영에게, 조카보다 더 조카 같은 ‘친우의 딸’ 부탁을 못 들어줄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특공대장인 선지혜가 그 권한을 이용해서 간호사에게 심부름시켜 통화해도 됐었다.

그런데 굳이 ‘8종 계약자’를 끌어들인 이유는 명확했다.

무력시위!

떠나려고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서 ‘일본으로 가겠어!’라고 했다면 이 5평짜리 단칸방 대신 어딘가의 독방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눈 딱 감고 결혼했어야 했나?

가끔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 결정을 반복할 것 같진 않다.

선지혜는 8종 계약자.

그 영롱한 보석을 독점한다는 건 너무나 이기적인 발상이다. 와이츠가 떠나고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대한민국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걸~☆)

어린 윤소영보다 더 어린애 같은 말투.

하지만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특공대장 선지혜의 주민등록번호에는 늘 ‘죽고 싶어?’ 같은 동문서답만 쓰인 블랙박스지만, 무일보다 연상이란 건 확실하다.

평소에도 이런 태도냐고 묻는다면 그녀야말로 가증스럽다고 ‘피 토하는 심정’으로 지적해주고 싶은 무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고위인사가 전부 모인 ‘신임 특공대장 환영회’ 자리에서 그 주인공이,

『나랑 응응하고 싶은 오빠는 땠지 해줄게~☆』

...라고 깜찍하게 말했을 리 없잖은가?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살벌하게! 듣고 있던 모든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가랑이를 바짝 오므렸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위협’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매력적인 자신을 걷어찬 선배를 향한 앙갚음이란 건 변명이고 그냥 괴롭히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합숙훈련 시절에 쌀쌀맞게 대하기도 했고….’

사정 봐주지 않고 막 굴렸던 것 같다.

울렸던 전적도 찾아보면 꽤 있다.

지난 은원으로 아주 천천히 말려 죽일 심상인 모양이다.

쓰러진 윤소영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보, 멍텅구리, 똥개 오빠.’ 등을 중얼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곤히 잠들었다.

소란을 일으켰던 레드군도 그새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다.

이 용왕님은 계약자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은 물론이고 계약자의 눈치조차 안 보는 여타 수호자들이랑 달리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그러니 윤소영이 떠난 후가 진짜 위기이리라.

어쩌면 이미 ‘카르 4세, 시한부 인생’ 초읽기에 돌입했을지도 모른다.

(쯧. 늘 그랬듯 또 뻔뻔하게 나오시겠다?)

(후배의 애교로 봐줘. 아잉~♪)

저 가증스러운 연상녀가!

스마트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은 카르 4세가 말했다.

(그래서 ‘정말’ 무슨 용무이십니까, 특공대장님.)

(대장이 하는 일은 늘 똑같아. 우수한 대원을 뽑는 거지. 질리지도 않느냐고 묻는다면 조금도 안 질려. 이 전화비도 아깝지 않고.)

(저보다 우수한 녀석이 한국에 많습니다.)

(이름 대봐.)

솔직히 무일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의 안위는 사냥꾼이 아니라 ‘계약자의 수호자’가 지키는 것이다. 사냥꾼은 뒤치다꺼리용이다.

피부관리, 스트레스 등의 문제로 항상 현장에 대기할 수 없는 계약자가 출동할 때까지 시간 끄는 소모품이다.

의미?

당연히 있다.

이건 고급인력인 계약자가 할 수 없는 ‘잡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공대는 그렇지 않다.

원념(怨念).

괴수를 향한 무한한 적의가 골수까지 스며든 마초 집단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신병자나 살인귀라는 건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괴수를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을까?’란 생각으로 가득 차있을 뿐이다.

그들도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모든 괴수를 ‘점증적 가해자’로 보고, 가만히 풀 뜯고 있는 녀석들에게까지 목숨 걸고 시비 거는 ‘무의미한 싸움’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특공대야말로 진정한 사냥꾼.

나머지는 약초꾼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잘 찾아보면 저보다 우수한 녀석이 있습니다.)

(없어.)

단정하는 신지혜.

카르 4세도 아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뛰어난 친구들이 해외로, 저승으로 전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특공대장님과 와이츠가 자초한 일 아닙니까.)

(아니라고 발뺌하면 추하려나?)

(몇 번은 아니라고 튕겨주시지 않으면 역으로 화납니다만.)

(화해의 뜻으로 아기 만들어줘?)

(싫어! 누굴 죽이려고!)

와이츠가 돌아온다.

그 사실을 ‘계약자’ 당사자에게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쥔 무일의 앙그류 그랑모리에 힘이 꽉 들어갔다.

대한민국은 와이츠를 부르짖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길 갈망하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어떻게든 그 여론을 잠재워보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보지만 한 번 급물살을 탄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과오(過誤)를 저질렀다.

와이츠가 돌아오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민주주의는 이번에야말로 종식될 것이다.

500년 가까이 유지되던 헌법 제1조가 바뀌고 ‘위험한 자유’와 ‘놀라운 평등’이 마침내 그 폐막을 알리리라!

(선배.)

(...왜?)

(내가 늘 말했지만, 한무일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야.)

(나도 늘 말했지. 싫다고. 나는 무의미한 일에 목숨 걸고 싶지 않아. 아무 잘못 없는 괴수의 은색 피를 뒤집어쓰고 으스대기 싫다고.)

(지금의 특공대라면 선배의 입맛대로 고칠 수 있을걸?)

(너…!)

용신 와이츠의 2대 계약자, 신지혜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카르 4세로서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건 [예감]과 [예측]의 범주를 넘어선 아득히 먼 미래였으니까.

하지만 아름다운 계약자가 무언가를 소망했고 수호자 와이츠가 거기에 호응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난 무슨 역할이지?’

거대한 흐름에 쓸려가는 조연?

아니면 주도하는 주연?

그 무엇이 됐든 거스르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배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많아. 특히, 강력한 계약자로 구성된 범죄조직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야.)

(그래서?)

(선배가 맡아줬으면 좋겠는걸.)

(나보고 그 범죄자 아가씨들 앞에 무릎 꿇고 설득하라고?)

(내 해답이 필요한 질문이려나~☆)

카르 4세는 그의 이불을 번데기처럼 돌돌 말고 잠든 윤소영을 내려다봤다.

끌려가는 상황 자체는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어린 소녀에게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건 더욱 성미에 안 맞는다.

어린이로 구성된 지구방위대?

고대인들은 정말 터무니없는 만화영화를 무책임하게 찍어냈다.

어른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27살 ‘소년’이 말했다.

(좋아. 뭐부터 시작할까?)

< [6장-4] 5평짜리 단칸방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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