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1화 (21/287)

< [5장-2] 날치 위에 서다. >

원래는 윤소영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일.

하지만 ‘도도한 계약자’의 방해로 힘들어졌다.

‘건방진 사냥꾼이 이래라저래라 했다는 거겠지.’

이해가 가면서도 짜증과 분노로 울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의 계약자들이 타국보다 ‘정말 착하다.’고 객관적으로 믿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계약자가 그럴 순 없다.

카르 4세는 말했다.

(볼트윙을 여기로 유인해줘.)

(혼또니…?)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혼또니.)

카르 4세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재미난 애니메이션밖에 생각 안 나는 일본의 ‘장난’에 당했다는 분함보다도 조국의 답답한 대처에 슬슬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 잘못을 전부 누구에게 떠넘길지 생각한다면 더욱.

(카레 짱. 죽으려는 거 아니지?)

(남의 전화를 멋대로 돌린 책임을 지라고.)

(하잇! 유인하려면 10초쯤 걸릴 거야.)

옥상 밑을 본 카르 4세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꽉 쥐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자기 살기 바쁜 어른들에게 밟히고 치여 죽은 아이들은, 수많은 죽음을 본 프로사냥꾼인 그조차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부모를 찾으며 우는 고아와 미아는 말할 것도 없고, 어두운 골목에서 범해진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린다.

괴수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

괴수에게 입은 피해보다 인간이 인간에게 준 상처가 더 컸다.

‘온다!’

세 번쯤 죽을 뻔한 해돋이로 따끈따끈하게 충전된 카르 4세의 [예감]이, 당구공처럼 사방으로 처박는 볼트윙의 접근을 알려왔다.

놈을 육안(肉眼)으로 좇으려 하면 ‘뭐가 지나갔나?’ 식으로 끝날 게 자명하다.

그리니 운과 감에 의존해야 한다.

무일은 대로(大路)가 보이는 옥상 난간 콘크리트 벽을 두부처럼 베어냈다.

그가 원하는 타이밍에 정확히 강하(降下)하려면 미세한 방해나 오차조차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빠르게 [예측]했다.

‘유키 짱과 판타이탄이 내 위치와 의도를 읽었다고 가정. 고도와 거리 조정. 볼트윙 움직임 시뮬레이션. 빌딩이 무너지는 폭음, 시민들의 비명. 그리고 방향. 도착까지 앞으로 3초. 유효시간 0.3초 내외. 그러니 지금.’

망설이지 않고 자유낙하를 시도했다.

만약, 그의 [예감]이 틀렸다면 이대로 콘크리트 도로에 처박힐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맞았다면?

“제발 맞아라!!!”

카르 4세는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작살처럼 수직 아래 방향으로 내리찍듯 던졌다.

표면적이 넓은 인간의 육신은 볼트윙의 날개가 발생시키는 기류와 기압에 밀려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탓이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단 하나.

폭풍우조차 갈라버리는 ‘여자친구만’ 보내는 것이다!

카르 4세.

그는 [반격]밖에 못 쓰는 반쪽짜리 사냥꾼이다. 괴수가 먼저 공격해줄 때까지 손가락 빨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괴수에게 선공을 양보하면 얼마나 불리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14년을 버텼고 ‘카르 4세’가 됐다.

성공 가능성?

한마디로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가 노리는 얇디얇은 날개 대신 6종 괴수 볼트윙의 은청색 비늘을 찌른다면, 절삭력이 4종까지가 한계인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허망하게 부러지거나 튕겨 나갈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16쌍의 날개!

다른 부위는 피해를 전혀 줄 수 없다.

그전에 ‘세상에서 가장 빠른 괴수’에게 닿을지도 의문이었으나-.

‘닿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르 4세였다.

수련생 시절부터 13년 동안 [반격]만 해온 ‘역공(易攻)의 달인’이다.

콘크리트 바닥에 곤두박질칠 기세로 자유낙하 중이던 무일은, 중력의 역방향으로 쏟아지는 기류에 몸을 맡기며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기뻐할 틈이 없었다.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전부 깨져버린 창문틀 안쪽으로 쏙 날아간 그는 엉망진창인 사무실 책상 등에 부딪히고 구른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그래도,

살았으면 됐다.

재수 없게 ‘창문 없는 건물’로 날아갔다면 관절이 꺾이고 뼈가 부러지는 정도로 안 끝났을 테니 말이다.

음속을 뛰어넘는 볼트윙의 경로를 뒤늦게 쫓아온 파공성이 끝내 프로사냥꾼의 고막마저 터트리며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을 빼앗았다.

“죽, 겄네….”

기절하기 직전에 한 말일까? 아니면 후?

손가락 마디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들린 고성에 깜짝 놀랐다.

“무일 오빠!!”

“...윤소영 양입니까.”

“정말 무모했어요! 6종 괴수에게 뛰어들다니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의무대에서 나온 지 하루도 안 지난 환자가! 오빠가 얼마나 잔줄 아세요? 무려 닷새예요, 닷새! 뇌를 다쳐서 식물인간이 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훈계하듯 쉬지 않고 조잘대는 7종 계약자 윤소영.

병문안 왔는데 우연히 깨어난 시간이 맞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환자의 안정을 위해 조용해야 할 병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깨운 거던가.

간병(看病)?

그녀는 하고 싶었으나 정부와 본부에서 필사적으로 막았다.

7종 계약자 눈 밑에 다크서클 같은 ‘끔찍한 흠집’이 생기면 어찌 될까?

레드군이 ‘무능한 원숭이 지도자들이 내 공주님을 걱정시켜?’ 같은 마음가짐으로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을 깔끔하게 불태워버리리라.

그나마 똑똑한 용왕님이라서 ‘신사답게’ 이 정도.

다른 수호자 같으면 무차별적인 파괴로 보복했을 것이다.

“녀석은 어떻게 됐습니까?”

“오빠에게 날개 절반을 잃고 추락한 날치는 엘카르가 마무리했어요. 아! 엘카르가 이 말을 전해 달래요. 오빠 덕분에 귀찮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요. 여전히 부끄럼을 많이 탄다니까요! 고맙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괜히 쌀쌀맞게 말해요.”

윤소영 양? 그 용왕님은 부끄러울 바에 저를 씹어 먹을 겁니다.

굳이 ‘안 해도 될 얘기’로 수명을 단축할 필요는 없겠지.

무일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산 걸로 만족합니다.”

“오빠도 물러요!”

“예?”

“날치는 오빠가 쓰러트린 거나 다름없잖아요.”

7종 계약자에게는 무시무시한 볼트윙도 그냥 날치인 모양이다.

나중에 ‘어린이용 괴수 도감’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일단은 지금 문제부터.

“과찬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아직 밖은 위험하다면서 계약자들의 외출을 금지하는 바람에 자세히는 못 봤지만, 서울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지나가는 애들도 알아요.”

“...밖은 여전히 끔찍하겠군요.”

소녀가 그렇게 느낄 정도면 정말 심각하다는 뜻이다.

윤소영은 이마에 뿔이라도 솟아날 기세로 말했다.

“그런데 그 비극을 조기에 막은 영웅에게 이런 푸대접이라니!”

자기 일도 아닌데 흥분한다.

같은 한국인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수학공식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물며 영웅이라니?

괴수대응본부 출신의 ‘활약한 영웅’이 있어선 안 된다. 시민의 분노를 뒤집어쓸 희생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부에서 무언가 해냈다고 발표하면?

분노의 화살은 자연히 현 정부에게로 쏟아지게 된다.

하지만 그건 한국정부는 물론이고 ‘괴수대응본부마저’ 원치 않는 상황이다.

‘쿠데타 내지는 무정부(無政府) 상태가 될지도 모르니….’

이번 사건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사후통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하지만 설사 그런 무능한 정부라 할지라도 말이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정부가 붕 떠버리면 한국이란 나라 자체가 사라진다.

과거에 수많은 국가가 합병됐던 것처럼.

카르 4세는 100년 전의 ‘평화로운 시대’에 나온 ‘평화로움이 묻어난 작품’을 좋아한다. 소설, 영화, 노래, 만화 등등.

하지만 딱 한 가지만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위인전.

손과 머리만 있으면 누구나 기록할 수 있는 ‘종이 위에 먹물’이 진실이란 보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부잣집 망나니를 구국의 영웅으로 편집할 수 있다.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영웅을 언급하시는 걸 보니, 그 영웅이 윤소영 양인 모양이군요.”

“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계약자는 아니지만 대표하는 미소녀.

사냥꾼은 정부지원이 ‘0’이지만 계약자는 ‘아낌없는 원조’를 받기 때문이다. 정부의 체면을 살려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여론 방패’인 셈이다.

붉은 용왕이 돌대가리 날치의 숨통을 끊는 광경을 목격한 증인들도 많았을 테니 조작의혹도 없다.

반대로,

카르 4세가 한 일은 ‘괴수’밖에 모른다.

윤소영이 ‘양심상 그럴 수 없어요!’라는 식으로 정부에 비협조적으로 나왔다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숨은 공로자의 보상’도 준비했으리라.

나랏일인데 쪼잔한 선물로 생색내진 않았을 것이다.

여자친구의 몸값을 대신 갚아준다든가?

기대는 안 한다.

가보(家寶)로 모셔놓으라고 생색내며 ‘무료식권보다 쓸모없는 무궁화훈장’ 하나 던져줄 게 분명하다.

“윤소영 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알려주신 것도 포함해서.”

“아, 아니요! 무일 오빠. 저야말로 죄송해요. 전화를 못 받아서….”

미소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허둥댔다.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다혈질 용왕님이 지켜보고 계신다.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전화는 별거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장례식에 꼭 참석해달라고 부탁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하하!”

“유언이었어요?! 안 받기 잘한 것 같네요!”

잘록한 허리에 양손을 걸친 윤소영이 쌍심지 켜며 따졌다.

진실은 언제나 멀리 있는 법.

하지만 ‘미소 짓는 소녀’를 울상 짓게 하는 ‘자존심 찌르는 철부지 어른’이 되는 것보다는 100배 낫다.

위인전을 욕할 처지가 못 되네.

굳은 얼굴 근육으로 미소 만들기를 포기한 무일이 말했다.

“윤소영 양. 어서 가보십시오. 숙녀가 남자랑 단둘이 오래 있는 모습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 시국에 염문설 뿌리는 멍청한 언론인은 없으리라고 믿지만, 장담은 금물이죠.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으니.”

정말 다양한 인간이 있다.

죽기 전에 ‘고결한 계약자’ 가슴을 주물러보고 싶다는 정신병자가 특히 많을 것이다.

소녀가 야무지게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답했다.

“엘카르가 혼내줄 거예요!”

“그것만은 참아주세요, 윤소영 양!”

성질이 불같은 용왕님이라면 ‘그 멍청한 언론인’이 도시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근거만으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신사’다.

정부에서 그전에 손을 쓰겠지만 말이다.

물의를 일으키는 ‘관심 종자’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다. 무고한 수백만 시민의 목숨이 달렸다는 걸 생각하면 수지타산 같은 건 따져볼 필요도 없다.

공개적으로 고문 후에 추방이다.

범죄자의 인권?

수천만 목숨과 도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계약자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인간은 필요 없다. 옹호하는 인권단체를 포함해서.

모든 나라가 다 그렇지만 ‘국가반역자’에게는 인정사정없다.

무기징역?

식량난을 겪지 않는 나라는 없다.

죄수 같은 인간쓰레기를 먹여 살릴 여분의 식량 같은 건 당연히 없다. 그래서 사형이나 추방 같은 판결이 쉽게 내려진다.

이 또한 인류의 생존방식이다.

“가볼게요, 무일 오빠!”

“살펴가십시오.”

프로사냥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소녀는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귀엽게 ‘메롱’을 날려주고는 병실을 떠났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긴장의 끈마저 느슨하게 푼 무일은 병실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병실 천장까지 닿을 기세인 축하화환(祝賀花環)이었다.

화환 문구로는 ‘카르 4세 선배님의 무사 생존 경축!’이라고 쓰여 있고 그 왼편에는 ‘특공대 일동 올림.’이라고….

유성팬으로 북북 긋고 ‘예쁜 선지혜가 보냄.’이라고 고쳐져 있다.

특공대장이 권력남용 중이란 생생한 증거물이었다.

병실은 그밖에 특별할 건 없었다.

냉장고, 링거, 벽걸이 TV, 의자, 테이블….

장점이라면 혼잡하지 않고 조용하다는 정도일까.

‘일인실을 내준 점은 정말 고마워해야겠는데.’

의무대는 물론이고 일반병원의 병실까지 환자로 꽉 찼을 것이다. 분명 모자라서 호텔 같은 숙박시설까지 동원했으리라.

그런데 카르 4세는 침대와 의료기기 한두 개쯤 더 수납할 수 있는 널찍한 병실을 홀로 쓰는 중이었다.

밖은 얼마나 아수라장일까?

용신 와이츠가 100년 동안 제공한 ‘안전한 한국’에 익숙해져 있던 국민들은 좋든 싫든 이번 일을 계기로 변화할 것이다.

가상현실게임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걸 말이다.

‘현실에 좀 더 관심을 두려나….’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괴수의 위협을 받는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마음만이라도 현실도피 하기 위해 지금보다 가상현실에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

정부도 그러도록 부추길 게 뻔하다.

‘현실 정치에 관심 많은 국민’은 관리하기 껄끄럽다는 이유로.

하물며 이번처럼 큰 실수를 최대한 축소하려면 국민들은 지금처럼 가상현실게임이나 실컷 하면서 ‘정부의 변명거리’가 준비될 때까지 조용히 있어주는 편이 좋다.

멍청한 가축(家畜)처럼.

가상현실게임은 아름다운 목장(牧場)이나 다름없다.

‘이대로는 정말 한국이 사라지겠는데.’

와이츠가 없으니 MID 선진국은 힘들다. 그럼 이집트나 중국처럼 순수한 힘으로 강대국 반열에라도 올라야 하는데 그럴 희망도 안 보였다.

벌써 견제는 시작됐다.

이번 볼트윙 사건이 그 증거다.

대한민국이 산소호흡기를 때고 다시 일어설 때까지 샌드위치 빵(중국, 일본)들이 기다려줄 것 같지 않다.

카르 4세는 심경이 복잡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은 회복에 전념하고 나중 문제는 ‘감’에 의존하면 된다.

늘 그래 왔듯이.

“카르 4세!! 이 부러운 놈!”

“...또 너냐.”

“또라니! 이 바쁜 시기에 휴식을 쪼개서 병문안 와준 정비과 에이스에게 또라니! 3D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면 안 된다, 너.”

지저분한 총각 냄새를 풀풀 풍기는 정찬호였다.

특공대와 경비대의 지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병문안은 무리고 그나마 정비과가 숨통이 트여있을 것이다.

하필 윤소영이 나가자마자일 건 뭐람?

이유는 간단하다.

“밖에서 기다렸어?”

“어쩔 수 없지. 그런 대단한 미소녀랑 마주치고도 위험한 번뇌에 안 빠질 자신이 쥐꼬리만큼도 없는데. 아아, 운명이란 참으로 짓궂어. 같은 동정의 길을 걷던 전우가 돌발이벤트로 활짝 피다니!”

부러워 미치겠다는 듯이 온몸으로 절규한다.

무일은 이 친구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기로 했다.

“그 돌발이벤트 이후로 날마다 목숨이 간당간당한다만.”

“사랑은 원래 목숨 걸고 하는 거다, 카르 4살.”

“닥쳐!”

소리를 질렀더니 가슴 쪽이 아프다.

설상가상으로 정찬호가 애송이 취급하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건방진 손을 쳐내고 싶었으나 몸이 안 움직인다. 사람을 붕대랑 깁스로 포장하다시피 해놓은 탓이다.

저항을 전혀 못 해서 그런 걸까?

재미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 정비과 초식남이 말했다.

“네 여자친구 말이야.”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30억짜리.”

“아! 어떻게 됐어?”

부러졌든 아니든 회수됐을 것이다.

식별번호와 도난방지센서가 있어서 함부로 팔 수 없을뿐더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은 훔쳐서 달아나기도 요원하다.

배를 타고 밀항?

계약자가 승선하지 않은 배는 99%가 침몰이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계약자는 국가소속.

작은 호수도 아닌 바다를 건널 밀항선은 없다. 그보다는 수송능력이 뛰어난 ‘대형’ 괴수와 계약한 계약자를 섭외하는 편이 안전하고 빠를 것이다.

“완전히 똥값 됐다.”

“음?”

“5번째 희생자가 나왔거든.”

“...이해가 잘 안 간다만.”

정찬호가 설명한 요지는 이랬다.

서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6종 괴수에게 소위 ‘칼빵’ 먹인 프로사냥꾼의 ‘칼’을 탐낸 정치인이 있었단다.

혼수상태인 무기주인의 ‘치료비’란 명목으로 강매!

혹시나 기대했는데 이 일인실도 공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걸 본부에서 그냥 놔뒀다고?”

“당연히 회수하려 했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특공대장과 경비대장이 그 개념 없는 정치인을 족치려고 했는데….”

그 정치인의 딸년이 4종 계약자였다는 것이다.

멱을 따주고 간단히 끝날 문제가 조금 복잡해졌다는 것 같다. 프로사냥꾼과 4종 계약자 중에 누가 더 귀한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상대는 ‘사냥꾼 전체’다.

6종 계약자쯤 됐다면 일이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겠지만, 4종 수호자는 사냥꾼들이 뭉치면 충분히 감당 및 사냥할 수 있는 선이었다.

정부에서 사냥꾼을 지원해주지 않는 거야 쭉 그랬으니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뒤통수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은 역시 넓네. 별의별 인간이 다 살아.”

“그렇지?”

이건 정부가 시비 걸었다기보다는 개인의 독단일 확률이 높다. 그런 것처럼 꾸몄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싸우면 100% 사냥꾼 승리다.

정치인들은 세 치 혀로 싸우지만, 사냥꾼들에게는 실질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명분만 주어지면 헌병대는 ‘인간 사냥’도 주저 없이 한다.

필패인 정치를 하는 정치가는 없다.

즉, 이번 일은 100번 양보해도 비상식적인 만행이다.

그 정치인은 ‘딸의 국가적 가치’를 믿고 저지른 게 분명하지만, 사냥꾼의 생리에 대해 전혀 모르기에 가능한 착각이다.

사냥꾼의 90%가 남성이다.

이 여성우월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나이라면 누구나 불알친구다.

친구가 여성에게 부당한 억압을 받는다면?

무조건 돕는다.

언젠가 자신도 도움받을 수 있다고 믿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앙심을 품은 그 계약자인가.’

강습반 전화를 받았던 여자가 분명하다고 카르 4세는 [예측]했다.

생떼 부리는 4종 계약자에게 처벌을 가하진 않겠지만,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강매해서 사냥꾼 전체를 적으로 돌린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정치인생 마감?

그렇게 얕게 끝나지 않는다.

모든 나라가 그렇지만 대한민국도 ‘식량만 축내는 인간쓰레기’에게 관대하지 않다.

추방 아니면 사형!

그래도 계약자 딸을 둔 덕분에 ‘끔찍한 고문’은 생략될 것이다.

“어떻게 됐어?”

“네 여자친구는 침대 밑에 있다.”

“그 정치인은?”

“죽었어.”

“사형?”

“아니. 처벌하기도 전에 멋대로 죽어버렸어. 이걸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홀로 검사(劍士) 흉내 내다가 자기 왼팔을 자르고 과다출혈로 꼴깍.”

무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떤 검술이기에 자기 팔을 자를 걸까?

분노할 기운도 안 났다.

< [5장-2] 날치 위에 서다.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