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9화 (19/287)

< [4장-4] 흔한 사냥꾼의 귀환 >

그녀가 이성을 알아갈 나이(17살)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없어도 그만인 3종도 아니고 무려 7종 계약자다.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던 용신 와이츠를 잃은 대한민국은 한 명의 뛰어난 계약자가 아쉬운 상황이다.

막말로….

중국이나 일본이 7종 수호자 하나만 심심풀이로 보내도 한국은 끝이다.

부족한 괴수 전력을 MID 군수기술로 대처해왔는데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와이츠가 떠나버린 탓이다.

“이 나라는 너무나 약합니다.”

“무일 오빠.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너무나 약해빠져서, 사춘기도 안 지난 어린 계약자마저 타국의 10배는 진지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소국입니다.”

“......”

윤소영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무일도 참담한 기분이었다.

계약자가 아닌 평범한 소녀였다면 ‘키워서 잡아먹자!’ 같은 무엄한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는 프로사냥꾼으로서 어딜 가도 꿀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사냥꾼 경력 13년.

카르 4세.

경비대에서 시간만 축낸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특공대에서 오랫동안 갈고 닦은 베테랑.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프로사냥꾼이다.

순수한 전투력으로 따지면 3종 괴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수로부터 자신과 자식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를 싫어할 여자는 없다.

성장이 멈춘 건 문제가 못 된다.

생식능력은 성인이랑 다를 게 없고, 덩치만 클 뿐 무능력한 사냥꾼보다는 훨씬 화목한 가정을 꾸릴 자신도 있다.

시한부 인생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모든 남자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계약자(1종, 2종)하고도 맺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아는 여성도 꽤 되니 결코 망상이 아니다.

무일은 말했다.

“윤소영 양에게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 얼굴로 말하면 전혀 설득력 없어요, 무일 오빠.”

“죄송합니다.”

길게 말하지 않았다.

설득력 없다고 쪼아댔지만, 윤소영은 똑똑한 소녀다. 성질 더럽고 까다로운 레드군이 인정한 공주님이 외모만 반지르르한 백치미일 리 없다.

평생 동정이어도 할 말 없군.

하찮은 칼잡이 주제에 ‘국민 여동생’을 찼으니 말이다.

“...무일 오빠가 대단히 착각 중인 모양인데요. 그냥 병문안이거든요?”

“압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삼류 사냥꾼은 돌다리도 수십 번씩 두드려보고 건너야 하니까요.”

“새가슴.”

“칭찬 감사합니다.”

위험한 싸움에 뛰어드는 사냥꾼은 바보다.

뭐, 바보라도 괜찮다.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서는 이상론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용기도 좋고 패기도 중요하지만, 개죽음은 남에게 민폐만 줄 뿐이다. 그럴 바에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겁쟁이가 훨씬 도움된다.

치워야 하는 시체가 줄어들고 세금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갈래요!”

“윤소영 양 덕분에 저를 포함한 국민들은 오늘도 두 손 두 발 뻗고 잘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가상현실게임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가끔은 전화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다행히 순순히 따라주는 소녀를 보며 무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분 나쁘다고 용왕님을 불렀다면….

레드군이 ‘판타이탄’이랑 다시 싸울 기회의 접점인 ‘카르 4세’를 살려두기로 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절대 못 말했을 것이다.

‘종잡을 수 없네.’

동해에서는 태우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지나친 호의.

여인의 마음은 갈대(?) 같다는 게 맞는 말이었던 걸까.

다음날 퇴원한 무일은 찜찜한 마음을 욱여넣고 휴대전화판매소를 찾았다. 이래저래 이번 해돋이는 돈이 많이 깨지는 것 같았다.

“손님. 어떤 기종을 찾으세요?”

“기기값 안 나가는 무료 중에서 괜찮은 걸로 부탁합니다. 전화랑 최소한의 앱, 카메라만 되면 됩니다.”

“죄송하지만 손님. 미성년자는 부모님 동의가 필요해요.”

“...주민등록증입니다.”

“어머! 죄, 죄송합니다. 어, 엄청난 동안이시네요. 부러워라. 호, 호호!”

통신사매장 아르바이트생 좀 그만 바꿨으면 좋겠다.

무일의 솔직한 심정이다.

정규직을 뽑을 마음이 전혀 없는 걸까?

그놈의 유행(공짜만 쓰기 때문에 늘 늦다.)을 따라간다고 매년 찾아올 때마다 주민등록증을 내미는 게 일이다.

그전에….

서울은행 테러리스트를 ‘1명’ 잡은 헌병대로 뉴스 등에 소개된 게 바로 한 달 전이다. 시민이 워낙 많이 죽어서 제법 떠들썩했던 살인사건.

특히, 유일한 목격자이자 공로자인 ‘한무일 헌병대원’은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뉴스 등에 얼굴이 자주 노출됐다.

하지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나란 인간의 가치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겠지.’

프로사냥꾼인데도 이 정도다.

그렇다면 다른 사냥꾼은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설득이나 설명 하나 없이 말 한마디로, 바쁜 시민들에게 대피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수 있는 계약자랑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 인정하고 싶을 뿐이다.

이 불평등한 세상에 ‘사내’로 태어난 가치가 있었다고 말이다.

집안에서 정한 ‘사내’의 가치보다 보람 있는 일을.

“현실은 꼬맹이지만….”

“흠. 카르 4세가 오늘따라 한숨이 많군.”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앞에 둔 감정사 노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 노인은 고대인이다.

카르 4세의 주치의 오돈혁처럼 노화억제제 등을 복용했지만, 품질이 떨어져서 차츰차츰 늙은 것이리라. 아니면 스스로 ‘감정사 연륜’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절했던가.

후자라면 그 의도는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일반인들은 당연히 모르지만, 본부 정비과의 전설이었던 남자다.

김장호. 추정 나이 140세 이상.

일찌감치 은퇴한 그는 경매장, 전당포 등에서 감정사로 일하고 있다.

“어제 퇴원해서 힘이 없거든요.”

“그런가? 딱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한 얼굴이었는데.”

“있을 리가 없잖아요.”

“관에 들어가야 할 늙은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

치매 걸리지 않은 노인의 혜안(慧眼)은 역시 무섭다.

그만큼 김장호가 감정한 물품의 가격은 공증력 있을 만큼 큰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적어도 카르 4세의 무기에 한에서는 그랬다.

“어떤가요?”

“카르세리안 레이소. 허망하게 부러지는 손톱. 제조연도 2275년. 영국의 와이츠 ‘모드레무스 멀리온 경(卿)’이 영국의 전설 엑스칼리버를 시기하여 만든 왕실 보검이 그 시조….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평이지만, 용의 발톱에 비하면 모든 명검이 다 똑같지.”

“...전에도 말씀하셨는데요.”

“그랬나? 치매가 왔나?”

이렇게 상세히 외우고 있는 노인이 치매일 리 없다.

프로감정사로서 고객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사전작업일 뿐이다.

무일은 여기 온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얼마예요?”

“너는 고객이 아니니 솔직하게 말하마, 카르 4세. 이렇게 좋은 검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정신머리가 썩었어!”

“...지쳐서요. [업보]도 너무 쌓였고.”

“빨랫줄 소동 때문은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얼마예요?”

“입 아프게 자꾸 묻지 마라. 37억.”

카르 4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까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좋은 검’이라고 해놓고, 저 터무니없이 후려친 가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재료비도 안 나올 것 같다.

그래도 작년보다 1억이 올랐다는 게 고무적이다.

“정가만 300억이 넘는 아가씨인데 어째서 매년 1억밖에 안 오르는 겁니까.”

“사겠다는 놈이 없는데 어쩌겠느냐?”

“저번 주에도 경매장에서 320억에 낙찰됐다고 들었는데요.”

“카르 4세. 너는 네 목숨에 가격을 매길 수 있느냐?”

작년이랑 비슷한 물음에 무일은 일단 찌그러졌다.

하지만 아무리 ‘주인 잡는 칼’이라도 싸다면 일단 사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닌가?

그렇게 따졌다가 작년에 쓴소리 들었다.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돈 많은 사냥꾼이 없다고.

유럽 귀족사회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가 없다고.

한국의 구매자들은 전원 재벌로, 그들에게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영국왕실을 흉내 내는 의장용 검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카르 4세가 쓰고 있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주인만 4번 죽인 저주받은 검’이라고 불린다.

단지 그뿐이라면 괜찮다.

왜?

주인만 수백 번 바뀐 무기가 세상에 널렸기 때문이다.

문제라면, 무일의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첫 소유자를 제외하고 전부! 3명 전원, 서울의 안전지대에 있었던 재벌만 죽였다.

『심심풀이로 휘둘렀다가 헛손질한 사업가』

『친한 친구에게 자랑하다가 떨어트린 정치인』

『훔쳐서 달아나려던 강도에게 들킨 귀부인』

그러니 사겠다는 사람이 나올 리 없었다. 앞으로 살날(최소 200년)이 창창한데 ‘겨우’ 몇백억을 아껴보겠다고 ‘저주받은 장식품’을 사는 재벌은 없다.

굳이 팔겠다면 유럽이나 중국.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팔아주지 않는 한 떼먹힐 확률이 99%다.

그러니 죽이 됐든 밥이 됐든 한국에서 처분해야 한다.

“그래도 헐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긴 한가 보네요.”

“너의 이명(異名)을 노리는 1급 사냥꾼이 적지만 있다. 프로사냥꾼 ‘카르 몇 세’ 코스프레를 애타게 하고 싶어 하는 도련님들이.”

“아하!”

“검으로 괴수를 베는 용사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멀리서 안전하게 총알이나 쏴댈 것이지. 쯧쯧! 교훈을 줘야 할 전래동화가 혈기왕성한 아가들 여럿 잡겠어.”

“그렇겠죠.”

진짜 사냥꾼은 가난하다. 하지만 가짜는 아니다.

그들은 고용한 사냥꾼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권 주위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캠핑, 캠프파이어, 서바이벌체험, 바비큐 파티, 괴수 사냥 등을 즐긴다.

24세기 부자들의 유일한 오락.

현실을 똑같이 제현한 가상현실게임이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가상’이라서 제대로 된 ‘스릴’을 맛보긴 힘들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백여 명씩 몰려다니며 1종부터 4종까지 해치운다.

경비대와 수색대가 연휴와 주말에 바쁜 이유다.

“너처럼 [예측]과 [예감]이 괴물인 녀석이 아니면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쓸 수 없어. 계산이 조금만 틀어져도 부러져버리니.”

“띄워주셔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어르신.”

그래 봐야 기본기 [반격]으로 먹고 사는 반쪽짜리다.

괴수가 먼저 덤벼주지 않으면 싸울 수조차 없다.

감정사 김장호가 윽박질렀다.

“내가 이 나이 먹어서, 겨드랑이에 털도 안 난 꼬맹이에게 입바른 소릴 할 것 같으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아!”

“하, 하…. 아니죠.”

“일본의 카르 3세는 세월만 질질 끄는 겁쟁이. 영국의 카르 2세는 왕녀로서 명예직. 그나마 중국의 카르 1세가 한가락 하는 모양인데, 제자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지. 너처럼 8년씩이나 단독활동했던 녀석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

“...전임, 카르 4세?”

“그 병신?”

“......”

“얼마나 한심했으면 노상강도에게 뒤졌을꼬.”

해돋이 보려다가 죽을 뻔한 ‘현임, 카르 4세’는 입을 다물었다.

애써 노인의 호평을 깎을 필요는 없었다.

작년에 서울은행에서 그가 죽었다면 김장호는 분명, ‘얼마나 한심하면 은행강도에게 뒤졌을꼬.’라고 했으리라.

살아서 참 다행이다.

그때, 새로 산 스마트폰으로 첫 전화가 왔다.

(카레 짱~♥)

(...개통한 지 2시간도 안 됐는데.)

(와이츠가 없는 한국의 보안시스템은 판타이탄에게 껌이야. 일본의 기술력이 한국을 뛰어넘은 시점에 끝난 게임이지!)

(그래서 무슨 일이야? 설날은 멀었는데.)

슬쩍 엿들은 김장호가 ‘여자친구 문제가 아니었어?’라고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린다.

이 노인은 애초부터 무일의 말을 하나도 안 믿었던 모양이다.

빠르게 인사하고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챙겨 감정소를 나온 카르 4세는 인적이 없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보안카메라도 없겠지.

유키 짱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심각한 말을 했다.

(괴수가 서쪽으로 도망쳤다고 경고해주려고.)

(그 경로가 우연히 서울이었다는 거군. 우연히.)

(세~카이데~스♪)

정답인 모양이다.

일본의 서쪽이면 한국이다. 그리고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하필이면 ‘한국의 서울’이라서 가르쳐준 것 같다.

어째서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은, 한국은 현재 무방비상태다.

(유키 짱! 어떤 녀석이야?)

유키 짱은 한국이 일본에 밀렸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국이다. MID 기술 세계 1위도 잠깐이지만 찍었던 선진국이다.

어떤 괴수든 사전에 포착할 수 있는 군사위성과 첩보위성은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포착한 괴수를 ‘위’에 보고하는 건 ‘인간’이다.

한국이 와이츠를 잃으면서 가장 먼저 입은 타격은 MID 기술이 아니다. 기술이라면 동맹국의 원조로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인사권!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공명정대함이다.

용신은 ‘식량만 축내는 원숭이’들의 소꿉놀이를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연, 혈연, 지연 등이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개판이다.

(볼트윙, 데~스♪)

(바보 같은!)

볼트윙. 세상에서 가장 빠른 괴수의 이름이다.

카르 4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 [4장-4] 흔한 사냥꾼의 귀환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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