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5] 부탁은 부탁인데…. >
미국에서 처음 선보인 대처법이었으나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엿한 미소녀가 된 17세 전후로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나라도, 사람도 없었다.
혹시?
하는 심정으로, 할 일 없는 부자들이 ‘계약자 딸’을 출산하지 못하는 아내들에게 몹쓸 짓을 강요한 것이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가지고 싶은 모든 걸 가진 재벌에게도 ‘계약자 딸’이란 쉽지 않은 도전과제다.
덤으로 계약자는 강력한 안보대책이기도 하다.
하찮은 서민도 있는 ‘계약자 딸’이 내게 없다는 건 말도 안 돼! 라는 자존심을 세우면 자연히 인공임신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홍영희도 그 희생자 중 하나인 모양이다.
“...모친이 혹시, 혹시 특공대장 선지혜입니까?”
“어?!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변경된 카르 4세의 거주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본부 관계자 중에서도 정말 극소수뿐입니다. 거기에 폐경 전에 사고로 은퇴한 계약자라면 생각나는 여성은…. 하지만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니….”
특공대장 본인으로 모자라 딸까지 동원해서 사람을 귀찮게 할 줄이야!
카르 4세는 진심으로 치를 떨었다.
그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냥꾼’들이 우글거리는 특공대에 들어오라고 날마다 권유하는 선지혜가 이젠 유전자만 제공한 딸까지 이용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군?’
모친이란 인맥을 이용해서 카르 4세의 집 주소를 알아냈으니 말이다.
특별법이 아니었다면 무일은 지금쯤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어쩐지 좀 이상하긴 했다.
기자회견 전에 잠시 만났던 특공대장이 뭔가 재미난(위험한) 일을 꾸미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약하다.
그를 귀찮게 할 생각이었다면 윤소영이 더 셌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빨리 결혼하라고 극성이세요.”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게 당연한 겁니다.”
딸이 안된다면 ‘외손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다.
편법을 용납하지 않는 괴수도 ‘2세대’부터는 관대하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실험은 뒤늦게 인정받은 셈이다.
계약자가 되는 ‘순결(純潔)’과 ‘천연(天然)’에 이은 ‘3번째 계약조건’이 공표됐다.
『미녀는 모친도 아름다워야 한다!』
뼈대 있는 집안처럼 족보까지 따지는 괴수의 눈높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조상님들이 남긴 설화 속의 공주님과 절세가인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났어도 이상할 정도로 ‘모친도 젊은 시절에는 굉장한 미녀였다.’라는 식으로 묘사되어있다.
모친이 꼭 생존해있을 필요는 없다.
괴수는 직접 만나보지 않고도 모친이 미녀였는지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녀막복원수술도 눈치채는 괴수에게 이건 별거 아닐 것이다.
“싫다고 했더니 사위를 얻어올 때까지 국물도 없데요.”
“훌륭한 아버지를 두셨군요!”
그 특공대장의 딸이라면 분명 강력한 계약자를 낳을 게 분명하다.
한국의 위상을 다시 선진국 반열로 올리기 위해서라도 빨리 결혼해서 자식(불필요한 아들 말고 예쁜 딸!)을 쭉쭉 낳아주는 게 애국이다.
하지만 역시나 ‘선지혜의 딸’이라고 할까!
아무래도 임신이나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았다.
괴수대응본부 환영회에서 선지혜는 선언했다.
『나를 딸 만드는 기계로 안다면 대통령이라도 고자로 만들어 주겠어.』
이 유명한 ‘신임 특공대장의 인사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웃자고 한 소리가 절대 아니다.
그녀는 이 협박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권력자다.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를 내치신 분인데 훌륭하긴요.”
“홍영희 양 집안의 가정사에 대해 뭐라고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왕 세상에 태어났으니 멋지게 살아보십시오.”
“...그게 애 낳는 건가요?”
홍영희는 무척 마음에 안 내킨다는 말투였다.
무일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까놓고 말해, 계약자도 아닌 여자가 애를 절대 안 낳겠다고 고집부리면 ‘식량 낭비’나 다름없다.
사냥꾼은 매일 죽어난다.
그 줄어든 숫자만큼 여자들이 꾸준한 출산으로 메꿔주지 않으면 언젠가 사냥꾼은 씨가 마를 것이다.
계약자보다 그 중요성은 한참 낮지만, 사냥꾼이 없는 나라는 아무리 강력한 계약자와 수호자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존속될 수 없다.
하지만 홍영희는 애 낳기 싫단다.
여자가 남자처럼 살겠다고 하니 해줄 말이 없었다.
“저도 상당한 콩가루 집안 출신이라서 약간만 조언을 드리자면, 시작이 나쁘다고 끝난 건 아닙니다. 시작이 좋으면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요.”
“...한무일 씨는 현실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상현실로 도망칠 정도는 아닙니다.”
“뼈 있는 말씀이시네요.”
아무래도 가상현실게임을 즐기는 모양이다.
한국인 중에서 안 하는 사람이 드문 것도 사실이니 흉이라거나 이상할 건 없다.
어째서 어제오늘 여자들에게 충고하는 입장에 선 걸까?
한무일 26세 동정남.
신년회 때는 결혼 운세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런 꼬맹이 몸으로는 흥해도 문제지만.’
수명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MID 선진국’ 독일에서는 자신들이 개발한 약을 꾸준히 장복하면 이론상 늙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세포분열이 활발한 미성년’에서 성장이 멈췄다는 얘기는 없다. 있는데 감췄는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MID 후진국’에 속하는 대한민국의 시제품을 겁도 없이 먹은 그의 잘못이다.
주치의 왈.
『이대로 가면, 장수는커녕 단명한다.』
아무런 대책 없이 왕성한 신진대사로 세포분열과 소멸이 반복되면 육체가 금방 지쳐버린다는 분석이었다.
요절할 놈에게 시집올 여자가 있을까?
오겠다는 ‘특공대장’이 하나 있는데 그녀는 이쪽에서 사절이다.
오만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휘젓는 가운데 시간은 쑥쑥 흘러갔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였던 홍영희는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졌는지 약속대로 염소 치즈를 내려놓고는 날이 캄캄해지기 전에 떠났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의미심장한 소리를 멋대로 통보하면서.
“...유도신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다음에 두고 보자는 식으로 카르 4세를 노려보며 도망친 괴수는 꽤 된다.
그 목록에 귀찮은 여기자 하나가 추가된 것뿐이다.
무일은 이틀쯤 휴식을 취하고 개인훈련에 들어갔다.
불량식품을 잘못 먹은 후유증으로 생긴 그의 귀찮은 체질은 근육이 금방 자리 잡는 이상으로 깃털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근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소년 몸뚱이인 탓에 ‘반쪽짜리 사냥꾼’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카르 4세다.
그런데 여기서 더 약해지면?
조만간 ‘저주받은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5번째 희생자’란 타이틀이 관에 새겨질 것이다.
‘그럴 순 없지!’
무일은 97억짜리 여자친구가 330억 제값을 다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죽을 수 없다.
어려울 건 없다.
더는 ‘저주받은 검’이 아니란 것만 증명하면 된다.
그러면 233억 차익이 생긴다.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프로사냥꾼치고 매우 소박한 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육체단련을 하는 사이에 열흘이나 휙 지나갔다.
슬슬 연말이다.
올해도 작년처럼 본부에서 주관한 송년회의 산해진미를 음미하고 싶었지만, 무일은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어째서 참석하면 안 된다는 겁니까?!)
(미안해요, 카르 4세. 저는 상부의 명령을 하달하는 것뿐이라서 이유는 짐작도 안 가네요. 그래도 무료식사권 10장이 나오니 너무 애석해 하지 마세요.)
(그거, 참석자 전원에게 주는 거 아닙니까?)
(...미안해요.)
(크으! 1년에 단 한 번밖에 못 먹어보는 바닷가재가!)
여자친구의 비싼 몸값 덕분에 빚이 많은 무일에게는 생일보다 괴수대응본부 송년회가 더 값진 날이다.
덤으로 음주(飮酒)가 마음껏 허락되는 몇 안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한 호흡이면 무엇이든 매끈하게 토막 내는 흉흉한 여자친구를 둔 남자의 비애라고 할까!
숙취에서 깨어난 장소가 고문실일 수가 있다. 타당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사냥꾼은 곱게 죽여주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르 4세!)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궁상맞게도 ‘무료식사권 10장’에 벌써 작은 위안을 얻은 무일은 이틀 연기된 ‘자숙기간’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러려니 넘어갔다.
의심한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괴수대응본부가 ‘3급 사냥꾼 따위’를 상대로 무언가 안 좋은 음모를 획책 중이 아니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덤으로 괜한 부스럼으로 프로사냥꾼에게 찍히고 싶어하는 정치인과 권력자는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얼마 없다.
‘빨리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우편함에는 편지가 쌓여있다.
사냥꾼이 늘 귀한 일본에서 온 초청장도 보이고, 검도장 사범을 제안하는 중국의 사탕발림도 여전했다.
한국 좌우에 위치한 두 강대국 외에도 영국, 이집트, 인도, 미국 등에서 이민 오라는 편지를 보내왔고 심지어 신생도시국가에서 온 것도 있었다.
질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카르 4세는 프로사냥꾼이니 당연한 일이다.
프로사냥꾼 한 명이 키워내는 우수한 사냥꾼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차이는 의외로 크다.
계약자는 도시를 지키는 게 전부지만, 도시 밖으로 나가서 수렵하는 사냥꾼이 많을수록 식량 사정과 치안이 좋아지고 나라의 인구도 늘어난다.
아기를 쑥쑥 낳으면?
계약자가 태어날 확률도 높아진다!
“...송년회는 포기하고 해돋이나 보러 갈까?”
무일은 동해까지 안전한 경로를 머릿속으로 잽싸게 그려봤다.
사냥꾼이 아닌 민간인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대이동’이지만, 새해에도 죽지 않고 내년의 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건 대단히 중요한 행사다.
적어도 카르 4세에게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기술인 [예측]이랑 달리, 거의 100% 운(미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예감]은 ‘광적인 믿음’에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사람마다 [예감]을 깨우치는 방법도 다양하다.
‘귀찮지만 3년이면 약발이 다 될 때도 됐지.’
의심 한 점 없는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억지도 ‘종교’를 갖고 ‘교리’ 등을 배우는 사냥꾼이 부지기수다.
카르 4세도 따져보면 토속신앙인 ‘태양신’을 따르는 셈.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태양광이 괴수의 눈을 돌려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경험이 종교의 밑바탕이 됐다.
그 일을 계기로 ‘태양은 내 편!’이란 강력한 신앙심이 생겼다.
억지로 세뇌하다시피 형성된 믿음이 아닌 만큼 강력한 [예감]은 무일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고 현재에 이르러선 태양신의 열렬한 광신도가 됐다.
그런 것치고는 신을 대하는 태도가 참 무례하고 건성이지만 말이다.
(해돋이를 보러 간다고?)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장님.)
무일이 ‘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현재 둘이다.
특공대장과 경비대장.
그리고 사석에서까지 ‘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경비대장뿐이다.
(아니. 조심히 다녀와라. 출발 전에 본부에 들러서 오돈혁 선생님께 진단 한 번 받고. 길에서 요절하면 비싼 여친이 아깝잖아.)
(10년 넘게 충성한 저보다 이쪽이 더 귀중한 겁니까요….)
(너도 같은 남자보다는 요거잖아. 다 알면서 뭘 물어.)
경비대장의 동네아저씨 같은 말투에 무일은 수화기 너머로 미소 지었다.
카르 4세의 [반격]은 수많은 실전경험과 뛰어난 [예측], [예감]으로 완성됐지만, 그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져준 검술스승이 바로 이 남자다.
남들이 [공습]과 [투시]란 상급기술을 연마할 때,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예측]과 [반격] 연계기를 소개해줬다.
그게 정답이었음을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대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남자의 인사 따위 안 받으련다.)
인사를 받아준 녀석은 살아서 다시 못 만났다는 징크스가 있단다.
반대로, 인사를 차갑게 거절했던 녀석들은 다음번에 다시 인사하기 위해 높은 확률로 살아 돌아온다나?
밑져야 본전이다.
경비대장 임진철 나름의 인사법이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초짜들은 대장님에게 뭔가 큰 결례를 저지른 줄 알고 혼자 끙끙거리며 설레발 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행선지 신고는 끝났고…. 헌병대에도 연락해야 하나?”
절차가 참 귀찮게 됐다고 무일은 투덜댔다.
일단, 선례를 먼저 만들어버리면 이후에도 쭉 그렇게 해야 하기에 이번 해돋이는 보고 안 하기로 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문책받으면 그때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
숙식은 그때그때 현지조달.
강원도에 폭설이 내리기 전에 미리 동해 앞에서 대기 중인 편이 현명하다.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으로 태백산맥 한복판에서 소형차가 퍼져버리면 99% 사망이다.
동해 해변에 도착해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계약자처럼 막강한 우군이 없는 사냥꾼에게 안전한 계획이란 없다. 그래서 등장한 위기감지기술이 [예감] 아니던가.
불가능하지 않으면 일단 부딪쳐보는 것이다.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인 만큼 수입도 짭짤하니 마냥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다.
띠리링~♪~♬
‘...또 전화인가? 모르는 번호인데.’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본부로 1시간째 가던 무일은 휴대전화기에 찍힌 전화번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시작 번호를 통해 일본에서 온 국제전화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그에게 연락 줄 사람이 하나뿐이란 것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카레 짱~♥ 새해 복 많이 받아, 예요!)
카르세리안 레이소. 줄여서 카레! 참으로 놀라운 애칭이다.
하지만 ‘카르 4세’보다 은근히 정감 있어서 그냥 쓰라고 놔두는 중이다. 이 애칭으로 무일을 ‘카레 짱~♥’이라고 살갑게 부르는 여자는 지구 상에 단 한 명뿐이다.
숨겨둔 해외여친?
만나본 적도 없는데 여자친구는 무슨.
수위가 높은 사진은 좀 갖고 있지만 말이다.
(...유키 짱. 아리가또.)
(그건 감사인사야, 예요! 모르면 일본어 쓰지 마, 예요. 유키 짱이 한국어 잘하니까, 예요.)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말끝마다 ‘예요.’를 붙인다고 존댓말이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말은 정말 한국인 수준으로 잘한다.
반말을 쓴다는 전제하에.
(편하게 말해. 한국말 잘하는 유키 짱.)
(하잇! 그럴게, 카레 짱. 방금 우리나라랑 가장 가까운 한국땅에서 해돋이를 볼 계획이란 정보를 입수했는데 정말이야?)
(...본부의 보안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려줘서 고마워. 아리가또.)
한국의 기술력이 일본에 뒤처지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다.
겨우 5년 전.
하지만 그 5년 동안 도저히 메꿀 수 없을 만큼의 수준 격차가 생겨났다.
원인은 간단명료하다.
일본에는 계약한 용이 2마리나 있고 한국은 불미스런 사건으로 하나뿐인 용을 허망하게 잃었다.
【와이츠 / 8종 대형】
7종 괴수 레드군도 용이긴 하지만 MID를 상징하는 용은 아니다. 굳이 나누자면 레드군은 인간보다 조금 나은 지능을 가진 전투 타입, 와이츠가 진짜 지능 타입의 ‘전설의 용’이다.
가장 현명한 용이라고 칭해지는 와이츠.
일본이 보유한 2마리를 합친 것보다 똑똑했으니 말 다했다.
‘나라 꼴이 참 우습게 됐네.’
인류의 ‘제3 외국어’로 ‘한국어’를 꼽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다.
하지만 모래성이었던 셈이다. 모든 나라가 그렇지만, 용이 없으면 얼마든지 후진국으로 추락할 위상이다.
약 100년 전, 인류는 지구의 지배권을 괴수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증오스러운 괴수가 없는 인류를 상상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였다.
점차 ‘이젠 용이 없어도 될 것 같은데?’라는 오만함이 깃들기 시작한 ‘털 없는 원숭이’들에게 까불지 말라는 용의 철퇴!
와이츠가 한국을 떠나버린 것이다.
한국이 빠른 속도로 힘을 잃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카레 짱. 망명할 생각 없어?)
(없어. 그리고 한국은 아직 망하지 않았어. 간다면 이민이지.)
벌써 6년도 더 된 일이다.
정말 아무런 접점도 없는 일본인 여성이 친한 척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는 ‘프로사냥꾼’으로 불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지금처럼 수많은 나라의 ‘스카우트 제의’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작된 ‘유키 짱’의 유혹.
고객센터 아가씨의 사근사근한 친절처럼 인위적인 느낌은 없다.
그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카르 4세는 ‘내 사진♥’이란 파일명으로 보내온 익명사진을 진짜 그녀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
일본?
국토의 80%가 괴수밀집지대인 위험한 나라다.
사냥꾼이 계약자 못지 않게 대우가 좋을 수밖에 없다. 출산율이 사망률을 못 따라잡을 정도다.
(그럼 이민은?)
(마찬가지로 생각 없어. 일본 오타쿠 성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지만.)
(아키하바라? 정보부도 모르는 취미 발견! 카레 짱. 관광이라면 어때? 일단 일본에 와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유키 짱. 어째서 나 따위에게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지?)
처음 연락이 온 건 6년 전이면, 무일이 330억짜리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97억에 구매하고 막 들떠있을 때다.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겁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시기.
대규모 토벌이나 섬멸전 등을 밥 먹듯 참가하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던 시절이다.
그렇다고 눈부신 활약을 했느냐?
겸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전혀 아니었다.
외모와 체격은 지금이랑 달라진 게 없지만, 정신적으로 한참 미숙한 3급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카레 짱~♥)
(......)
(비밀~♥)
(끊는다.)
(조또맛떼!)
(...어린이날이었나? 망명 오면 대단한 선물 준다면서 낚았었지. 그 대단한 선물이 뭐냐고 물으니 비밀이라고 했었고.)
26살 어엿한 성인을 어린애 취급한 것도 짜증 났는데 그 선물이란 것도 비밀이란다.
화딱지 안 나는 게 더 이상했다.
슬슬 본부 앞인데 ‘망명’ 어쩌고 떠드는 것도 좋지 못하다.
불량식품(?)으로 사람을 어린애로 묶어둔 시점부터 애국심은 쥐꼬리만큼도 안 남았던 카르 4세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보다는 살만하다고 자위 중이다.
(...에쏘드)
(음?)
(카레 짱.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이 정도면 훌륭한 이민선물 아닐까?)
(......유키 짱.)
(하잇.)
(농담이지? 그런 터무니 없는….)
정말 터무니없는 제안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웃자고 한 농담이 아니었다.
(카레 짱. 일본의 계약자가 돼줘, 예요.)
< [2장-5] 부탁은 부탁인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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