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4] 날치 위에 서다. >
“소년이여. 언젠가 나의 세계로 와라. 멋진 승부가 될 테니.”
휴머노이드의 몸을 빌린 엑시온이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괴수는 미녀를 제외한 모든 인간 남성과 여성을 ‘털 없는 원숭이’로 안다는 당연한 상식이 간단히 무너졌다.
무서운 7종 괴수에게 찍힌 건가?!
바짝 쪼그라든 심장은 이제 말라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 충격적인 영상은 볼트윙이 추락하고 카르 4세가 빌딩에 처박히면서 끝났다.
“엑시온은 실패할 거라고 단정했어.”
“내 물리공식은 완벽했다. 확률에서 제외한 계산착오가 있었을 뿐. 인간 남자란 종은 개인능력 편차가 매우 크다는 걸 간과했다.”
“그래서 카레 짱을 높이 평가한데.”
“내가 틀린 적은 없었다.”
“몇 번 있었어.”
“음….”
계약자와 수호자의 정겨운 대화.
모든 미녀와 괴수의 관계가 다 저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윤소영과 레드군도 비슷하지 않을까.
무일은 눈썹을 찡그렸다.
‘어째서 이 순간에 그 어린 숙녀가 떠오른 걸까.’
마음이 점점 기울어서일지도 모른다. 한국을 좋아하는 소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다.
사냥꾼 따위가 떠난다고 슬퍼할까?
아무리 의지를 굳건히 한다고 해도 아리따운 아가씨가 옆에서 끊임없이 설득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도끼로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는 것처럼. 음?
그녀는 영상으로 설득력을 더했다.
카르 4세의 진가를 알아보는 일본 정부와 본부는 한국보다 그에게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해줄 거라고 말이다.
절대로 해코지하지 않을 거란 믿음을 심어준 것이다.
“야, 카르 4세. 좋잖아?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이 부탁하면 벌떡 충성해야지!”
“가만있어봐. 초식남 주제에.”
“캑! 애송이가 육식남 됐다고 뻐기기냐?!”
“친구를 구제불능 변태로 몰지 마.”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정찬호는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옆에서 ‘가라! 가라! 어서 가라!’를 부르짖고 있었다.
이럴 때는 [예감]도 도움이 안 됐다.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위기상황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그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괜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에쏘드.
남자로서 포기하기 힘든 괴수다.
유키 짱이 그 실체를 보여준 후부터 더했다.
그걸 노렸던 게 분명하다.
“유키 짱. 난-.”
“실례지만 참견 좀 하겠습니다, 유키나 미나미 양.”
병실 문을 열고 20대 중반의 남성이 들어왔다.
갑자기 난입해온 훼방꾼 때문에 유키 짱, 유키나 미나미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건 노골적으로 싫다고 쓰인 표정변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앉아서 지시만 내리는 자들을 혐오하는 시선이다.
그녀가 일본 본부에서 곧잘 짓는 얼굴.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박민혁 대리님…?”
플라돈의 습격으로 카르 4세의 집이 무너진 날, 보험문제로 10분 만에 파견 나온 샐러리맨이다.
겨우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충분히 수상했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간 옛일이고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는 어째서 그가 여기 있는 걸까?
괴수대응본부에 ‘괴수대응본부 민원과 대리’가 있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긴 민원과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의무대다.
‘무슨 용무지?’
민원과는 ‘볼트윙 테러’ 뒷수습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나라에 호소, 시위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고, 그걸 일일이 처리한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내 집 물어내라고.
내 여친(?) 살려내라고.
세금은 이럴 때 쓰라고 걷는 건 맞다.
국가는 세금을 걷는 대신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서울이 입은 피해는 ‘정부에서 전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걸 막는 게 ‘괴수대응본부 민원과’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사정하고 대신 욕 먹는 역할이다.
“나라가 힘들다고 떠나는 건 아니라고 봐. 무일 군.”
박민혁이 어디서부터 엿들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라가 힘드니 떠난다.’는 식의 차디찬 해석에 반박할 수 없었다.
정찬호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보다 다른 의미로 놀라는 중이었다.
‘민원과는 과로사 직전일 텐데, 대리는 너무 멀쩡한걸. 뭐지?’
하지만 초식남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름다운 7종 계약자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영혼이 이탈한 탓이다.
유키 짱은 눈썹을 찡그렸다.
정찬호의 생각처럼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도 대변한다면 ‘무섭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국민의 양심에 호소하는 ‘정치인’의 추한 일면을 봤다고 느낀 ‘유키나 미나미’가 카르 4세를 대신해서 그를 상대했다.
“당신은 누구야.”
“민원과 대리입니다.”
“내 본명을 알고 있는 자가 겨우 민원과 대리? 뭐, 좋아.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병문안 왔다가 우연히 엿들었다고?”
“맞습니다.”
7종 계약자에게 저렇게 막말해도 괜찮은지 걱정스럽다.
그녀의 수호자 판타이탄은 임신 빼고 전부 괜찮다고 했지만, 계약자의 이마에 주름이 생기도록 스트레스 주는 남자까지 봐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니면,
박민혁은 무언가 믿는 바가 있는 걸까?
무일은 일단 ‘유키나 미나미’란 이름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뻔뻔하네.”
잠자코 구경 중이던 판타이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숭이가 정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수호자가 언제 나설지를 재보는 분위기. 그래도 보통의 수호자보다는 확실히 신중한 태도였다.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 게 죄는 아니잖습니까, 미나미 양.”
“...친구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친구야.”
“무일 군의 행복은 한국에 있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박민혁 대리였다.
눈앞에 상대가 7종 계약자라는 걸 정말로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강경한 태도였다.
유키 짱은 언짢은 기분을 억눌렀다.
감정적으로 나가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탓이다. 무엇보다도 ‘카레 짱’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여태 내숭이었구나!
이런 판결문이 떨어지면 울고 싶어질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물었다.
“어째서 단정해, 예요?”
행복은 상대적이다.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라면 대답은 하나다.
본부 민원과 박민혁 대리는 일본보다 한국이, 프로사냥꾼 카르 4세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무일이 쓰고 있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공짜가 아닌 ‘빚의 산물’이다. 정부의 지원은 땡전 한 푼 안 들어가 있다.
그에 반해 일본은 ‘스콜레옹 포르소’를 무상으로 증여할 계획이다.
더 좋은 장비를 공짜로 준다.
이보다 더 극명한 차이가 또 있을 리 없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던 걸까?’
유키 짱은 정신적으로 이어진 수호자 판타이탄에게 물었다.
곧바로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용신 와이츠를 잃은 대한민국의 MID 보안기술이 일본에 뒤처지기 시작한 5년 전부터 그녀가 열람 못 하는 ‘한국 본부 자료’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 괴수대응본부에서 카르 4세에게 해준 건?
『없다.』
지나치게 깔끔해서 기만책을 의심했을 정도다.
하지만 아니란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나라들보다 계약자의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풍족한 대한민국은 예전부터 사냥꾼을 천대(賤待)하기로 악명높았다.
카르 4세가 아무런 혜택을 못 받는 것도 이 나라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계약자가 부족하면 사냥꾼의 대우가 올라간다.
하지만 아닐 경우는 대한민국 사냥꾼들처럼 ‘찬밥신세’가 된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프로사냥꾼은 있어도 ‘4급 사냥꾼’은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4종 괴수를 홀로 쓰러트릴 수 있는 프로사냥꾼.
이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면 웬만한 계약자보다도 더 좋은 대우를 약속받는다.
‘카레 짱은 4급 사냥꾼이 될 수 있어.’
장비가 시원찮아서 여태 빌빌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4종 괴수까지 부드럽게 베어내는 ‘스콜레옹 포르소’라면 카르 4세의 약점을 충분히 메꿔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건 의미가 없다.
그 대단한 4급 사냥꾼도 유키 짱이 구상 중인 청사진에 비하면 하찮다.
카레 짱은 ‘에쏘드 계약자’가 될 것이다.
공주님을 지켜주는 귀여운 용사님♥
그때, 박민혁이 그녀의 상상동화를 깼다.
“무일 군은 제가 점찍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를 뜨거운 시선으로 보는 남자!
유키 짱은 역병을 피하듯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이야! 싫어! 너, 뭐야?!”
“민원과 박민혁 대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얼굴만 보고 ‘유키나 미나미’란 걸 단번에 알아맞히기에 뭔가 한가락 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단순한 동성애자였던 모양이다.
무일도 너무나 예상 밖의 대답에 입만 벌리고 있었다.
카르 4세의 행복은 한국에 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게 너무나 불건전하다.
정비과 엄친아 정찬호는 애송이로만 봐왔던 친구의 교제등급(交際等級)을 상향조정 했다.
육식남 다음을 뭐라고 하지?
의무대 일인실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였다.
쾅!
병실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묘령의 여인.
박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는 체했다.
“고모님?”
“닥쳐주렴.”“네.”
뒤로 물러나 벽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가차 없는 한마디로 ‘늙은 조카’를 밀어낸 그녀는 유키 짱 앞에 섰다.
둘 다 대단한 동양미인이었지만 이목구비에서 ‘아! 얘는 딱 봐도 어느 나라 사람이네.’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한국인답게’ 그리고 ‘일본인답게’ 생겼다.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인 두 미녀.
먼저 입을 연 건 일본인, 유키 짱이었다.
“만나서 반가워, 예요. 엘로엘 계약자.”
그렇다.
이 한국인 여성이 ‘대한민국 최강자’다.
덤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3번째로 강한 계약자이기도 한다. 그건 3번째로 아름다운 자연미인(처녀)이란 해석도 된다.
후자는 개인의 취향이 있으니 근거가 많이 부족하지만, 7종 계약자 ‘유키 짱’ 이상의 농염한 미모를 뽐내는 절세가인임은 분명하다.
참고로, 한국의 국력(國力) 70%쯤 담당하고 있다.
최강자께서 말씀하셨다.
“너. 말투가 상~당히 거슬리거든? 그냥 편하게 말하렴.”
거슬린다기보다는 상당히 귀엽다.
이게 ‘외모보정’의 힘일 것이다.
하지만 남성 한정, 같은 절세가인에게는 효과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유키 짱이 물었다.
“반말해, 예요?”
“특별히 허락해주마.”
어깨 펴고 당당히 말하는 한국의 최강자.
자연히 좌우로 벌어진 밍크코트 앞섬 안쪽으로 거대한 덩어리 2개가 그 존재감을 과시하며 크게 흔들렸다.
코트 안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얇고 간편한 옷차림.
여성의 가슴과 허리, 다리 등의 요구조건을 너무 높게 설정했다고 비난을 샀던 ‘2323년(작년) 여름 신상복’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 같다.
미안, 유키 짱.
몸매로 따지면 이 ‘가짜 간호사’가 좀 꿀렸다.
그 일본산(?) 간호사가 악의(惡意) 한 점 묻어나지 않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의 연세가 100년쯤 높은데, 예요.”
“덤비렴! 오늘부터 한국과 일본은 전쟁이란다!”
나이를 들먹였다고 곧장 전쟁입니까요?!
하지만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그 진지한 눈빛은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정말로 ‘엘로엘 계약자’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계약자라서?
그뿐이라면 ‘레드군의 계약자’인 윤소영도 있다.
이 여인은 인류가 공증한 ‘최종병기’다.
와이츠가 ‘한국의 두뇌’라면 그녀의 수호자 엘로엘은 ‘한국의 힘’이었다.
【엘로엘 / 8종 특수】
언제, 어디에서나 계약자 곁에 머무는 괴수.
바람이 불 리 없는 병실에 미약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게 그 증거다.
엘로엘은 바람이고 바람은 엘로엘이기에 가능하다.
바람의 정령.
형체가 없어서 더욱 난해하기 짝이 없는 괴수.
와이츠가 떠난 대한민국의 남은 수명을 ‘엘로엘 계약자의 폐경 날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 정도로 그녀와 수호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유키 짱이 ‘전자파 공주’라면?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바람의 여왕’이었다.
공주가 아닌 여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녀 특유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스미마셍. 편하게 말할게.”
유키 짱은 즉시 사과했다.
웬만하면 맞받아쳐 주겠는데 저쪽은 ‘진심’이었던 까닭이다.
그건 광기(狂氣).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 싸움에서도 상대가 안 됐다.
“훌륭해. 나는 착한 아이가 좋더라.”
괴수를 자신처럼, 바람을 자신처럼 지배한다.
그야말로 여왕!
그녀는 괴수의 과보호 속에 사는 연약한 공주님이 아니다.
모든 엘로엘이 계약자에게 충실하고 순종적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엘로엘이랑 계약한 여인이 세계를 통틀어 그녀, 단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막강하기도 하다.
‘바람의 여왕’은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나라의 핵심인물도 질식사 혹은 압사시킬 수 있다고 전해진다.
바람은 막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공격만 절대적인 게 아니다.
인해전술, 총알, 생화학무기, 미사일 심지어 광선(光線)마저도! 그 어떤 공격도 그녀에게는 닿지 않는다.
형체가 없는 괴수, 엘로엘. 녀석은 ‘소형 괴수’보다도 확실하게 계약자랑 밀착 호위할 수 있어서 지형지물의 제약도 없다.
『박선영』
그런 무쌍의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여왕님의 이름.
프로사냥꾼 수백억 명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강자다.
한국의 사냥꾼들을 찬밥신세,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남자들로 전락시킨 일등공신을 꼽으라면 8종 계약자 박선영일 것이다.
유키 짱은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에 전쟁선포 하고 무책임하게 죽는다면 저승길이 뒤숭숭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말투만은 명랑했다.
“박 사마.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건데?”
시키는 대로 반말하자.
감정의 영향을 받은 여왕님의 칠흑빛 머리카락이 마법처럼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찰나로 그쳤다.
박선영은 도톰한 연붉은색 입술을 벌리며 도도하게 답했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듣기 좀 그렇지만 젊어진 기분으로 칠까나. 어머! 그러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친구의 딸이 부탁해서 왔단다.”
“선지혜 상이? 역시 연적(戀敵)….”
무시무시한 ‘바람의 여왕’에게는 친구가 단 한 명뿐이다.
8종 수호자 와이츠 계약자.
하지만 그건 반백 년도 더 된 옛말이고 친구는 은퇴했다. 하지만 우정은 여전했다. 그 증거로 ‘노처녀’인 여왕님이 친구의 딸을 애지중지하고 있다.
저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진짜 조카보다도 훨씬.
무서운 남자….
여자들에게 인기 많게 생겼는데 취향은 남자일 줄 몰랐다.
무일은 하루빨리 퇴원하고 싶어졌다.
“계집애가 맹랑하네.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소유물에 손을 대려 하다니.”
“카레 짱은 물건이 아니야!”
유키 짱이 빽 소리쳤다.
무일은 살짝 감동했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정말 고맙지만 무리하진 마.
눈앞에 여성은 그 자체가 ‘인간의 탈을 쓴 8종 괴수’나 다름없다. 인간 알기를 ‘털 없는 원숭이’보다 더 밑으로 보고 있다.
수천만 명의 목숨?
기분 나쁘면 그 자리에서 폭풍으로 날려버릴 위인이다.
“...당돌하기도 하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닐 텐데.”
박선영은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카르 4세는 불안감을 느꼈다.
바람의 여왕을 이긴다고?
판타이탄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 상대가 엘로엘이라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알려진 정보가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상성도 매우 안 좋다.
금속은 공기가 닿으면 산화하기 때문이다.
다른 계약자의 보조나 산화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이 탑재되지 않았다면 판타이탄은 엘로엘을 상대로 고철에 지나지 않는다.
레드군을 상대로 열에 강한 금속을 주성분으로 했듯 ‘준비’가 필요하다.
이게 프로사냥꾼 카르 4세의 [예측] 결과.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1초 안에 승패가 갈릴 것이다.
필패가 확실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일본의 7종 계약자가 야무지게 말했다. 이것만은 무일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랑의 힘이야!”
“정정. 그냥 바보구나!”
박선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그런 ‘멍청한 계집애’가 싫진 않다는 호의적인 눈빛으로 변했다.
테이블에 위에 다리 꼬고 요염하게 앉은 여왕님.
그녀의 방탄코트 호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스마트폰이 날아오더니 무일의 오른쪽 어깨와 귀밑 사이에 정확히 꼈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환자를 조금이라도 괴롭히고 싶은 모양이다.
스마트폰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내 순결을 강탈해간 오빠야?)
하지만 대사 자체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한무일 27세 동정남.
이 여자의 발언이 사실무근이라는데 태양신의 목숨(?)을 걸 수 있다. 처녀막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강탈하겠는가.
나는 결백하다!
카르 4세는 차분히 항의했다.
(실례지만, 그건 어느 나라의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남자입니까?)
(나랑 통화 중인 사람. 그날 많이 아팠어.)
(잘못 거셨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서 끊지도 못한다. 게다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박선영과 유키 짱 때문에라도 그럴 수 없었다.
이 둘은 결백을 믿어주는 눈치였지만 옆에 친구놈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이 자리에 없었으면 목을 졸라 질식사시킬 기세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녀석!
폭탄선언을 아무렇게나 던진 상대는 스마트폰 너머로 계속 말했다.
(몸은 좀 괜찮아?)
(...바로 옆의 친구에게 조만간 살해당할 것 같은 중환자에게 무슨 용무이십니까, 선지혜 특공대장님.)
(응. 이해했어. 위기에 빠졌다는 거네. 그 친구만 죽여주면 돼?)
(죽이지 마! 사고사로 위장시키거나 납치도 안 돼!)
농담이 안 통하는 여자다.
정찬호는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선지혜가 울먹이는(가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응.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려고.)
(혹시?)
(내 순결을 빼앗은 주제에 무책임하게 외국으로 튀면 바로 자살해버릴 거야. 무참히 짓밟힌 몸과 마음을 저주하며 지옥에서 먼저 기다릴게.)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백하다.
이젠 아무도 안 믿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 [5장-4] 날치 위에 서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