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4] 동해로 가는 길 >
(카레 짱~♥)
(...어째서 받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말이 나오는 거지?)
(당연히 해킹이야, 예요.)
(일본 본부는 그렇게 할 일 없나요…. 가난한 사냥꾼의 휴대전화기에 들어와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요.)
조잡한 인간관계뿐인 솔로의 스마트폰을 멋대로 휘저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무일이 뭐라고 하든 ‘유키 짱’은 생기발랄하게 말했다.
(전투와 숙면 중에 연락하면 예의가 아니잖아, 예요. 우리는 간신히 찾은 에쏘드 계약자를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아, 예요.)
(무슨 근거로?)
계약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나라마다 계약자 확보에 혈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키 짱이 말했다.
(비밀~♥)
(아, 그래? 배터리 뽑아놓을게. 메리 크리스마스, 유키 짱.)
(아레? 조또마떼!)
툭.
해킹했어도 전원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예쁜 꼬마 아가씨~. 아저씨 따라오면 사탕 줄게☆』
이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따라갔다가 이러쿵저러쿵 당하는 시나리오는 안 봐도 뻔하다.
마지막에 깜찍한 비명처럼 들린 일본말은 카르 4세도 안다. 일본과 합동작전할 때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 때문이다.
좀 기다려, 맞나?
아무튼, 이상하게 욕처럼 들린 건 기분 탓이 맞을 거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무섭게 쌓인 ‘하늘의 폐기물’을 좌우로 밀어내며 힘없는 소형차로 달리길 3시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동해바닷가에 마침내 도착했다.
“...야호. 바다다.”
인기드라마 ‘괴수 없는 그대’에 나오는 남주인공 명대사를 감정이입 없이 따라 했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수호자를 잃고 상심에 빠진 계약자랑 길에서 부딪친 게 인연이 된 ‘별거 없는 남자’가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결혼한다는….
드라마가 늘 그렇듯 현실성 제로다.
수호자를 잃었으면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계약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남자 따위가 간섭해서 훼방을 놓으면 상큼하게 ‘국가반역죄’로 추방한다.
사랑? 좋다.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 계약자 전력을 빼돌리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이 드라마가 방영될 수 있었던 것도 결혼은 하되 남주인공이 ‘고자’를 선택한다는 결말이었던 덕분이다.
아니었으면 드라마감독도 ‘국가반역죄’로 추방됐을 것이다.
『계약자에게 위험한 사상을 심어줬다는 죄목으로.』
무일은 330억짜리(중요!) 여자친구랑 바닷가를 산책했다.
아스팔트처럼 꽁꽁 언 모래사장 위라면 3종 이하의 괴수랑 일대일 정도는 가뿐히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살짝 내포되어 있다.
애초에,
『괴수는 흔한 생물이 아니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고 매일 마주치는 놈들이었다면, 인류는 계약자의 분투랑 관계없이 진즉 멸종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괴상한 야수’란 의미의 ‘괴수(怪獸)’라고 차별 둬서 부르지도 않고 동물의 카테고리에 넣었을 거다.
외모가 이상해서?
그건 편견이다.
날개 달린 돼지가 22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뿐이다.
24세기에 태어난 무일에게 플라돈과 돼지는 그놈이 그놈이다. 이런 생각은 나머지 괴수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괴수는 ‘괴수’로 불린다.
괴수의 비정상적인 파괴력과 생명력이 인간의 이해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괴상하다.’라는 편파적인 결론을 내린 것만은 아니다.
개체 수가 적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그렇다고 멸종위기생명체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하나하나가 터무니없이 강하고 거대하다.
다른 이유를 추가하자면?
아리따운 공주님을 제외한 인간을 공격하는 ‘괴수’이기 때문이다.
‘회만 먹으면 병 걸릴 텐데….’
육지형 참치, 암투나가 맛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계속 생선만 먹을 순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한 대비는 마쳤다.
‘이거 한 알이면 하루 식사 끝!’이란 광고 문구가 붙은 비타민제를 잔뜩 챙겨왔다. 하지만 장복은 생리적으로 못할 짓이다.
쌀밥이나 빵은 어렵더라도 다양하게 먹고 싶다!
그런 소박한 꿈을 키우며 산책을 마무리했다. 주변 지형을 숙지했으니 이제 남은 건 최적의 숙영지를 만드는 것뿐이다.
카르 4세는 암투나의 피비린내가 잔뜩 배인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것도 당연히 MID 제품이다.
미녀를 제외한 인류를 ‘털 없는 원숭이’로 싸잡아서 보는 괴수의 무자각시각(無自覺視覺)을 응용한 서바이벌용품이다.
『아방가드롱 스트롬(아주 오래된 배설물)』
평범한 동물은 이상을 감지하지만, 괴수의 눈에는 접근하기 꺼려지는 더러운 배설물로 보인다는 모양이다.
음식쓰레기가 주식인 플라돈 같은 몇몇 종에게는 안 통하지만, 이거 하나면 자다가 괴수의 습격으로 죽는 상황만은 피할 수 있다.
혼자라서 불침번도 어려운 상황에서 마음 편히 두 발 쫙 펴고 잘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강점이다.
그 중요성은 익숙하지 않은 야외생활 이틀이면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놀라운 텐트에도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우천(雨天) 시에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비에 쓸려가지 않는 배설물이 수상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니까.’
비 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고….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쓸쓸할 건 없다.
바로 옆에 옷(칼집) 벗은 여친(칼)이 요염하게(흉흉하게) 누워있으니 말이다.
검집 대용 및 식용으로 챙겨온 암투나 고기가 밤새 꽁꽁 어는 바람에 비타민제를 곁들여 얼음처럼 깨물어 먹어야 했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하지만 올해에 오길 잘했다고 무일은 자찬했다.
내년에 [업보]가 더 쌓인 상태에서 태백산맥을 넘으려면 정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럴 바에 올해 후딱 해치우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헤에~. 흉터가 생겼네.”
사냥꾼이라고 소개하면 온몸이 영광의 흉터로 가득할 거라고 일반인들은 멋대로 추측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귀여운 동물이랑 싸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약하디약한 1종 괴수의 가벼운 몸통박치기조차 소형차에 치이는 수준의 충격량을 선사하기 때문에 사냥꾼은 ‘완승’ 아니면 ‘사망’이다.
‘부상’이란 중간은 웬만해선 없다.
그래서 본부로 구조연락을 취하는 사냥꾼의 99%가 절벽에서 미끄러졌다거나 다리를 접질려서 이동이 불가피한….
119 부르는 등산객이랑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매번 무시당하는 거겠지….’
서울에서 30km만 멀어져도 굳이 다큐멘터리를 찾아볼 필요 없는 동물왕국이 펼쳐진다.
괴수를 증오한다고 외쳐대는 사냥꾼조차도 수도권에서 10km 이상 나가지 못하고 찔끔찔끔 약초와 과일을 채집하고 멧돼지(대부분 토끼) 등을 잡는 수준이다.
그들 대부분이 경비대 소속.
비굴하다고 욕할 순 없다. 살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자유.
위험에 뛰어드는 것도 자유.
카르 4세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밑바탕이 되는 실력이 있기에 해돋이를 보겠다는 정신 나간 일정을 짤 수 있었다.
남들이 크리스마스캐럴을 들으며 영화관으로 향할 때 말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그렇게 한심한 소리를 하는 사이에 작년처럼 평범하게 ‘예수 탄생기념일(커플을 위한 날이 아니다!)’이 지나가고 새해까지 이틀을 남겨두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먹고 싸고 자기를 반복.
그 틈틈이 상처 회복에 전념하며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갔다.
슬슬 본격적으로 수렴활동을 계시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카르 4세는 나흘째 내버려둔 소형차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이, 이게 무슨…?”
씌워놓은 위장덮개를 벗겼더니 알루미늄판이 종잇장처럼 뜯겨나가고 유리창도 일부 깨져나간 폐차(廢車)의 참담한 몰골이 보였다.
누가 봐도 괴수의 습격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태.
암투나 고기는 트렁크까지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어느 괴수가 차를 부수고 다시 위장덮개를 씌워놓은 걸까?
카르 4세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세상에 그런 괴수는 없다. 위장덮개를 찢지 않고 이런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괴수라면 몇몇 있지만.
“세상에 이런 무자비한 괴수가 있다니….”
사람을 희망고문으로 우롱하는 데도 정도가 있다.
괴수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는 위장덮개를 곱게 벗긴 후에 차를 부수고 내용물을 빼먹은 후에 다시 곱게 씌워놓다니?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
[예감]과 [예측]을 아늑히 초월한 너무나 강력한 정신공격에, 불굴의 소년 카르 4세는 무릎을 꿇고 망연자실했다.
그 뒤에 터진 분노!
‘도대체 어떤 놈이냐! 뱀페스트? 세이랑? 누드킨? 데빙걸? (생략) 아! 혹시? 20년 동안 크리스마스를 저주했다고 산타클로스가 보복조치를…?’
현기증이 날 정도로 사고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괴수로부터 이런 재미 없는 악의를 받아보긴 처음이지만 여기서 어물쩍거리고 있으면 그야말로 ‘그 괴수’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밖에 안 된다.
외형은 처참하지만, 시동도 걸리고 바퀴도 이상 없으니 이동에는 지장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심이다.
자력으로 서울에 돌아가려면 소형차의 기동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놈인지만 알면 대처가 수월할 텐데….’
4종 이상이라면 깔끔히 포기할 것이다.
하지만 아닐 경우에는 철저한 보복만 있을 뿐이다!
무일은 텐트에서 간신히 보일 위치에 차를 세워두고 다시 위장덮개로 덮었다.
암투나 고기만 먹고 미련 없이 떠났다면 어쩔 수 없지만, 카르 4세는 어차피 여기서 새싹이 나는 봄까지 쭉 지낼 예정이다.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마음 편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음?”
무언가 접근해오고 있다.
검집이 없어서 가속도는 기대하기 힘들지만, 카르 4세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예감]에도 걸리지 않은 괴수?
그렇다면 ‘적의(敵意)’가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점점 커지는 발소리는 그의 [예측]을 확정 지어줬다.
‘직립보행, 무게는 50kg 아래…, 사람? 가벼운 발걸음. 조심성 없음. 규칙성 없음. 일관성 없음. 기만일 가능성…, 없음. 민간인 여성. 접근까지 10초 내외. 망설임 없음. 감속의 여지 없음. 즉….’
계약자다.
어깨와 손아귀에 들어간 힘을 완전히 뺀 무일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바다로 돌리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동해바닷가를 산책 중이던 계약자의 눈에 띄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이 아닌 괴수, 유인원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녀석들은 이렇게 약한 느낌이 절대 나지 않는다.
잘 벼려진 칼날 혹은 폭풍의 눈.
그에 반해,
여긴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처럼 상큼하다.
목소리도 말이다.
“혼또니 쇼넨 데쓰네! 카와이!”
정말로 소년이네요! 귀여워!
라는 뜻의 일본어였지만, 무일이 알 리 없었다.
“......유키 짱?”
“하잇!”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카르 4세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완벽한 일본어, 놀라울 정도로 쾌활한 미성.
그 둘이면 신원확인으로는 충분했다.
‘나는 동해에 오려다가 동해를 넘어버린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현실성 떨어지는 만남이었다.
여긴 한국, 쟤는 일본인.
육지도 아니고 바다로 가로막혀있다.
수호자에 타고 동해를 건너면 된다고 쉽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괴수는 그리 편리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짧은 거리라면 ‘귀찮음’을 무릅쓰고 계약자에게 협조해주지만, 강도 아닌 바다를 건너는 수호자는 거의 없다.
게다가 연약한 여인의 육신이 시속 수천km(바다를 단숨에 건넜다면 5종 이상)를 맨몸으로 견뎌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야 뭐….
“카레 짱이 스마트폰 전원을 꺼두는 바람에 왔어!”
“겨우 그런 이유로?!”
“하잇!”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사냥꾼 따위를 만나려고 계약자가 바다를 건넜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번거로운 일인지 카르 4세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계약자를 ‘독점’하는 것 외에는 관심 없는 수호자를 설득하고 달래기가 쉬울 리 없다. 그것도 ‘남성 원숭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
아! 죽이러 원정 올 순 있겠군.
계약자의 순결을 위협하는 원숭이 토벌이라면 귀찮음도 무릅쓸 것이다.
유키 짱이 말했다.
“카레 짱. 내가 여기 온 건 비밀~♥”
“몰래 온 거였어?!”
“카와이!
깜찍하게 외치며 달려드는 일본 아가씨.
무일은 자신을 껴안으려는 유키 짱의 돌진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했다.
남자의 생존본능은 위대하다!
하물며 그는 사냥꾼. 괴수나 암살자도 아닌 일반인의 어설픈 기습쯤은 자면서도 피할 자신 있다.
심술 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살짝 충격적인 대사였다.
“점잔빼긴.”
“헐….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다냐….”
“바다만 보지 말고 유키 짱을 봐줘, 예요.”
“흠….”
“다이죠부데스, 카레 짱. 괜찮아, 예요. 엑시온은 내가 뭘 하든 신경 안 써, 예요. 아기 만들기 빼고.”
“쿨럭!”
외국인의 직역이란 이렇게나 조심성이 없다.
유키 짱이 평범한 여성이나 실패자일지도 모른다는 추측(희망)은 갑자기 튀어나온 애칭으로 무산됐다.
임신 빼고 다 괜찮다?
세상에 그렇게 관대한 괴수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의무대의 착한 개구리 왕자님, 프로칸도 카르 4세가 계약자인 강보라의 평평한 가슴을 실수로라도 만지면 사생결단을 내려 할 것이다.
“카레 짱. 에쏘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 [3장-4] 동해로 가는 길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