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8화 (8/287)

< [2장-3] 부탁은 부탁인데…. >

통화를 마친 무일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쩌면 ‘끈질기게 질문공세를 퍼붓던 여기자’가 집 주소를 추적해서 잠입해있다가 지쳐 잠든 걸지도 모른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관리사무소에 뇌물을 뿌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밖에서 지샐 순 없지.’

당분간 사냥도 다니지 말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혹시라도 ‘유일한 증인’인 그가 비명횡사하기라도 하면 음모론이 돌면서 간신히 진정시킨 사건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안전에 신경 쓸 거면 수도권에 살게 놔두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이 동네는 전에 살던 곳보다 위험하다.

하늘에서 추락한 플라돈이 5평짜리 집과 집주인을 한꺼번에 깔아뭉개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명령은 내리겠지만, 지원은 일절 없으니 알아서 해!

...참 편리한 세상이다.

“정말로 그 끈질겼던 여기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다시 들어선 무일은 남의 침대에서 머리까지 이불로 뒤집어쓴 채 곤히 숙면 중인 여성에게 접근했다.

체구가 작다.

그 여기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

무일이 얼굴도 안 보고 불청객을 ‘여자’라고 확신한 이유는 별거 아니다. 두꺼운 겨울 이불로도 가려지지 않은 완벽한 몸매 때문이다.

계약자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흔들어 깨울까?’

거기까지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정말로 그 여기자라면 깨우는 순간부터 질문공세에 시달릴 게 분명하다. 아니, 그거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정말로 계약자라면?

집주인이 손님(?)을 덮쳤다는 식으로 흘러가면 끝장이다.

그럴 바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바닥에서 자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괜찮겠지.’

이 여자가 갑자기 암살자로 돌변하더라도 어느 정도 대처할 자신 있다.

저 가녀린 몸과 이불 사이에, 기관총이나 산탄총을 숨겨둘 공간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권총이나 단검 정도라면….

피곤했던 무일은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헉!”

하지만 잤다는 생각이 못 들 정도로 가파르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깼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습관적으로 껴안고 자던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쥐고 누운 자세에서도 신속하게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말이다.

“분명 조용히 있었는데 제가 깨운 건가요?”

“......”

침대 위에는 번데기처럼 이불로 온몸을 말고 얼굴만 빼꼼 내민 소녀가 있었다.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수많은 사선(死線)을 해쳐온 카르 4세의 사고회로가 꽁꽁 얼어붙진 않았을 것이다.

『소녀의 아름다움은 배려라는 걸 몰랐다.』

울어서 퉁퉁 붓고 충혈된 눈, 콧물을 자주 닦다가 헐어버린 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여기저기 부르터진 입술….

그 모든 요소를 아쉽지 않게 아우르는 계란형 얼굴은, 과장 조금 보태서 무일의 양손을 모아쥔 주먹이랑 그 크기가 비슷했다.

성형수술 없이 저런 완벽한 이목구비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통방통했다.

흐트러진 모습조차 매력적인 소녀가 말했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윤소영 양, 맞습니까?”

계약자의 국보급 얼굴을 5초씩이나 빤히 쳐다본 무례한 원숭이(한무일)를 용서해주신 용왕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손에서 떼어놓고 신속하게 무장해제 한 카르 4세는 시선을 천장으로 돌린 채 대화를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저를 봐주세요.”

윤소영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는 거 아니지?

무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 근처에 수호자가 대기 중이잖습니까.”

“은인을 변태랑 혼돈할 정도로 저도, 엘카르도 못돼먹지 않았어요. 부탁합니다.”

죽어달라는 내용만 아니면 거절할 수 없는 게 ‘계약자의 부탁’이다.

내 집에서조차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다니!

한탄이 절로 나오려 했지만, 무일은 전적으로 신용하는 [예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

주마등이 광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이건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위기 이전에 ‘계약자를 쳐다보면 큰일 난다.’라고 가르친 어른들의 조기교육 영향 같았다.

카르 4세도 일부 계약자는 그냥 평범하게 알고 지내는 편이다.

계약자의 예쁜 얼굴과 몸매가 닳도록 빤히 쳐다보며 자유롭게 대화한다. 성희롱해도 괜찮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이건 1종, 2종처럼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호자였을 때의 경우다.

4종도 벅찬데 7종?

윤소영의 부탁대로 마주 보긴 했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염불을 외우며 ‘불건전하다.’고 느낄 상황이 없도록 노력했다.

무일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집 주소는 정보부의 아는 언니에게 부탁했고요. 비밀번호는 이곳 경비아저씨에게 부탁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주셨어요.”

“그렇군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계약자가 ‘부탁’했다는데 어쩌겠는가?

집주인의 프라이버시와 재산권도 중요하지만, 서울을 1분 안에 말끔히 초토화할 수 있는 7종 계약자의 부탁이다.

최우선사항으로 지켜져야 하는 ‘지상과제’나 다름없다.

비밀번호보다 안전한 수동 키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현 시간부로 철회했다.

계약자가 부탁하면 이웃주민이 해머로 부숴서라도 문을 따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용왕님이 노려보면 안 들어줄 수 없겠지.

그때, 윤소영이 입술을 뗐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안 움직였어도 레드군의 주특기인 브레스라면 단번에 해결됐을 겁니다.”

전래동화로 그 위험성이 널리 알려진 용의 숨결.

도시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용의 공격을 받은 무수히 많은 유명도시가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는 15년 전에 일본 ‘홋카이도’가 해룡(海龍)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반파됐고, 2년 전에는 한국 인천항이 비룡(飛龍)의 위협으로 마비된 일이 있었다.

그런 용.

그리고 그런 용이랑 계약한 소녀가 말했다.

“대신, 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거예요.”

십중팔구 대규모 사상자가 났을 것이다.

계약한 괴수는 조금 자제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힘 조절이란 걸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섬멸(殲滅) 아니면 무시(無視)!』

『흑(黑) 아니면 백(白)!』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

괴수에게 힘 조절이란?

사람이 모기 날개만 골라서 맨손으로 뜯는 것만큼이나 번거롭고 섬세한 노동이다.

모기는 손바닥으로 짝!

대충 쳐 죽이고 말자는 주의랑 비슷하다.

“...사냥꾼 주제에 건방진 말이겠지만, 자책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안 할 수 있어요? 제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 텐데요. 흑!”

윤소영은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또 터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내가 울린 건가?!’ 싶어서 심장이 콩알만 해진 무일이었으나 다행히 레드군의 응징은 없었다.

이걸 어쩐다?

머리를 긁적인 무일은 달래기에 들어갔다.

“제 사견이지만, 윤소영 양이 나서지 않았다면 최은설 양은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계약자를 잃은 6종 괴수가 서울 한복판에서 날뛰었겠죠. 썬피스트를 제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훌쩍! 그건 최악의 가정이잖아요.”

이불에 눈물, 콧물 다 닦으며 윤소영이 반박했다.

무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최악이긴 하지만 가장 유력한 가정인 것도 사실입니다. 썬피스트는 6종 특수. 사막에서는 7종보다도 위협적이지만, 도시처럼 흙 한 점 구하기 힘든 장소에서는 5종보다도 약하고 기동력은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계약자이면서 괴수에 대해 잘(거의 전혀) 모르는 미소녀에게, 무일은 프로사냥꾼 ‘카르 4세’가 되어 차근차근 설명했다.

윤소영이 플라돈을 ‘돼지’라고 부를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지식결핍!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세상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괴수랑 계약한 탓에 그 아래가 보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솔직히 알 필요도 없고.

사냥꾼은 직접 몸을 움직여 싸우지만, 계약자는 수호자가 대신 싸워주기 때문이다.

“와아….”

“...그러니까, 윤소영 양이 신중하게 대처한다고 머뭇거렸으면 최은설 양은 수색대 녀석들에게 살해됐을 겁니다.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본부 남자 중에서 2번째로 잘 싸우는 집단이 수색대입니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건 녀석들에게 일도 아니죠.”

무일은 윤소영을 위로한답시고 내뱉은 빈말이 아니었다.

[예감]을 익히지 않은 비전투원(계약자 포함)을 암살하는 건 수색대원들에게 너무나 손쉬운 일이다.

괴수 서식지로 은밀하게 침입해서 괴수의 알과 새끼 숫자를 줄이고 생태계를 연구하는 일이 말처럼 쉽겠는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못할 짓이다.

그런데 그걸 밥 먹듯이 하는 집단이 수색대다.

“갑자기 뭔가 무섭네요.”

“네?”

“제 앞에서 눈을 감고 덜덜 떨거나 쉬쉬하던 남자들이 그런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들이라고 하니까요.”

“...부끄러운 일이죠. 괴수보다 사람을 잘 죽이는 사냥꾼이라니.”

괴수에 비하면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 연약하고 무력하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일은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6종 계약자 최은설을 앞에 두고 자신들이 더 강하다고 으스대던 그 수색대원들처럼 ‘착각 속에 사는 사냥꾼’이 본부에는 정말 많기 때문이다.

덤으로 ‘싹수없는 계약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24세기에 빼놓을 수 없는 여성우월주의에 물들거나 ‘교감 중인 수호자’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탓이다.

그렇다고 계약자를 죽인다니?

뒷감당도 못 하면서 저지르는 피해망상증 정신병자들이 실존한다.

“헤에~, 그렇게 말하니 역시 오빠는 오빠구나, 싶네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윤소영이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수명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성질 급한 용왕님이 언제까지 자비를 베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수틀리는 순간 끝!

창문을 깨든 지붕을 무너트리든(계약자가 있으니 이건 보류) 해서 단숨에 건방진 원숭이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있을 계획이지?’

무일은 ‘예쁜 폭탄’이 빨리 나가줬으면, 하고 빌었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용사와 왕자처럼 사내들이 미녀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이 척박한 세상에서 오래 살고 싶진 않지만, 개죽음도 사양이다.

염라대왕 앞에서 사망 사유를 ‘성희롱’이라고 답해야 한다면 이보다 비참하고 한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일의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가 못마땅했던 걸까.

눈을 계속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좌우로 굴리는 오빠에게 소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오빠와 제 입장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지만요. 너무 조심하시는 거 아니에요? 엘카르는 신사라고요.”

윤소영은 ‘사신(死神)’을 뒤집어서 ‘신사(神死)’로 잘못 말한 것 같다.

그렇게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목숨은 하나뿐이다.

계약자를 밀쳤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사람을 가차 없이 뭉개고 찢어발긴 용왕님에게 신사적인 대우를 기대하면 안 된다.

윤소영의 말처럼 젠틀맨이긴 할지도?

『괴수는 미녀에게 한없이 관대하다.』

아름다운 레이디 한정으로 신사다운 건 분명하다.

그런 상식적인 이유를 고려하더라도, 윤소영의 지적처럼 무일이 ‘고위계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남들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몸에 밴 습관과 숙련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괴수를 많이 죽인 사냥꾼일수록 계약자 앞에서 언행을 조심합니다.”

“어? 왜요?”

“괴수의 눈에 사람이 원숭이로 비친다면, 프로사냥꾼은 날카로운 발톱 달린 원숭이. 조금만 수틀려도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격합니다. 그건 계약한 괴수도 예외가 아니죠.”

“헤에~.”

“...그러니 협조 부탁합니다.”

사냥꾼들은 이걸 [업보]라고 부른다.

딱히 전문성이나 가르침을 요구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냥 괴수를 많이 잡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숙명(宿命)이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괴수를 ‘도발’하게 된다.

괴수의 초월적인 본능은 상대의 강약과 관계없이 ‘동류를 가장 많이 살해한 인간’을 최우선 위협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괴수 몇 마리 죽였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숨통을 조이는 [업보]이기 때문이다.

“은근히 잘난 척?”

“그럴 리가요. 제가 10년 동안 잡은 괴수를 다 합쳐도 윤소영 양이 하루에 잡는 숫자나 질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간 시간과 돈, 위험성까지 고려하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치킨 장사나 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정신적으로 훨씬 이롭습니다.”

이 아가씨만 만나면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유일한 안식처인 ‘내 집’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무일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리고 이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순진무구한 계약자와 대화해보기도 참 오랜만인 까닭이다.

“오빠는 하루에 몇 마리씩 잡는데요?”

“흠….”

“어머! 너무 많아서 계산 불가능한 수준?”

“평균 0.4마리입니다.”

“소수점?!”

많긴커녕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사냥꾼이라고 해서 괴수만 사냥하는 건 아니다.

“하루에 1마리를 채우는 녀석들은 본부 특공대뿐입니다. 괴수랑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 수 없다는 열혈사나이들이죠. 매일 자신들의 운을 시험합니다.”

힐끔힐끔 꽤 오래 봐서 그런가?

윤소영의 예쁜 얼굴에도 제법 익숙해진 무일이었다.

대단한 미소녀임은 분명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네.’라는 무례한, 당장 살해당해도 할 말 없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다.

다행히도 소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리 눈치 줘도 자기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지만.

“......무일 오빠.”

“네.”

“전에 사람을 죽여본 적 있으세요?”

얘기하는 동안 조금은 기분이 풀려 보이던 윤소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무일 본인이 그랬듯, 저 나이 또래에 할 법한 좀 더 사춘기 소녀다운 고민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생활을 살짝 동정했다.

아름답게 태어난 게 죄일까, 축복일까?

무일은 축복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용이 지키는 탑 꼭대기에 갇힌 공주님’처럼 미모를 얻은 대신 자유를 조금 잃은 것뿐이다.

그 자유를 좀 빼앗기면 어떤가!

예뻐지고 싶어서 성형수술하는 여자가 99.9%다.

“소생할 가망이 없는 동료의 고통을 덜어준 적은 몇 번 있었습니다.”

“아….”

그중에는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일 뿐이기도 하다.

“멀쩡한 사람을 죽여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별 차이는 못 느꼈습니다. 저는 괴수나 인간을 차별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류에 해를 끼치는 존재를 말살할 뿐.”

인간을 공격하는 인간 따위는 괴수랑 다르지 않다.

그것이, 맨몸으로 13살에 ‘가출’한 소년의 신념이었다.

무일의 뜻밖의 발언에 긴장한 걸까?

윤소영은 코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오빠의 말살대상에 저도 들어가나요?”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로 윤소영 양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수호자는 계약자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편리한 사냥개가 아닙니다. 계약자가 하는 일은 괴수가 인간을 적대하지 않도록 말리는 정도죠.”

괴수가 계약자의 말대로 움직였다면 사역마(使役魔)’라고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수호자’다.

그건 호칭 그대로 ‘계약자만’ 수호하기 때문이다.

수호자는 계약자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미녀가 좋아서 함께하는 것뿐. 노예나 애완동물이 아니다.

계약이란 형태로 정신을 교류하여 계약자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소원이나 바람을 마음 내키는 대로 도와주는 정도다.

계약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하지만 간혹 착각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건 그렇지만요….”

“윤소영 양을 비롯한 계약자들에게 사면권이나 면죄부가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 정도는 알아요! 나라에 도움이 돼서잖아요!”

바보취급 하지 말라는 듯이 뾰로통하게 말하는 윤소영.

그 사소한 말투 변화 탓에 무일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는 걸 그녀는 알까?

무일은 흰머리가 늘어나는 기분으로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윤소영 양은 영재교육을 받았는지 똑똑하시네요!”

“...틀렸다고 얼굴에 쓰여있어요.”

소녀의 기분만 더 상하게 한 모양이다.

눈치가 이상한 쪽으로 발달했다.

“하, 하하….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국민을 ‘세입자1’로 계산하는 어른들의 사정이란 겁니다.”

“어려운데요?!”

윤소영은 이 애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 못 했다.

머리를 살짝 긁적인 무일은 간단명료하게 가르쳐줬다.

“계약자가 매일 살리는 목숨이, 실수로 죽이는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입니다. 간단한 덧셈 뺄셈이죠.”

사람 목숨을 숫자로 저울질하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어린 계약자에게 자극적인 얘기는 삼가는 편이 생명연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무일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바로 얼마 전에 그 은행에서, 선악(善惡)에 관계없이 사람을 숫자로 계산한 ‘어른’에는 그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떳떳하면 어째서 본부는 거짓말해요?”

< [2장-3] 부탁은 부탁인데….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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