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6화 (26/287)

< [6장-3] 5평짜리 단칸방 >

4종 수호자도 쓰러트릴 수 있다고 으스대던 ‘카르 4세’는 어디 가고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27세 숫총각만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 쓰러트릴 수 있는 괴수는 3종까지.

과학으로 어찌할 수 있는 괴수는 6종까지.

하지만 레드군은 명실공히 7종 괴수.

RPG 게임으로 치면?

카르 4세가 그 아무리 뛰어난 최신장비로 완전무장하더라도 100번 싸워 100번 질 수밖에 없는 ‘이벤트 보스’다.

아이템과 레벨만 높으면 언젠가 쓰러트릴 수 있는 ‘최종 보스’ 격인 로니콘이랑은 아예 근본부터 다른 존재!

“선배?! 저도 아직 모르는 집 비밀번호를 저 아가씨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너도 사냥꾼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눈치채라!”

사냥꾼의 [예측]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명백한 위기상황.

사냥꾼의 생존본능이 가장 왕성한 시기다.

문세웅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동거녀!”

“틀렸어! 너도 정찬호 못지 않게 상상력이 글러 먹었어!”

신출내기 1급 사냥꾼에게 제대로 된 [예측]을 기대한 선배가 바보다.

상황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달렸다.

불붙은 짚단을 짊어지고 달려도 지금보다는 안전할 것 같다.

“그럼 이 상황을 뭐라고 합니까. 불륜?”

“야!”

함께 음담패설을 떠들며 사나이의 우정을 과시하던 두 사내는 ‘예상치 못한 침입자’로 인해 혼비백산하며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7종 계약자 윤소영은 날치 괴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 ‘구국의 영웅’에 어울리지 않은 앳된 표정은 짓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머! 남자란 이런 생물이었군요?

좋은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단편적인 일면만 보고 판단한 편견이 상식처럼 자리매김하는 중이었다.

“거기, 문세웅 씨.”

“에? 저요? 네! 말씀하십시오! 사모님!”

어느샌가 동거녀에서 사모님까지 격상한 윤소영이었다.

카르 4세는, 저 생각 없이 나불대는 후배의 주둥이를 어떤 각도로 베면 사상자 없이 끝낼 수 있을지 진지하게 가름해보기 시작했다.

하필 헌병대장이 아비일 게 뭐람.

정당방위가 성립하더라도 빠져나오기 힘들다.

“사, 사모님은 아직…. 아, 아무튼! 제가 팍팍한 방송일정을 쪼개가며 찾아온 건 당신, 문세웅 씨 때문이에요.”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씀해주시면 즉시 바로잡겠습니다!”

정자세를 하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미청년.

계약자랑 마주한 사냥꾼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고양이 앞의 생쥐!

뱀 앞의 개구리!

하물며 문세웅은 1급 사냥꾼. 프로사냥꾼인 카르 4세처럼 ‘3종 이하의 계약자’쯤은 대놓고 쳐다봐도 무탈한 수준에 못 도달한 초짜다.

그리고 상대는 7종 계약자 윤소영.

대한민국에서 자랑하는 ‘최연소 7종 계약자’이자 영웅이었으며, 카르 4세도 벌벌 떨 수밖에 없는 레드군의 보호를 받는 극상의 미소녀였다.

헌병대장의 아들?

훌륭한 조상님들을 다 긁어와도 이 상황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

“이 좁은 집에서 남자 둘이 사는 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짐 싸들고 나가겠습니다, 사모님!”

그럼 나는 어디서 살라고?

같은 무의미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목숨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문제쯤은 헌병대장이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아니면 이 집보다 비싼 그의 애마(愛馬) ‘나브랑모스 레비터’에서 자도 된다.

하지만 순수한(?) 소녀 윤소영의 ‘친절’은 그런 해결책마저 원천봉쇄 했다.

“그럼 제가 나쁜 여자가 되잖아요.”

“아닙니다!”

“괜찮다고 해놓고 뒤에서 나쁜 년이라고 욕할 거 다 알아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눈앞의 소녀는 볼트윙 테러로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지켜낸 영웅이다.

따져보면 7종 수호자 레드군이 지켜낸 거지만, 그 수호자에게 ‘날치를 잡아줘!’라고 부탁한 건 계약자 윤소영이다.

아름다운 영웅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이곳 파출소에 양해 좀 구해놨어요. 창문이 없어서 조금 답답하지만 혼자 쓰기에는 안성맞춤인 빈방이 여럿 있데요.”

머리를 부여잡은 무일은 마음속으로 ‘맙소사!’를 연발했다.

파출소에 빈방이라면 감옥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창문이 없다면 독방!

프로사냥꾼보다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청년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매우 오묘한 표정이 됐다.

그 심정 이해해.

카르 4세는 후배의 ‘죄 많은 주둥이’를 베는 건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냥 벨까?

레드군의 인내심을 믿기에는 여러모로 불안했다.

하지만 무일이 갈등하는 사이에 이미 청년은 침낭에 잡다한 짐을 욱여넣고 잽싸게 떠나버린 후였다.

헌병대장의 둘째 아들 문세웅이 자랑하는 신형 스포츠카, 나브랑모스 레비터의 요란한 시동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파출소까지 보도로 3분 거리에 있는 까닭이다.

무시?

계약자의 ‘호의’를 무시해도 될 만큼 이 세상은 남자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의를 받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이건 문세웅이 한무일의 집을 나가준 것에 대한 보상.

그러니 성의를 보일 필요는 없지만 ‘호의를 감사히 받았다.’는 시늉 정도는 해줘야 했다.

‘녀석…. 한 달 정도는 독방에서 살겠군.’

그 뒤에 ‘파출소보다 괜찮은 집을 간신히 찾아서 옮겼습니다.’ 정도로, 계약자의 기분을 안 상하게 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야 한다.

하지만 당장 그러면 속이 뻔히 보인다.

법의 정점에 근접한 헌병대장 아들이, 하물며 죄도 짓지 않았는데 파출소 독방에서 한 달씩이나 머물러야만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瑤池鏡)’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지나치게 친절한 모습이 꼭, 저를 장애인 취급하는 것 같아요.”

“윤소영 양. 좋게 생각하십시오.”

“오빠도 마찬가지거든요?”

“그, 그렇습니까. 하, 하, 하….”

색마(色馬) 계약자 임보연의 원한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누구의 터치도 안 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너무나 착하게 자란(두 가지 의미로) 미소녀의 마음 씀씀이가 카르 4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본능에 충실한 [예감]은 조용했지만, 이성에 근간에 둔 [예측]이 뒤죽박죽이었다.

성질 급한 용왕님의 심중을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는 까닭이다.

“무일 오빠.”

“네.”

“지혜 언니랑 사귄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헛소문입니다.”

27세 동정남 한무일. 그리고 ‘용사지망생’이기도 한 카르 4세.

아리따운 처자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인 건 맞지만, 이 순간만큼은 딱 잘라 아니라고 단정했다.

특공대장 선지혜랑 사귄다고?

생일파티 때마다 친구놈들이 단골손님처럼 언급하는 농담이지만, 그건 정말로 놀려먹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에는 그 농담을 해줄 녀석이나 있을지….

친구란 녀석들이 죄다 외국으로 떠나버린 바람에 조금 불안했다. 일찍 가출한 탓에 가족이라고 부를 지인도 없는데 친구들마저 안 찾아오면 쓸쓸한 생일파티가 될 테니 말이다.

소녀는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무일 오빠!”

“네.”

“제 얼굴이 별로라고요?”

“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슈퍼맨’으로 통하는 전도유망한 카르 4세.

하지만,

앞으로는 안전한 시간과 장소에서도 말조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내일 뜨는 아침 해를 볼 수 있다면 말이다.

굳이 [예측]해볼 것도 없이 생명의 위기였다.

계약자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후배를 보며 혀를 찼지만, 결국은 사냥꾼이고 남자인 무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술을 귀엽게 삐죽 내민 윤소영이 말했다.

“됐어요. 벽창호 오빠가 그럼 그렇죠.”

“......”

아오! 어딘가에서 노려보고 있을 레드군만 아니면 바로 자빠-!

숫총각에게 벽창호란 폭언을 날린 미소녀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생명연장을 위해 꾹 참았다.

병문안까지 와준 윤소영(정찬호의 입은 깃털처럼 가볍다.)이랑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묻는 문세웅에게, 선배로서 겸허하게 ‘그렇게 예쁘진 않아.’라고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이번 일로 윤소영의 호감이 대폭 깎였을 것이다.

7종 계약자랑 거리를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일단, 그 다혈질 용왕님도 넘어가 준 모양이고….

“윤소영 양.”

“네. 오빠.”

“방송일정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정말 많다니까요!”

과장이나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문제라면 개인차.

평범한 방송인이나 연예인이랑 달리, 계약자인 그녀에게는 하루의 두세 시간 할애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바쁜 일정’에 속한다.

나머지 시간은 미용관리.

녹화방송 혹은 생방송으로 빼앗기는 시간은, 질풍노도 소녀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자유시간(하루에 6시간 이상!)의 일부분이리라.

역시 ‘젊음’이란 좋은 거다.

뱃살, 주름, 발육부진(이 소녀에게는 논외다.)에서 어느 정도 면제됐으니까.

윤소영은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남자가 잤던 곳에 저리 무방비하게 앉다니….

극악의 확률에 걸려 아기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윤소영 양의 방송은 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요?!”

소녀는 그 커다란 눈동자를 크게 떴다.

순수한 동양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조상님 중에 혼혈, 어쩌면 친부모 중에 ‘용들이 선호하는 백인’의 유전자가 있을 것 같다.

요즘처럼 혼혈이 많은 시대에 인종을 논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말이다.

아무튼, 과장되게 놀라는 윤소영.

카르 4세는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덧붙였다.

“...전부 봤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재방송도 많이 나오니까요.”

“역시 그렇죠…?”

“아! 어쩔 수 없이 봤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민얼굴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응원 고마워요, 오빠.”

영상매체가 아무리 발달해도 한계는 명확하다. 사진도 그렇지만 2D가 3D로 변하는 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실물로 볼 때보다 진한 화장으로 메이크업해야 텔레비전 평면상에서 ‘정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소영은 그런 한계마저 뛰어넘었다.

까다로운 용왕님이 선택한 계약자답게 성형미인과 화장에도 절대 꿀리지 않는 초절정 미소녀다.

‘아가씨! 비행기도 태워줬으니까, 슬슬 돌아가 줘!’

내뱉은 말은 솔직한 감상이었지만, 그래도 생존이 우선이었다.

레드군이 계속 ‘유키 짱의 판타이탄’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카르 4세는 죽어도 진즉 죽은 목숨이었다.

생각해보니 일본도 잠잠하군.

원래부터 연말이나 연초, 생일 때만 연락하던 ‘유키 짱’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최근 일들이 이래저래 신경 쓰였다.

따르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아니다.

이건 유키 짱이 애용하는 국제전화번호가 아니다.

여자인 건 맞지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이 상황을 노린 거다면 최고의 외통수였다.

“......”

“오빠. 누구에게 온 전화인데 안 받는 거예요? 설마! 전에 그 일본인 여자친구?! 맞죠? 그런 거죠! 정말로 여자친구인 거죠?!”

“아니야. 정말 아니야!”

정찬호의 가벼운 주둥이는 본부 강습반까지 흘러들어 간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윤소영이 보살(菩薩)처럼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저는 없다고 생각하고 어른들의 대화를 나누세요.”

“괜찮을 리가! 아니, 내 말은 이게 아니라!”

“어서 받아보세요.”

차분하게 ‘예의’를 유지하던 무일이 허둥댔다.

이건 도대체 무슨 종류의 재난입니까요, 태양신이시여!

윤소영의 ‘차분한 재촉’에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 무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전화를 받는 음성도 우울했다.

(여보세요.)

(...선배. 바로 코 닿는 거리에서 여자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지금 어디야? 술집, 노래방, 모텔. 당장 불어.)

< [6장-3] 5평짜리 단칸방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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