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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7화 (17/287)

< [4장-2] 흔한 사냥꾼의 귀환 >

최연소 7종 계약자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대한민국 공주님. 그런 윤소영의 머릿속은 백지로 변했다.

인제 와서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몰래 훔쳐 봤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레드군이 차를 부쉈다는 것도….

원래는 묻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어째서 전화를 안 받았고 급기야 전원을 꺼놨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큰일 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그리고,

‘누군가요, 그 언니. 동창생? 애인? 약혼녀? 설마, 부인?!’

외모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16살 미만 소년이지만, 실제 나이는 26세. 새해가 밟았으니 27세일 것이다.

성인식 치른 지 1년밖에 안 된 윤소영이랑 달리 진짜 어른! 상상만으로도 두근두근한 일들을 함께할 여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여동생이란 가정은 미안하게도 없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그걸 물으면 몰래 훔쳐봤다는 걸 들키기 때문이다.

윤소영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다른 계약자들이랑 비교하면 7종 계약자치고는 매우 겸손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자존심 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남자 뒤꽁무니를 쫓아왔다고는 절대 밝힐 수 없었다.

“맞아요! 그래서요?”

계약자는 남자들 앞에서 항상 당당하게 행동해야 해!

친한 언니, 6종 계약자 최은설이 해준 조언이었다.

그건 계약자를 주둥이만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정치가와 재력가들을 우회적으로 겨냥한 말이었지만, 윤소영이 거기까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니 대상은 모든 남자!

그 효과는 힘없는 프로사냥꾼에게 직격이었다.

카르 4세는 고개를 저으며 해산물 주머니를 쥔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닙니다. 여기.”

“오빠. 이 꿈틀거리는 게 뭐요?”

“윤소영 양이 주문한 멍게, 해삼, 말미잘입니다. 확인해보세요.”

“...에?”

언니 말이 맞았다고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친 윤소영은 계속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지만, 그녀의 입술 사이로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오빠의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5초.

오빠의 생각을 읽어내기까지 4초.

팡팡 웃어도 괜찮은 상황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 차가운 바다에 들어가서 이런 것들(마음에는 안 든다.)을 사소한 오해만으로 구해줬다는 사실에 살짝 감동한 탓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많이 늦긴 했지만,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이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이상하게 어른스러워 보이는 오빠가 말했다.

“아가씨는 요리된 녀석들만 봐서 모르실 수도 있으실 텐데 멍게, 해삼, 말미잘은 원래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저 징그러운 것들이 먹는 거였구나!

사람들은 별걸 다 먹는다고 놀란 윤소영이었으나 시치미 뚝 뗐다.

하지만 프로사냥꾼의 예리한 눈썰미를 속이진 못했다.

‘내가 이 한겨울에 구해놔서 놀란 모양이군!’

다만, 이유까지는 잡아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목적을 완수해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무일이었다. 이제는 언제 ‘바다 괴수’랑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가슴 졸일 필요가 없다.

그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육지형 인간에게 바다는 너무 가혹한 탓이다.

“그런데 무일 오빠.”

“네.”

무일은 그녀에게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아마추어 같은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330억짜리 명검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탑재된 추적장치 아이디만 알면, 스마트폰의 간편 조작만으로도 위치를 알 수 있다.

그 아이디를 본인 외의 사람이 안다는 게 심히 유감스럽지만.

7종 계약자 윤소영의 ‘부탁’을 괴수대응본부 정비과에서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찮은 사냥꾼의 프라이버시보다 목숨이 훨씬 귀중한 까닭이다.

그 소녀가 말했다.

“버라이어티 예능프로그램을 능가하는 진짜 서바이벌을 하고 계시네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레드군의 브레스와 해일에 전부 쓸려갔다. 그 때문에 동해에서 1년 넘게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무색하게 하루하루가 각박하다.

그렇게 하소연하듯 소녀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무일은 10년이란 시한부 인생을 꽉꽉 채우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동행 없으세요?”

윤소영은 머릿속을 한가득 채운 망상으로 귓불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태초로 돌아간 남녀가 아늑한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격렬하게 살을 섞는 광경을 떠올렸다.

새하얀 피부가 불빛으로 몰랑몰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 누구의 감시나 간섭도 안 받고 사랑을 나눈다는 게 너무나 로맨틱하다!

실제로는 전혀 안 그렇지만 말이다.

축축하고 딱딱하고 불편하고 더러울 뿐이다.

하지만 어른인 무일은 수수한 소녀의 상상을 짓밟는 짓을 못했다. 애초에 상황부터 잘못 판단하고 있는 탓이다.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는 윤소영에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계속요?”

“...네. 없었습니다.”

잠시 갈등하던 카르 4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윤소영과 레드군이 유키 짱과 판타이탄을 경계한다면 ‘곧 돌아온다.’는 뉘앙스를 주는 편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예감]을 따르기로 했다.

사죄선물인 멍게, 해삼, 말미잘도 확실하게 준비했다.

무일이 본 윤소영은 결코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 ‘신념 있는 소녀’였다.

“오빠. 어째서 대답을 망설이세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접근법을 발견한 윤소영의 눈빛이 탐정처럼 변했다.

무일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지만, 마냥 웃으며 넘기기에는 뒤에 버티고 있을 용왕님이 너무 무섭다!

그래서 거짓 없이 대답했다.

“방문객도 포함인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누구예요?”

윤소영은 말하고 나서 너무 성급했다고 후회했다.

아는 사람인가요?

여자인가요?

어떻게 만났나요?

좀 더 우회하여 의심 안 사고 접근할 방법이 많았다.

이래서는 남자친구를 추궁하는 것 같다고,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 사춘기 소녀는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외국인입니다.”

“외국인이요?”

검은색 머리카락만 보고 한국인이라고 판단했는데 외국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예사로운 관계가 아닐 것이다.

남자를 만나러 이 먼 이국땅까지 부끄러운(기합 잔뜩 들어간) 산타 복장을 하고 오는 여자가 평범한 친구 사이일 리 없다.

이 남자의 어디가 좋은 걸까요?

귀엽지 않고 꾀죄죄한 데다 거기도 작다.

카르 4세의 알몸이 떠오른 윤소영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는 ‘어른들의 동영상’이랑 달리 너무나 기습적이고 뜻밖이었다.

“나이 등은 저도 모르니 물으셔도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유키 짱은 비밀로 해달라고 경고했지만, 그 당사자라면 조금쯤 괜찮을 것이다.

무일의 ‘대답 아닌 대답’을 들은 윤소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나이조차 안 가르쳐주는 여자친구란 말이죠?’

여긴 안전한(?) 수도권이 아니라서 계약자나 사냥꾼(윤소영 개인적인 생각일 뿐, 사냥꾼도 힘들다.)이 아니면 올 수 없는 위험지역이다.

그렇다면 그 외국인 여성은 계약자일 게 분명하다.

자금에 구애받지 않는 계약자들은 꾸준한 자기관리로 얼마든지 나이를 속일 수 있다. 그런다고 실제 나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숙녀의 나이는 비밀?

머리에 야한 생각뿐인 남자들은 모르겠지만, 몸무게와 가슴둘레, 허리둘레도 아닌 나이를 감추는 내숭은 구세대, 고대인의 사고방식이다.

‘100살 먹은 할머니일 게 분명하네요!’

윤소영은 눈앞에 이 ‘사기당한 오빠’를 구제해주기로 했다.

‘은인’이 혼인신고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외국인 할망구’에게 끌려다니는 건, 같은 한국인으로서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명감이었다.

사심은 없어요! 절대, 전혀!

마음속으로 자기변명 한 소녀가 말했다.

“서울에는 언제 돌아올 거예요?”

“빨라도 봄은 돼야 할 겁니다. 지금은 눈도 안 녹았고…. 여기서 계속 버티다가 동해까지 길이 뚫리면 귀환할 예정입니다.”

한국의 도로공사는 2월 초부터 시작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대한고속도로’를 뚫은 후에 나뭇가지를 뻗는 식으로 지방도로를 확보한다.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동해까지 닿으려면 빨라도 4월.

그때까지 4종 이상의 괴수를 안 만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버티기만 한다면 파견된 본부 구조대 차량에 올라타서 늦든 빠르든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

귀환?

당장에라도 하고 싶다.

지금 생활은 헌병대처럼 안전하게 세금을 축내는 것도 아니고, 수색대처럼 인류에 보탬이 되는 의미 있는 일도 아니다.

경비대처럼 자유롭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생활은 지독하게 불편하고 수입은 제로인 주제에 위험도는 또 지나치게 높다.

‘특공대 합숙훈련 때보다 힘들어….’

무일은 암투나의 공격으로 죽을 뻔했을 때도 룰루랄라 캠핑하는 기분이었다. 괴수의 습격과 위기, 죽음은 출발 전부터 상정해둔 일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긴장감이 추억을 되새김하기 딱 좋다.

하지만 텐트와 차량, 생필품을 한꺼번에 잃는다는 건 상정 밖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극기훈련 스타트~♬

카르 4세는 정말 오랜만에 ‘운’과 ‘감’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중이었다.

“봄이요?! 그렇게나 늦게요?!”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겨우(?) 300km 떨어진 동해인데.

레드군의 비행속도를 견딜 수 있는 완전무장상태면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는 윤소영의 관대한(!) 거리개념이었다.

같은 10분 동안,

동네 한 바퀴도 무리인 사냥꾼이 계약자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윤소영 귀에는 ‘여자친구 때문에 가기 싫습니다.’로 들렸다.

어떻게든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벼르며 말했다.

“있다면요?”

“...있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냥꾼의 [예감]이 맹렬하게 경고했다.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무일이 서울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유키 짱의 판타이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 망설임을 역시나 ‘여자친구 때문에 가기 싫은데.’로 해석한 윤소영은 두 눈에 쌍심지 켜며 말했다.

“그럼 바로 가요!”

“예?”

“엘카르도 협조해주겠데요.”

“...엘카르라면 윤소영 양의 레드군 말씀입니까?”

“네. 말했잖아요. 친절하다고요.”

그 친절한 용왕님이 저를 태워죽이려고 했습니다만!

윤소영이랑 대화 핀트가 살짝 어긋난 것 같다고 느꼈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레드군 때문에 무일의 생각은 이어질 수 없었다.

붉은 용왕님의 손에는….

“쇠사슬?”

“엘카르가 반대쪽 끝을 허리에 묶으래요. 어…. 인간 수컷의 생명인 허리를 살리고 싶으면 완충재를 쇠사슬과 허리 사이에 잔뜩 넣으라고 하네요. 또…. 조언을 무시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데요.”

“......”

용왕님은 죽기 싫으면 발버둥 쳐보라는 눈빛이었다.

파충류의 표정을 인간인 카르 4세가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지금만은 어째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건, 살기 띤 미소였다.

계약자 앞에서는 살인까지 친절로 위장한다는 건가!

“그르르르.”

“위대한 내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자비를 베푸는데 거절하면 가만 안 놔두겠데요. 피이~. 엘카르. 부끄러우면 부끄럽다고 해. 괜히 쌀쌀맞게 말할 필요 없어.”

저건 반어법이 아니라 직설화법입니다만!

하지만 무일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대신, 죽지 않을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었다.

“잠시만 준비할 시간을 주십시오.”

동굴에 쌓아둔 가죽들을 전부 꺼냈다.

이것들이 음속을 뛰어넘는 괴수의 비행속도로 생기는 저온과 기압 등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부목 역할을 할 카르세리안 레이소(검집은 튼튼하다.)를 안쪽에 넣어서 허리를 포함한 모든 충격에 대비했다.

“우와! 이런 곳에서 생활하셨어요?”

무일이 새해 시작부터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윤소영은 어느새 관광객의 자세가 됐다.

촬영 중에만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나머지 시간은 캠핑카 등에서 휴식을 취하는 공영방송 서바이벌하고는 많이 달랐다.

윤소영은 계약자인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연예인.

그 차이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막연하게 말이다.

비위를 위해 내장, 눈알, 생식기, 머리 등을 전부 동굴 뒤편에 묻길 잘했다고 중얼거린 무일은 마침내 준비를 마쳤다.

“그르르르.”

“엘카르가 전해 달래요. 그 녀석이랑 다시 만나기 위해 살려두는 거니 괜한 착각하지 말래요. 그 녀석?”

“그건…. 으아아아아아아아아!”

< [4장-2] 흔한 사냥꾼의 귀환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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