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3] 날치 위에 서다. >
“개념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바보였나.”
“모르지. 그리고 카르 4세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아?”
“아…….”
남의 칼을 멋대로 빼돌린 인간이 멋대로 죽어버렸다.
이걸로 5번째 희생자.
카르 4세의 손에서 8년 동안 잠잠했던 ‘저주받은 검’이 여전히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그건 여자친구 몸값 시세(時勢)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미신은 안 믿는데 좀 소름 돋더라.”
“강매로는 얼마였어?”
“10억.”
“...내가 기절한 틈에 10억 주고 튀었다가 뒤졌다는 거야?”
“그렇게 된 거지.”
“와! 제대로 물 먹었네! 10억? 지금 장난하나!”
“화내는 포인트가 그쪽이냐….”
정찬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반쯤 미라가 된 친구’를 쳐다봤다.
이렇게 돈 밝히는 녀석이 대한민국 열혈사나이들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TOP10’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 나라는 그렇게 인재가 없는 걸까?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하며, 정비과 에이스는 입구에 자리한 ‘축하화환’을 힐끔 봤다.
‘대단한 놈.’
전란을 방불케 하는 혼란기에 이런 걸 받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아니, 감탄스럽다.
남자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남자인 거냐, 네놈은.
특공대장이 유성팬으로 ‘사나이들의 뜨거운 우정’에 찬물을 끼얹긴 했지만, 그녀는 늘 그랬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카르 4세가 말했다.
“그래서 내 여자친구는 현재 얼마까지 떨어졌어?”
“듣고 놀라지 마라.”
“...마음의 준비는 됐다.”
“19억 8천만 원.”
“캑!? 뭐냐! 그 피자값을 연상케 하는 똥값은!”
분명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데 가볍게 무너졌다.
어제까지 37억이었던 ‘카르세리안 레이소’ 가격이 반 토막 났다. 그래도 ‘정가의 10%는 넘겼네.’라는 소심한 자존심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깨졌다.
4번째에 이은 5번째 희생자.
이쯤 되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도 힘들다.
“카르 4세. 너는 여자친구에게 사랑받는 모양이다.”
“진짜 여자를 보내줘….”
정찬호와 농담을 주고받는 무일의 눈빛은 차분했다.
자신에게 명백한 적의(敵意)를 품고 있는 ‘4종 계약자’ 때문이다.
후환을 없애야 할까?
누구라고 말해주지 않았고 친구도 상세히는 모르는 눈치지만, 특공대장과 경비대장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부친이 ‘정치인’이라고 했다.
국회의원 공석을 추적하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볼트윙이 무너트린 빌딩 잔해에 깔려 죽은 정치인이 많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됐다. 놔두자.’
안 그래도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다.
여기에 ‘계약자 일가족 살인사건’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
법적으로 정당방위가 성립된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계약자를 잃은 4종 수호자는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그는 프로사냥꾼이기 이전에 ‘3급 사냥꾼’이다.
혼자서 4종 괴수를 처리할 능력이 안 됐고 동귀어진조차 불가능하다. 물론, 옛 특공대 동료 한둘쯤 부른다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무일은 그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카르 4세.”
“왜?”
“너도 참 운이 없다. 하필 그런 정신병자에게 걸릴 게 뭐냐.”
그냥 운이 없던 건 아니다.
악의로 뭉친 계약자란 연결고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역시 넌 RPG 게임 용사 운명인가보다. 한 번이라도 패하면 그걸로 개털! 아이템, 머니, 퀘스트 다 잃고 게임 오버.”
“고맙다. 친구를 개털에 비유해줘서.”
“...야. 카르 4세.”
“또 왜?”
“당하고 가만있을 거냐.”
일반인들은 ‘카르 4세’를 모른다.
하지만 이 한국이란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위험인물로.
이 프로사냥꾼이 마음먹으면 살아남을 정치인은 없다.
그건 아무리 튼튼한 방어와 호위로 무장해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카르 4세에게 적대하면서 정치인을 도울 사냥꾼이 있을 리 없겠지만.
무일은 태평하게 말했다.
“어. 놔둘 건데?”
“계약자는 놔두더라도 본보기로 가족은 어떨까.”
정찬호가 잔인한 제안을 했다.
카르 4세의 무서운 점은 ‘인간 사냥’도 잘한다는 것이다.
암살하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익히지 않았지만, 뚜렷한 알리바이만 만들 수 있으면 증거를 남기지 않고 민간인 한둘쯤은 소리 없이 처리할 수 있다.
감시카메라?
프로사냥꾼의 본능은 카메라의 사각지대로만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다. 그건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첩보위성도 마찬가지다.
경호원?
분명, 카르 4세는 반쪽짜리 사냥꾼이란 오명을 달고 있다.
하지만 그건 괴수를 상대했을 때의 얘기다.
“...됐어.”
“순수하게 괴수를 베는 용도라면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가벼운 축에 속해. 하지만 쓰레기 처분하는 칼로 쓰기에는 많이 무겁지.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내 생일선물이랍시고 권총을 쏴보라고 했던걸.”
[예측]과 [예감]으로 총알을 쳐냈다!
친구의 생일선물로 선보일 묘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게 벌써 6년 전의 일.
애송이의 치기(稚氣)가 빠진 지금이라면 어떨까?
칼만 가볍다면 ‘카르 4세’에게 ‘단발성 무기’는 그리 위협이 못 됐다. 그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인 체력과 근력도 ‘무거운 여자친구’만 없으면 자연히 해결된다.
사람을 살해하는 실력이라면?
카르 4세는 한국에서 ‘원탑(One Top)’일 것이다.
“바람 넣지 마.”
정찬호가 어째서 정비과에 들어왔는지 그 사연을 잘 아는 무일은 친구의 과격한 계획을 나무라지 않았다.
녀석은 ‘개념 없는 인간’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예외는 없다. 계약자, 정치인, 사냥꾼, 민간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애들까지도 세상에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눈앞에서 치워버리길 원한다.
그래서 정비과 밖으로 거의 안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초식남 주제에 말이지.’
무능한 정부인사의 실수로 정찬호는 이복여동생과 둘째어머니를 뺀 일가족 전부가 괴수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유서 깊은 가문으로서 대가족을 이뤘던 그는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는 물론이고 형제자매 다수를 송두리째 잃었다.
그 와중에 재산을 노리고 달려든 친인척들.
전부 쳐내고 지친 정찬호는 무능한 걸로 모자라서 노력마저 안 하는 인간을 보면 참질 못한다.
정신병일지도 모른다.
좋은 여자 만나서 그런 염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고쳐졌으면 좋겠다.
그 친구가 말했다.
“카르 4세. 이번만 공격력을 대폭 깎고 방어력과 순발력을 올려봐. 파격적인 헐값에 대여해주마.”
사람을 베는데 공격력 ‘999’는 필요 없다.
공격력은 ‘10’이면 충분하다.
덤으로 전자기펄스(EMP) 생성기 정도만 있으면 장애물은 인간만 남는다. 도심에서 대량살상무기의 휴대는 엄격히 금지되어있기에 완전무장한 경호원 또한 위협이 안 된다.
피해를 본 당사자보다 더 극성이다.
정찬호는 계속 안 된다고만 하는 무일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기 시작했다.
심술부리는 것이었다.
“나는 암살자가 아니야.”
“이 순해 빠진 오지랖 용사 꼬맹이! 덤으로 육식남.”
“방구석 폐인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아!”
정비과 에이스 정찬호는 몇 번 더 권해보고는 포기했다.
본인이 끝까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물론, 여기에는 외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오하요, 카레 짱~♥”
노크도 없이 병실을 찾아온 묘령의 여인이 창가에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탄코트와 후드를 벗으니 그 안쪽은 순백의 간호사복!
초식남 정찬호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호흡곤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이게 전설의 병원이벤트. 2D로만 존재하던 거 아니었나?’ 등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혼절!
이 정비과 엄친아는 3차원 미녀에게 어디까지 약한 걸까…?
친구의 미래가 살짝 걱정됐다.
무일은 생글거리는 유키 짱의 옆을 보며 물었다.
“옆에 신사분은?”
“엑시온이야.”
엑시온? 일본인 이름치고는 무척 특이하네.
문뜩 그런 속내를 내뱉을 뻔했던 무일은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절대로 잘못 들었을 리 없다.
“...판타이탄?!”
“그게 심장발작을 일으킬 만큼 놀랄 일인가, 소년이여.”
사람이랑 다를 게 없는 인간적인 미소.
일본의 어린이용 액션영화 ‘슈퍼레인저’에 출연할 법한 20대 초반의 미남이었다. 웬만한 여자보다도 고우면서도 남자의 야성미가 살아있는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음성은 권위적인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다.
전체적인 첫인상은 ‘알 수 없음.’으로 해둬도 괜찮을까.
그보다 괴수가 인간의 말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휴머노이드(humanoid)?”
“나를 그런 저급한 소체랑 동격으로 취급하다니 섭섭하군. 이건 원격조종이다. 일본의 비효율적인 골격과 장비 등을 손봤으니 최악의 가정과 경우의 수는 피해갈 테지. 하지만 저 레드군은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그, 그렇습니까.”
“긴장할 것 없다, 소년이여. 그대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판타이탄의 범용성은 그 한계가 없는 모양이다.
계약자가 아닌 인간이랑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괴수라니?
이건 전설의 용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파충류의 성대구조만은 어쩌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류가 용언(龍言)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겠지만.
조금 의외였다.
남성은 전부 ‘털 없는 원숭이’로 보이던 거 아니었나?
아니면 여기에도 공식이나 조건, 규칙 등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은 거기에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닌가.’
어째서 유키 짱은 귀국하지 않은 걸까?
병원에 왔으니 병문안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시기가 공교롭다. 이 아가씨가 납치하려고 하면 저항할 방도가 없는 까닭이다.
물론, 그럴 의도였다면 동해에서 진즉 했을 테지만 말이다.
“아픈 사람에게 무슨 용무야?”
“다이죠부.”
“뭐?”
“괜찮다고. 카레 짱을 의무대로 옮긴 게 누구라고 생각해?”
“아….”
빌딩 안쪽에 처박힌 사냥꾼에게 누가 관심 갔겠는가. 그리고 거기에 있는 줄이나 알았을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카르 4세는 의무대에서 깨어났다.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 쓰러진 그를 보고 옮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엑시온이 고생 좀 했어. 그 레드군이 계속 시비 걸지 뭐야.”
“참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서울이 초토화될 뻔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계약자 윤소영을 포함해서 한국 괴수대응본부에서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일단 말려보려고 최선을 다할 테고 그래도 안 되면,
토벌할 것이다.
“고마우면 이 계약서에 사인 좀 해줘, 카레 짱.”
유키 짱이 서너 장으로 된 종이 다발을 보여주며 말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사냥꾼에게 사인해달라고 말한들 들어줄 수 없다. 그래도 일본어 옆에 한국어로도 쓰여있던 덕분에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혜택이 좌르르 나열되어 있다.
환경 빵빵, 수당 빵빵, 지원 빵빵, 여자 빵빵(응?)….
사냥꾼에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웬만한 계약자보다도 대우가 좋았으니 말 다했다.
그 마침표를 찍은 건 ‘계약보증금’이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날카로운 무기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스콜레옹 포르소(야무지게 생긴 이빨)』
일단은 두 번째라고 했지만, 현존하는 무기류 중에서 ‘가장’ 예리한 절단기라고 봐도 무방한 도검이었다.
첫 번째가 미구현인 탓이다.
핵심재료를 구할 수 없어서 미국 괴수대응본부에 ‘단 한 자루’만 단검 형태로 존재한다. 과시용으로.
그러니 ‘스콜레옹 포르소’가 최고의 검이었다.
모든 검객의 꿈!
하지만 꿈은 닿을 수 없기에 꿈인 법이다. 그 천문학적인 가격에 비하면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매우 겸손한 여자친구다.
그걸 준다고?
정말 살 떨리는 제안이다.
“스콜레옹 포르소….”
“정말 줄 거야, 예요.”
시가 4,950억짜리 명검을 계약기념으로 준다는 배포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은 낫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카르 4세는 태어난 나라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좋은 ‘일터’를 찾아가는 건 배신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냥꾼은 각자 믿는 신앙이 있다.
가령, 카르 4세는 태양신을 숭배함으로써 강력한 ‘믿음’을 끌어내고 있다.
그 믿음은 [예감]이란 기술을 강화해준다.
무술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범과 사냥꾼의 차이는 여기서 나온다. 실전경험은 정말 사소한 부분이다.
『상대의 공격을 미리 꿰뚫어본다.』
이건 그야말로 절대적인 차이다.
중국 삼국지 최고의 지략가로 나오는 제갈공명이 있다고 치자.
신묘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 소수의 군대로 기만책을 펼치거나, 적의 허를 찌르는 장소에 군대를 매복시키는 등등….
하지만 [예감]이 있으면 전부 무용지물로 변한다.
예비 동작이나 사건 발생도 하기 전에 눈치채고 대처하는 사냥꾼의 생존본능 그야말로 ‘사기’나 다름없다.
대신, 익히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운’ 혹은 ‘감’이나 다름없는 미신에 절대적인 확신을 품은 ‘믿음’을 갖기가 어디 쉬울 리 있겠는가?
그래서 프로사냥꾼쯤 되면 신앙 외의 다른 ‘믿음’이 더 필요하다.
『자신감』
절대로 틀릴 리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건 자기 마음을 속이는 세뇌만으로 되지 않는다.
[예감]과 [예측]이 틀릴 수 없는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신앙처럼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닌 명확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사냥꾼들은 이렇게 부른다.
『정의(正義)』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내 [예감]이 맞아야만 하는 이유다. 그 결과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 설득에 성공하면 아주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카르 4세에게도 당연히 자신만의 ‘정의’가 있다.
그를 프로사냥꾼으로 이끌어준 힘.
“거절하겠어. 내 정의에 어긋나니까.”
그 음성은 단호했다.
뿌리가 굳건히 내린 소나무처럼 흔들림이 없다.
너무 딱 잘라 거절해서 그럴까?
입술을 빼죽 내민 유키 짱은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무언가 ‘도전하는 보람’이 있다는, 초롱초롱 빛나는 시선으로 무일을 빤히 쳐다봤다.
일본 아가씨가 가까이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당장에라도 입술이 닿을 거리까지.
바로 앞에서 7종 수호자가 쳐다보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위험한 거리 탓에 카르 4세의 심장은 바짝 쪼그라들었다.
유키 짱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쏘드도 준다면 어때, 예요.”
그건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했다.
초절정의 미모와 아찔한 간호사 차림으로 계약을 제안하는 일본 가인은 몽마(夢魔) 서큐버스(Succubus) 싱크로율 98%였다.
...퍼센트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그만큼 유키 짱의 속삭임은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
“에쏘드….”
“우리는 용사를 환대할 준비가 끝났어, 예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자와 계약하는 괴수’ 에쏘드.
계약자가 되면 카르세리안 레이소나 스콜레옹 포르소도 더는 필요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무기를 분실할 일도 없을 테고, 정치인과 권력자 등의 시답잖은 뒤통수를 걱정할 필요도 사라진다.
단단하게 뿌리 내린 소나무가 흔들린다.
예쁘고 깜찍한 아가씨가 이민해달라고 부탁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에쏘드는 ‘남자의 로망(roman)’이다.
동경한다고 해도 좋다.
“난….”
하지만 역시 이건 아니다.
간신히 유혹을 뿌리친 무일이 다시 한 번 거절하려 할 때였다.
유키 짱이 말했다.
“카레 짱~♥ 지금이 아니면 대우가 떨어질 거야. 한국은 점점 몰락하고 있어. 나중에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렇군.”
이민과 망명은 그 차이가 대단히 크다.
스스로 선택한 인간과 갈 곳 없는 부랑자가 같은 대접을 바랄 순 없는 노릇이다.
이민 가더라도 일상에 크게 지장은 없을 것이다.
용신 와이츠가 이룩한 ‘대한민국 전성기’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일본과 중국이라면 한국말, 한국어만 쓸 줄 알아도 생활에 별 지장 없다.
하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유키 짱의 설득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가려진 치명적인 허점을 발견한 까닭이다.
한국이 망해야 한다는 전제조건.
덤으로 그가 에쏘드와 계약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세계에서 2번째로 날카로운 검 ‘스콜레옹 포르소’를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린애를 유혹하는 사탕발림일 수 있다.
조국을 버린다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바다를 넘자마자 인체실험 제물로 쓰여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엑시온. 부탁해.”
“음.”
그래도 거절하려는 무일의 낌새를 여자의 육감으로 읽은 걸까.
7종 계약자는 수호자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믿어주지 않는 점이 답답하고 섭섭했지만, 유키 짱은 그 태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쉽게 배신하는 위인이라면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 칼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애써 찾아온 ‘고결한 아가씨’는 그런 ‘싸구려 사내’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병원에서 빌빌거리는 ‘카레 짱’은-,
‘카와이! 귀여워! 아픈 곳을 부비부비하고 싶어!’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허비할 마음도 없었다.
7년을 기다렸다.
슬슬 결실, 결판을 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유키 짱의 부탁을 받은 판타이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 병실의 가전제품은 ‘가상세계 하느님’의 통제 아래로 떨어졌다.
“저건…?”
“카레 짱의 명장면을 찍어놨어.”
리모컨 조작 없이 멋대로 켜진 텔레비전에는 국영방송이 아닌 엉뚱한 장면이 떠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 장도를 뽑아든 소년.
어느새 기절에서 깨어난 정찬호도 조용히 시청하고 있었다.
카르 4세가 스마트폰으로 유키 짱에게 다짜고짜 ‘도와줘.’ 한마디로 시작된 이야기. 상세한 전략이나 계획 따위는 일절 없다.
정말이지 내용이나 복선 하나 없는 시시한 ‘영화’다.
행동도 뜬금없다.
옥상 난간을 부수고 망설임 없이 다이빙!
여기서부터는 슬로비디오로 매우 천천히 진행됐다.
“스고이데스네~. 다시 봐도 대단해, 카레 짱♥”
“말도 안 돼….”
유키 짱과 정찬호가 각자 다른 언어로 비슷한 감상을 피력했다.
비디오는 더욱 감속해서 완전히 멈추다시피 했다. 그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건, 하늘을 나는 거대한 날치뿐.
카르 4세가 아래로 있는 힘껏 던진 카르세리안 레이소.
세상에서 3번째로 예리한 절단기는 볼트윙의 16쌍 날개 중의 오른쪽 절반을 순식간에 잘라냈다.
괴수의 힘으로 괴수를 베는 기술.
[반격]
하지만 그건 3종 이하에게만 먹히는 공격이다. 절대로 6종 괴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라고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기교를 기계처럼 맞춘 [예감]과 [예측]의 합동예술.
카르 4세의 강함이다.
“엑시온이 찍은 영상이야. 본부 늙은이들도 보고 경악했어. 한국의 늙은이들은 저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재능인지 몰라봤지만.”
“카르 4세…. 넌 미쳤어….”
한국의 정치인은 몰라도 정비과 엄친아 정찬호는 안다.
정비사는 현장에서 직접 무기 들고 싸우는 사냥꾼은 아니지만, 괴수의 특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천재들이다.
볼트윙의 도착시각이 0.1초만 달랐어도?
사망!
저 텔레비전에 나오는 소년은 거대한 날치나 단단한 지면에 충돌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낙하지점과 방향, 칼날의 각도가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목숨을 담보로 한 계획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6종 괴수의 날개를 베지 못한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역으로 부러졌으리라.
진짜 미쳤다.
자살공격도 저거보다는 성공률이 높을 것이다.
< [5장-3] 날치 위에 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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