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1] 5평짜리 단칸방 >
[6장] 5평짜리 단칸방
학명: 와이츠(끝없이 현명한 용신)
서식지: 불명
특징: 가장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위험도: 8종 대형
비고: 공명정대한 관조자☆
***
한국의 피해는 막심했다.
그렇다고 당장 국제적인 약세를 보인 건 아니었다. 이미 세상은 경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국가 내의 도시마다 ‘시장’이란 지도자를 따로 둘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땅덩이가 작아서 ‘서울이 곧 한국’이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이 날치 한 마리로 풍비박산 났다. 그것도 수도권이 아닌 중심가에서 벌어진 대참사!
“말은 그런데 말이지….”
스마트폰으로 시시각각 올라오는 ‘특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어본 평상복의 16세 전후로 보이는 남자, 무일은 피식 웃었다.
오두방정 떨지만, 한국은 오늘도 멀쩡히 잘 굴러가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본인들이 죽거나 다치면 ‘조국의 우민’들을 슬기롭게 다스려줄 인재가 없으니 나라가 곧 망할 거로 굳게 믿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질적 피해?
막심한 건 맞다.
하지만 그 피해로 이득을 보는 사람도 분명 있다.
높은 빌딩을 짓고 승승장구하던 대기업(철옹성)이 무너진 덕분에 상대적으로 약한 중소기업의 숨통이 트였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이 세상은,
『누군가 불행해지면 어딘가의 누군가는 행복해진다.』
그것이 피해자(불행)와 가해자(행복)의 관계.
다만, 그 ‘불행’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극대화하는 학문이 ‘정치경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행복은 적고 불행은 많다.
거리에는 웃는 사람보다 우는 사람이 많고, 한강의 모든 다리는 ‘민간인의 자살기도’를 막고자 일시적으로 헌병대에 의해 봉쇄됐다.
하지만 아파트 옥상이나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까지 막을 순 없었다.
괴수가 있는 세상을 저주하며.
가족을 죽인 세상을 저주하며.
그 탓에, 평소에는 가십거리쯤 되던 자살 소식이 ‘오늘은 몇 명이 자살했습니다.’ 정도로 크게 일축됐다.
겨우 몇 명뿐일까?
사냥꾼 사망과 실종은 아예 머릿수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시시각각으로 늘어나는 탓에 이대로 가다가는 본부에 남자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여기까지가 한 달 동안 있었던 일.
카르 4세가 퇴원하고 일주일 동안 본 한국이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평화롭네.’
여의도는 연일 시위와 집회로 조용할 날이 없지만, 무일의 임대주택이 있는 수도권은 예전이랑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괴수의 준동을 경계하며 수시로 순찰 중인 경비대와 수색대 덕분에 이전보다 살기 좋아진 편이었다.
참고로 ‘꿀 보직’ 혹은 ‘세금 약탈자’로 불리던 헌병대는 현재 죽을 맛이었다.
원래는 카르 4세도 경비대 겸 헌병대로서 이 일에 동참해야 맞으나, 그는 퇴원하자마자 신청도 안 한 장기휴가 통보를 받고 자택인 5평짜리 단칸방에서 근신 중이었다.
명목은 일단 포상이다.
볼트윙을 쓰러트린 ‘숨은 영웅’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파고들면 생각보다 심각하면서도 단순하다.
프로사냥꾼들의 대규모 이탈!
실망스러운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떠나는 그들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이다.
『잘 지내고 있어? 지금, 난 러시아야. 진짜 추워!』
『하하! 또 연락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오늘부터 난 미국인이다.』
『여, 카르 4세! 중국에 짜장면이 없다는 거 알아?』
『영국의 왕녀님은 지키는 보람이 있다! 카르 4세! 너도 와라!』
『밀항선을 탔는데 이집트까지 앞으로 한 달이란다. 미쳐!』
친구 녀석들이 해외에서 보낸 문자가 오늘도 쌓여있었다.
평소에는 전화 한 통 없던 녀석들이었는데, 외국에서 적응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부분이었다.
제3 외국어로 여전히 한국어가 손꼽히고 있지만, 타국의 언어와 문화가 사방에 넘쳐나니 익숙해질 때까지는 한동안 고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이 태어난 대한민국이 ‘가장 살기 좋은 땅’이란 믿음이 깨지면서 프로사냥꾼들은 오늘도 이민(망명)을 선택하고 있었다.
‘좋은 곳 많네….’
일본만 사냥꾼의 대우가 좋은 게 아니었다. 물론, 일본이 수많은 나라 중에서도 사냥꾼들을 위한 특혜라고 부를 수 있는 정책이 많았지만.
몰라서 그렇지 세상에는 한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많았다.
용신 와이츠가 정치경제를 간섭하고 다스리던 한국은 컴퓨터처럼 정밀하게 움직였으나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복지가 시원찮다!』
이건 용이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다.
종족의 차이.
인간이 컴퓨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거랑 마찬가지다.
자원을 채집하는 일꾼들에게 휴식시간을 주고, 병사들에게 임무교대 및 정기휴가를 보내주는 게이머는 없잖은가?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
나쁘게 말하면 지독한 독재자!
하루하루 목숨 걸고 생활하는 사냥꾼들로부터 세금을 왕창 걷어 국가발전에 쓰는 와이츠의 정책은 소소한 불평불만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잘 먹혔었다.
왜?
그래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조국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재는?
공명정대한 용신 와이츠가 없는 한국은, 사냥꾼 복지도 안 좋고 대우도 최악이며 세금도 많이 걷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즉,
‘점점 약소국으로 향하는군.’
와이츠가 떠난 시점부터 정책을 바꿨어야 했다. 그런데 ‘국가관리인(와이츠)에게만 좋은 정책’은 그대로 놔둔 채 상황만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다.
친구들을 책망할 게 아니다.
이민과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특히, 사망자의 급증이 가장 큰 원인이다.
6종 괴수 볼트윙의 준동으로 날뛰기 시작한 하위 괴수들을 막는다고 너무나 많은 프로사냥꾼이 허망하게 죽었다.
어디 그뿐이랴?
『민간인 폭행사건』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고 프로사냥꾼에게 다짜고짜 주먹질한 민간인이 혼수상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프로사냥꾼답게 [예감]으로 피하고 본능으로 [반격]한 결과였다.
괴수를 상대로 쓰는 기술을 무의식적으로 민간인에게 썼으니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리라.
전례대로라면 ‘무죄’ 내지는 ‘근신’ 판결이 났어야 했다.
인간의 복지에 무관심한 이상으로 ‘공명정대한 재판’을 전부 주도하던 와이츠가 ‘멍청한 민간인’과 ‘쓸모가 많은 사냥꾼’ 중에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지는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감성보다 이성.
하지만 그 공명정대함이 무너졌다.
평화로운 촛불집회마저 ‘업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해서 빠르게 해산시키고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도록 지시 내리던 냉정한 와이츠.
그 용신이 없기에 이성보다 감성이 앞섰고 법규보다 정치가 우선시됐다.
“이러다 혼자 남겠는데.”
씁쓸했다.
외국으로 떠나지 못한 무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엎어졌다.
국민들의 우매함에 치가 떨렸다.
그들이 하루의 반절 이상을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즐거운 판타지’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다 프로사냥꾼들 덕분이다.
계약자가 세금을 낼 것 같은가?
서울 시민들이 현실에서 일은 조금만 하고 가상현실에 충실할 수 있었던 복지정책은 모두 사냥꾼들이 내는 어마어마한 양의 세금으로 충당해오고 있었다.
그런 사냥꾼들의 정점에 있는 프로사냥꾼들.
수탈에 가까운 세금을 묵묵히 감내해오던 그들이 빠져버리면 가상현실게임을 마음껏 할 수 없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조삼모사(朝三暮四) 원숭이들도 이보다는 똑똑할 것 같다.
하지만 곧 실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게임을 접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와이츠의 공백이 너무 큰걸.’
와이츠가 대한민국을 떠난 이유는 간단하다.
계약 파기.
11년 전까지만 해도 8종 계약자였던 ‘선지혜’는 현재 특공대장으로 부임해있다. 어째서 계약이 파기됐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카르 4세가 아프게 했어요!
...라는 선지혜 당사자의 주장은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는다.
무일이 특공대에 있을 때는 그의 직속후배였고 현재는 직장상사란 위치에 있다.
절대로 불건전한 관계가 아니다.
딩동!
당연히 울릴 리 없어야 정상인 초인종이 느슨해져 있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무일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최신 뉴스를 검색하던 손을 멈췄다.
“누구지?”
또 7종 계약자 윤소영이 울적하다며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곧바로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그 미소녀라면 집주인이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집 비밀번호를 누르는 쪽을 택할 테니 말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카르 4세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손에 쥐고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보인 건,
당연하게도 역시나 남자였다.
예쁜 처자일 리 없지.
아는 남자냐고 묻는다면, 아는 미청년이었다.
“선배님!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자, 잠깐! 무슨 일인데?!”
헌병대장의 둘째 아들, 문세웅은 씩씩하게 외치며 선배의 5평짜리 집에 다짜고짜 방문했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침낭을 일인용 침대 옆에 쭉 펴고 누웠다.
기가 막힌 무일은 뭐라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10초 만에 숙면에 빠진 청년이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깨울까?
그만두기로 했다.
술을 마신 것 같진 않지만, 매우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던 까닭이다.
‘녀석도 헌병대는 헌병대라는 건가?’
서울외곽순환도로를 스포츠카로 쌩쌩 모는 게 일인 ‘신이 내린 보직’을 갖고 있던 헌병대장 아드님에게도 액운이 닥친 모양이다.
괴수의 준동은 잠잠해졌지만, 수도권의 경계령은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 탓이다.
슬슬 완화할 때도 됐건만….
성난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웬만한 요구(본인들에게 해가 없는)는 전부 수용해주기 바쁜 ‘높으신 공무원’들 때문에 아랫사람들만 죽어나는 것이다.
고된 업무랑 인연이 없던 헌병대원 문세웅.
한 달이면 나태한 도련님치고 아주 오래 버틴 거다.
“뭐…. 한숨 자고 일어나면 가겠지.”
라고 태평하게 생각했던 무일은 하루도 안 돼서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다.
고된 업무에 지쳐 잠시 휴식?
그건 이 녀석과 ‘이 녀석의 부친’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헌병대장이 ‘읽고 나서 없애게!’라는 추신이 달린 쪽지를, 그의 아들 문세웅에게 받아서 읽은 직후에야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대충 그렇게 된 겁니다, 선배님.”
“사람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 걸까…?”
권력남용의 일면을 보고야 말았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무일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냥꾼들은 목숨 걸고 서울을 수호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빼다니!
아니, 후방이라고 하기에는 여긴 위험한 수도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이게 헌병대장 문장춘의 노림수였을 것이다.
그의 아들 문세웅이 말했다.
“타락보다는 아들 사랑과 보호가 극심한 팔불출 아버지죠. 애도 아니고.”
“바로 네 아버지다만?”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
일이 위험해서 아들을 후방으로 뺐는데 거기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헌병대장은 ‘카르 4세’가 사는 단지의 관리직으로 아들 문세웅의 보직을 변경했다. 그건 대원의 인사까지 담당하는 대장에게 매우 손쉬운 일이다.
문제라면….
빈방이 없다는 것!
본부 소유의 임대주택도 전부 민간에 넘어간 상태였다.
고층빌딩은 예외 없이 이번 ‘볼트윙 테러’로 말미암아 집값이 똥 됐다. 그리고 너도나도 수도권의 저층건물로 짐 싸들고 이사 가는 추세.
인구가 과포화 상태였던 도심이 인기 많았던 이유는 안전, 그 하나뿐이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그 대전제가 무너지며 벌어진 기현상이었다.
‘덕분에 나도 돈 좀 만질 수 있었지만.’
플라돈이 무너트린 집터를 팔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무너진 집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싸게 땅을 되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불행은 나의 행복.
그건 무일에게도 직간접적으로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러니 선배님. 한동안 신세 좀 지겠습니다.”
문세웅은 제법 싹싹한 면이 있었다. 그 당사자가 게으르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라고 할 수 있겠다.
부모를 향한 반항심리, 청개구리 심보라고 할까!
친형처럼 열심히 일하다가 ‘개죽음’당하지 말라는 헌병대장 문장춘의 지시를 어기고 상당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만,
맡은 업무가 헐렁할 뿐이다.
그랬는데 최근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가면서 ‘꿀 보직’이 ‘위험한 보직’으로 변했다. 그리고 문세웅은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그의 자랑스러운 형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자랑스럽게 전사한 아들보다, 망나니라도 살아 있는 아들이길 원한다.
아들이 정말로 망나니라면 ‘그렇게 살 거면 나가 뒤져라!’라는 식으로 마음이 또 달라질 테지만, 아무튼 그랬다.
“...스포츠카를 몰 때보다 들뜬 것 같네.”
“그렇게 보입니까?”
“응. 눈에 띄게.”
“하하! 제대로 보셨습니다, 선배님! 이제 좀 사는 것 같다니까요! 요즘 세상에 85대손이니 외동아들이니 하면서 오냐오냐 자라는 사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여자들이 남자를 종마 취급하며 얕잡아보는 겁니다!”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거든?
잘못된 가치관을 지적해 줄까, 무일은 생각만 하고 말았다.
계약자는 여자의 편이 아니고, 여자도 계약자를 우군이고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남성, 여성 외의 ‘제3의 성별’로 본다.』
생리적인 구조상 같은 여성일 뿐, 세상의 시선과 대우, 생활방식 등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미소녀를 찬 천벌이 막 떨어진 것 같다.
남자랑 동거라니….
태양신에게 올린 기도가 하늘까지 닿지 않았던 걸까?
“올해 운세는 최악이군.”
“그보다 선배님! 선배님은 어째서 안 떠나신 겁니까?”
“나?”
“예, 한무일 선배님이요. 오라는 나라가 많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많았다?
농담이나 과장 없이, 정말 많았다!
카르 4세가 볼트윙을 추락시킨 위업을 모르는 사람은, 우습게도 그 주인공이랑 가장 가까이에 사는 한국인들뿐이었다.
이 세상은 옛날처럼 구닥다리 아날로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괴수의 준동으로 나라들은 물리적으로 격리됐지만, 인터넷과 가상현실은 여전히 건재하다 못해 무한한 발전을 이룩했고, 인공위성은 지하 벙커까지 투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물며 지상에서 벌어진 대참사.
소위 강대국,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예외 없이 전부 보았다.
소년의 터무니없는 [예감]과 [예측]을 말이다.
프로사냥꾼 카르 4세의 아찔한 [반격]의 기교(技巧)는 이미 ‘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섰다.
“많았는데 전부 거절했지.”
“바람의 마녀가 선배님을 데려가려던 ‘일본 여자친구’를 막았다면서요. 여자친구가 매우 섭섭해 했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그 마녀라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엘로엘의 계약자, 박선영의 다른 아명은 여왕이 아닌 ‘마녀’다. 어째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무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떻게 이 녀석이 그 사실을 아는 걸까. 유키 짱이 여자친구로 탈바꿈한 건 상당히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치였다.
“...입 가벼운 친구가 여기저기 소문냈군.”
“선배님은 모르시겠지만, 제가 좀 마당발입니다. 본부에서 저랑 안 친한 남자는 헌병대장뿐이죠.”
“그 사람이 네 아버지다만.”
“그렇다고 하더군요.”
“......”
“그래서, 왜 안 떠나신 겁니까?”
다 알고 온 모양이다.
문세웅의 눈빛은 ‘닮고 싶은 우상’을 보는….
남자가 그러니 기분 나쁘군.
“웃지 말고 들어봐.”
요즘에도 간혹 나오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는 ‘남자주인공’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가 무척 많았다.
물론,
현재는 인기 없다.
작품을 보면, ‘괴수에게 잡아먹힐 남자가 까불긴.’이란 생각이 절로 든 탓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대리만족’조차 안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무일은 그 ‘설정’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그래서 가출했다.
1세기 전의 고리타분한 고전소설에 나오는 대다수 ‘용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이랑 타협하라고 강요하는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았다.
나라가 마음에 안 든다고 등을 돌리는 ‘용사’는 없기 때문이다.
“선배. 구닥다리 고전파였습니까?”
“내 잘못이 아니야! 고대인들의 상상력이 훌륭한 거지!”
괴수가 없는 평화에 찌든 작가와 감독의 작품에는 낭만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전쟁과 살인, 폭력 등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역설한다는 건 요즘 가치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이다.
그런 작품을 썼다간?
다음날, 우르르 몰려온 ‘괴수에게 지인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몰매 맞고 도시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그 잘난 낭만을 찾아보라면서.
사형선고인 셈이다.
이단자를 처단하듯이.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선배님의 외모는 정말 안타깝네요. 품고 있는 철학이나 실력은 딱 아저씨인데.”
“그거 욕이지?”
“칭찬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요.”
“흥이다.”
심술 난 무일은 침대 위에 철퍼덕 누워서 좌우로 뒹굴었다.
그러고 있으니 ‘흉흉한 절단기’랑 어울리지 않는 그 또래(?)의 소년일 뿐이었다.
“선배.”
“왜?”
“조심하십시오.”
“그거야말로 왜? 계약자가 나를 노린데?”
“...미국에서 카르 4세를 ‘슈퍼맨’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군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정보인데.”
“정말이었어?!”
“찍어서 맞춘 선배가 더 놀랍습니다!”
문세웅의 설명에 의하면 ‘카르 4세의 저주받은 검의 5번째 희생자가 된 정치인’의 딸이 계약자라는 것이다.
이미 정찬호에게 한 번 들어서 아는 내용이다.
앙심을 계속 품고 있질 않길 바랐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멋대로 훔쳐간 도둑이 잘못 휘둘러 죽어 놓고 원주인 탓하는 건 너무나 불합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처사였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다.
어째서 그리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인 걸까?
그래서 무일은 앞뒤를 뒤집어 봤다.
부친이 죽어서 앙심을 품은 게 아니라, 앙심을 품은 계약자의 사주를 받은 부친이 죽어버렸다는 식으로.
앙심을 품은 계약자라….
‘최근에 하나 있군.’
< [6장-1] 5평짜리 단칸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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