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1] 동해로 가는 길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2
[3장] 동해로 가는 길
학명: 레드군(섬세한 붉은 용왕)
서식지: 화산, 온천
특징: 무엇이든 녹이고 태워요♥
위험도: 7종 소형
비고: 질투와 호승심이 태양을 찌릅니다.
***
“그러니 몸조리 잘 하-, 카르 4세?”
“......”
“무일 군!”
“네?”
“듣고 있나?”
“죄, 죄송합니다, 오 선생님.”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짧은 카르 4세의 인생에 심각한 고민은 도움이 안 된다는 진단을 내려두고 싶군.”
“그렇습니까….”
당장 눈앞에 ‘30대 중반 외모’의 의사만 해도 나이가 130살이 넘었다. 괴수가 없었던 평화로운 세상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고대인’ 중 하나다.
그런 오돈혁 선생의 눈에는, 앞으로 10년 살면 많이 사는 한무일은 짧은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은 안 한다.
사냥꾼은 [업보]가 쌓이면 대적할 수 없는 4종 이상의 괴수를 자연스레 부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남은 10년을 채우고 죽을 확률은 극도로 낮다.
은퇴해서 도심에 살지 않는 한은 말이다.
“해돋이를 보러 간다고?”
경비대장하고 똑같이 물어오는 의사선생님이었다.
무일은 그때보다 짧게 대답했다.
“네.”
“죽고 싶으면 안락사를 신청하게. 자네의 시신은 꼼꼼히 해부해서 똑같은 처지의 불우소년들을 치료하는 밑거름으로 써주겠네.”
“사양하겠습니다, 오 선생님!”
무일이랑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임상시험을 했다가 몸뚱이가 ‘애송이’로 동결된 피해자는 총 300명. 그 과반수가 허약한 소년의 몸을 극복하지 못하고 괴수의 밥이 됐다.
남은 생존자는 10년 동안 꾸준히 줄고 줄어 96명.
사망원인은 불량식품(?) 때문이 아니라 어린 초보사냥꾼의 평균적인 사망확률에 따른 보편적인 통계치였다.
성장이 멈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요절한 소년이 태반이었다는 뜻이다.
이후, 치명적인 부작용을 깨닫고 일찌감치 은퇴한 자가 부지기수. 현역으로 뛰고 있는 사냥꾼은 카르 4세가 유일하다.
“하지만 혼자 강원도를 넘겠다니? 돌아버린 거냐?”
“돌다니…. 전 멀쩡합니다.”
“3년 전이랑 달라! 쌓인 [업보]가 강력한 괴수를 도발할 거야. 경력이 두자릿수인 사냥꾼들이 전부 본부에서 숨죽이고 사는 걸 보면 모르겠나.”
무능, 나태의 대명사인 서울헌병대는 그렇게 완성됐다.
괴수로부터 안전한 도시 치안을 관리하는 사이에, 전성기 때의 실력과 연륜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퇴역사냥꾼들.
그 집합소가 헌병대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순 없다. 돈만 있으면 150살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시대에 요절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안주(安住)를 택한 건 아니다.
『특공대(Super Humanity Forces)』
무일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임’이라고 부르는 최정예집단.
그들 개개인이 카르 4세처럼 거창한 별명을 달고 있는 프로사냥꾼이다.
하지만 현실은?
5종 계약자 1인보다도 쓸모가 없는 무력집단이다.
상대가 윤소영의 7종 괴수 레드군쯤 되면 특공대로 100만 대군을 구성해도 무의미한 발버둥이 된다.
『카레 짱. 일본의 계약자가 돼줘, 예요.』
다시금 떠오르는 강렬한 한마디.
쭉 비밀로 해왔다가 가르쳐주는 의도가 뭘까? 허풍? 검이나 총만 쥐여주면 완성되는 사냥꾼 따위에게 일본 정부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다.
시기로 따지면 매우 교묘했다.
사냥꾼의 공적과 시민의 목숨보다 계약자의 명예를 우선시한 한국정부의 ‘올바른 판단’을 인정하면서도 속마음은 뒤숭숭한….
그 빈틈을 제대로 찔러왔다.
“카르 4세.”
“네.”
“자네가 먹은 약은 애초부터 실패작이었네. 현명한 용신(龍神), 와이츠의 미완성작도 아닌 실패작이었지. 하지만 당시의 정부는 오만했어.”
“......”
“용의 지혜를 안 빌려도 한국이 건재하다는 걸 세상에 알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야. 보다시피 건재는커녕 망조의 전철을 밟고 있지만. 와이츠가 미완성도 아닌 실패작이라고 딱 잡아뗐으면 다 이유가 있는 건데. 쯧쯧.”
무일은 여태 이 저주스러운 불량식품이 ‘순수 한국산’으로 알고 있었다. 워낙 엉터리라서 ‘MID 신약’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용이 포기한 도안을 천재들이 만지작거려서 그럭저럭 쓸모 있는 발명품으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실험은 운이 나빴던 것뿐이다.
거기에 낚인 소년도 운이 나빴던 거고.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오 선생님.”
“아무것도 모른 채 죽으면 억울하잖은가.”
“제 죽음을 확정 짓지 말아 주세요….”
경비대장하고 달리 이쪽은 작별인사를 해준다.
오돈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카르 4세. 자네가 먹은 약은 한국을 최강대국의 반열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포부가 담긴 신약이었네.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최강대국이요?”
남자를 괴수로 변신시켜주는 약이라도 된다는 걸까?
하지만 오돈혁의 대답은 무일의 추측을 아득히 웃돌았다.
“소년을 소녀로 착각시키는 약이었지.”
“......잘못 들었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들은 것 같군. 맞네! 미소녀를 좋아하는 괴수가 미소년이랑 계약하도록 속인다는 프로젝트. 괴수에 속하는 와이츠가 고안했다고 쉬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지!”
“......”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용신도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던 거야. 미성숙한 소년이 아무리 예쁘장하게 생겼어도 화장을 안 하면 결국은 남자란 거지. 하지만 괴수는 메이크업을 굉장히 싫어하는 자연파. 이해했나?”
그 실패작을 정부에서 만지작거린 모양이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무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작용은 성장 말고 없습니까? 가령…. 2세라던가.”
“왜? 아침마다 불끈불끈 안 솟나?”
“그건 아닙니다만!”
무일이 격하게 부정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걸까?
조용히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돈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는 멀쩡해. 괴수들은 전부 자연파라고 했잖은가? 애를 못 낳는 공주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없지? 일맥상통이야. 같은 인간보다 괴수가 더 인간을 위한다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러면 제가 지금 먹는 약은 뭡니까?”
“모르지.”
“예?”
“나는 한국에 괴수대응본부가 출범할 때부터 쭉 지켜본 핵심인사지만, 근본적으로 의사다.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아.”
딱 잘라 말하며 냉정히 선을 긋는 오돈혁.
하지만 무일에게는 이 정도 ‘답변’이면 충분했다.
‘정치란 말이지….’
먹고 있는 약의 성분과 효능을 분석하는 일이 정치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지만 정부가 최강대국 야망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얘기다.
빠르게 추락 중인 국가 위신을 되살리려면 와이츠가 실패한 신약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수도 없을 것이다.
이걸로 무일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오 선생님.”
“...과신하면 훅 간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수고하세요.”
정부에서 카르 4세의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 부류에 속한다.
기분 나쁘지만, 중요한 ‘표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표본’이라면 95명이나 더 있는 것도 사실. 그중 몇 명이나 정부에 협조 중인지 알 수 없지만, 오돈혁의 말처럼 정부를 과신하면 정말 요절할 것이다.
그래도 이건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다.
정부나 본부에서 무일에게 해가 되는 일을 시키지 않을 거란 확신!
살릴 수 있는 그를 굳이 위험에 빠트려 죽이는 헛짓거리를 할 리 없다.
‘일본도 이걸 노리는 거려나?’
그렇게 보면 ‘유키 짱’의 비정상적인 친절도 충분히 수긍됐다.
일본 땅을 밟는 즉시 비밀실험실로 끌려가서 해부 될지도?
용이 없는 한국이랑 달리 2마리나 있는 일본이라면 와이츠의 실패작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토 대부분이 괴수밀집지대인 일본이라면 충분히 욕심부릴만한 프로젝트이지 않은가?
그 많은 표본 중에서 하필 자신일까, 라는 의혹은 남지만.
“오! 카르 4세! 네가 이 짧은 시간에 나를 2번이나 찾아오다니! 뭔 바람이래? 정말로 여친이 부러진 거냐?”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어서.”
정비과 에이스 정찬호의 요란스러운 환영인사에 무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 위에 얹으려는 무례한 팔을 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찬호의 사무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손님으로서 커피를 바란 건 지나친 사치였을까.
무일은 주치의에게 들은 얘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덤으로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는 뉘앙스도 살짝.
“즉, 너를 호모로 만들려 했다는 거네. 으아, 완전 소름 돋아.”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너무 음모론으로 빠지진 마. 내가 전에 해준 말 기억해?”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
“맞아, 그거야.”
일반시민들은 막연히 상상하거나 전혀 모르지만, 매일, 정말 매일, 정말 별것도 아닌 사건으로 사냥꾼들이 죽어난다.
괴수에게 죽는 건 그나마 낫다.
훈련 중에 정체불명의 총알을 맞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고, 일대일 대련 중에 동료의 검에 일도양단 되어 비명횡사하기도 한다.
그래도 세상은 멀쩡하다.
한국의 근대 100년 역사를 홀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용신 와이츠가 떠난 날에도 국민들은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했다.
하물며 많고 많은 사냥꾼 따위.
“고맙다, 친구야.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이지 다시금 깨우쳐줘서.”
“별말씀을.”
친구를 한껏 깎아내리고 기뻐하는 저 면상을 한 대 갈겨줄까 말까….
카르 4세는 ‘유키 짱’이 ‘에쏘드’를 언급한 시점부터 쭉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그렇다. 세상은 여전히 잘만 굴러간다.
나름 ‘프로’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4급도 아닌 ‘3급 사냥꾼’에게 국가 차원의 관심이 집중될 리 없다.
‘무일아, 한무일, 카르 4세. 도대체 뭘 기대한 거냐?’
혼자서 전설의 괴수를 쓰러트리는 용사님?
그는 8m 거리에서 기관총을 든 민간인이 대충 조준해서 방아쇠만 당겨도 구멍 숭숭 치즈 덩어리로 변하는 ‘약하디약한 사냥꾼’일 뿐이다.
한국을 좌우에서 샌드위치처럼 누르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여러 강대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면서 살짝 들떴던 게 분명하다.
악우(惡友) 정찬호의 조언이 도움될 날이 올 줄이야!
사람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인 모양이다.
“신도시 건은 어떻게 됐어?”
“내년 5월에 완공이란다. 부탁대로 알아봤는데…. 가서 살아봐. 3급 사냥꾼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키진 않겠지. 위대한 와이츠를 인간의 도시로 재현한다는 개념이래. 원숭이 220만 마리가 머리를 맞댄다고 용신이 되는 건 아닌데 말이야.”
“...너는 와이츠랑 대화해봤다고 했나?”
“맞아! 내 자랑거리 중 하나지!”
정찬호가 점잔 빼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존재와 대화했다면, 얼굴 빼면 시체인 유명한 영화배우랑 악수한 것보다 대단한 자랑거리임은 분명하다.
잠깐만 편승해주기로 했다.
“어떤 기분이야?”
“괴수는 인간이랑 언어체계부터 완전히 달라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데…. 우리가 붉은색을 붉다고 짧게 표현한다면, 괴수는 붉은색이 어떤 식으로 붉은지 자세히 묘사된 단어가 무수히 많이 존재해. MID 제품명처럼 말이지.”
MID 제품은 예외 없이 전부 이름이 길다.
미묘한 발음과 억양 차이로도 완전히 그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용언(龍言)으로 ‘허망하게 부러지는 손톱’이란 뜻이다. 그런데 억양을 살짝 띄우면 ‘어디서든 잘 자는 처녀’가 된다.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정말이다.
괜히 ‘여자친구’라고 달리 부르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기분은?”
“진짜 신을 대면한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가르침을 청하고 싶을 정도로!”
“헤에~.”
< [3장-1] 동해로 가는 길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