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7화 (7/287)

< [2장-2] 부탁은 부탁인데…. >

“아닙니다. 겁쟁이처럼 숨어있던 덕분에 시간이 무척 넉넉했습니다.”

무일에게는 당연하게도 괴수 같은 청력과 시력이 없다.

은행강도를 찾는답시고 은행손님 수를 미리 파악해뒀었고 출입문으로 한 번에 빠져나갈 수 있는 머릿수를 계산해서 뺐을 뿐이다.

끝으로 레드군이 난입한 시간을 대입해서 어림짐작!

마지막은 확실히 [예측]의 영역이긴 했다.

‘하지만 최대한 허풍을 떨어놓는 게 좋겠지.’

헌병대에서 원하는 건 입막음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란 민주주의국가는 사람을 죽여 진실을 묻을 만큼 막 나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한국에서 330억짜리 절단기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소지한 사람은 꽤 되지만 유명인(사냥꾼 세계에서)은 카르 4세, 한무일뿐이다.

그가 헌병대로 끌려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자네는 괴수가 아닌 사람 6명을 죽였네.”

“...살인자를 처단한 것도 죄가 됩니까?”

“그들 대부분이 살인미수에 그쳤지.”

“아!”

무표정한 헌병대장의 지적에 무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거의 모든 살인은 괴수가 했다.

계약자의 위기에 흥분한 레드군의 소행이었다.

반대로 무장한 수색대 13명은 6종 계약한 1명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물론, 폭탄을 사용한 시점에 인명피해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놈들이긴 했지만.

결과만 따지면 그들은 ‘살인자(殺人者)’가 아니었다.

살인미수도 큰 죄지만….

‘고리타분한 헌법 같으니!’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한국 헌법은 꽤 유들유들한 편이다. 문제는 그 유연성이 권력과 다수, 시류의 편이라는 점.

무기를 소지한 사냥꾼의 살인죄는 크다. 정상참작(情狀參酌)하더라도 여친에 사용제한이 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카르 4세가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못 쓰면 어쩌라고?

외통수였다.

하지만 굳이 살인미수를 들먹일 필요가 없음에도 헌병대장이 언급했다는 건, 타협의 여지를 남겨뒀다는 뜻이다.

무일은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썩 내키지 않지만 말이다.

“협조할 마음이 들었나?”

“...대장님이 직접 오신 걸로 봐서는 무리한 요구일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어쩔 수 없지. 민간인 사상자만 서른다섯이었네. 부상자는 압도적으로 많지! 그 대부분이 있지도 않은 정신병으로 의료보험과 국가보상을 노린 거겠지만.”

“......”

“흠흠! 아무튼, 조국을 지탱하는 정치인과 경영인이 집중된 여의도에서 35명이나 죽은 대사건일세. 이 때문에 우리 헌병대 위신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 아나? 이 내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해임될 뻔했다네.”

무일은 진심으로 헌병대장이 안 잘린 게 신기했다.

하지만 그의 입장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도심의 평화로운 은행에서 갑자기 소란을 일으킨 건 13명의 수색대원이 아니라 7종 계약자와 수호자였다.

헌병대에서 말리거나 제지할 수 없는 신분과 괴수였다.

그러니 굳이 잘잘못을 따지면, 성급하게 나서서 일을 크게 벌인 윤소영에게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죄를 물어서 어쩌자고?』

사형은커녕 일주일 징역형도 못 내리는 게 현실이다.

계약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폭주한 7종 괴수 레드군을 누가 막는단 말인가?

막더라도 그 여파가 간단할 리 없다.

이미 목숨을 잃은 35명의 혼령을 달래려다가 서울시민 35만 명이 저승길 행렬에 동참하는 수가 있다.

“제가 어떤 광대놀음을 하면 되겠습니까?”

“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어쩔 수 없지요.”“지금부터 말해주지. 카르 4세는 헌병대 소속이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무일은 도심이 아닌 수도권을 순찰하는 경비대 소속이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 모자를 쓰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헌병대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도 무언가 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뭐…. 살인범으로 지목 안 해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겠죠.”

“크흠!”

살인범 중 하나(카르 4세)는 용감한 헌병대원의 총알에 맞고 죽었다. 이 정도로 깔끔히 마무리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무일을 이 지하감옥에서 총살하면 대충 아귀가 맞아떨어지리라. 감시카메라?

필요할 때만 작동하는 물건이 감시카메라다.

하지만 ‘피를 뒤집어쓴 사냥꾼 소년’을 목격한 사람들의 눈까지 가릴 순 없다.

“저는 직장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헌병대 수입이 경비대를 못 쫓아갈 텐데요? 그것만은 생계랑 관련된 문제라서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지방으로 이사 가기 때문에 헌병대에서 머물 수도 없고요.”

“모든 대원이 수도에만 있는 건 아닐세. 이 자리에서 읽고 먹게.”

헌병대장은 무일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꽤 번거롭지만 그만큼 누군가에게는 중요하다는 방증이었다.

“......대우가 상상 이상인데요?”

“읽어봐서 알겠지만, 이번 일은 내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게 아닐세. 계약자 윤소영을 비난하는 여론, 수호자 레드군의 사형 주장, 수색대장 해임, 헌병대 개혁, 괴수대응본부장관 대국민사과…. 무지한 국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나?”

이걸 정말로 실행했다가는 대한민국 국력은 30%쯤 깎인다.

국민이 무섭다는 헌병대장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헤에~. 용케도 전 빠졌네요.”

“윤소영 양에게 감사하게. 계약자치고 양심이 살아있다고 할까. 아직 어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네. 감사인사를 전할 기회가 온다면 그러겠습니다.”

7종 계약자인 그녀가 변호해준 모양이다.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일이 역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계약자가 ‘사냥꾼 따위’를 신경 써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네.”

“경청하겠습니다.”

“7종 계약자 윤소영은 폭탄테러를 저지하고자 은행에 진입.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은 6종 계약자 최은설. 폭발물이 터지기 직전에 수호자 레드군이 온몸으로 막았으나 7명의 사상자 발생. 그 직후에 난입한 테러리스트들은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시민 28명을 살해. 여기까지 이해했나?”

“네.”

귀한 재원인 윤소영의 잘못을 축소하는 게 주목적인 모양이다.

역으로 ‘시민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계약자’란 식으로 덮어가고 있었다.

“순찰 중이던 헌병대원 카르 4세는 수호자 레드군과 썬피스트를 도와 13명의 테러리스트를 단죄. 공적은 은행 출구에 서 있던 둘을 양단. 이후, 수호자의 공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은행 밖으로 이동. 그리고 본부에 보고하던 중에 탈진. 끝이네.”

“...시민들이 이걸 수긍했습니까?”

목격자는 물론이고 그 와중에 증거사진을 찍은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헌병대장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7종 괴수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나? 레드군이 맨 처음에 죽인 7명이 성가시지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게. 생존한 은행원들은 책상 밑에 숨어있느라 내부사정을 전혀 모르지. 유일한 증인은 용감한 헌병대원 카르 4세뿐이란 걸세. 알겠나?”

“알겠습니다.”

“좋아. 말이 잘 통하는 친구군. 나중에 술 한 번 사지.”

무일에게 유리한 조건만 제시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대한 빨리 헌병대 업무를 숙지하고 기자들의 질문공세에도 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복잡한 가정사가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호기심 왕성한 기자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그의 신상정보가 나날이 까발려지리라.

그냥 경비대 소속이라고 하면 그렇게 깊이 파고들지 않겠지만, 있지도 않은 헌병대원이란 이중신분이 기자들의 의심병을 자극할 게 분명하다.

“하아….”

거추장스러운 헌병대 예복을 입은 무일은 닷새 만에 귀갓길에 오를 수 있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서류조작부터 말실수를 노리는 기자회담까지…. 바쁜 일정을 단시간에 소화해내느라 기진맥진했다.

“술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선배님!”

“한가해지면 꼭 부탁하게, 후배.”

헌병대 자체가 괴수대응본부에서 으뜸가는 ‘한직’인데 그보다 더 심한 보직이 헌병대 내에 존재했다.

서울외곽순환도로를 돌면서 괴수의 침입을 감시!

이렇게 말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차량이 잘 빠진 스포츠카로 변하는 순간, 더는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된 까마득한 후배가 말했다.

1급 사냥꾼이니 햇병아리나 다름없다.

“제 전화번호와 이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발설하고 다니지 마. 오랫동안 함께 해온 걸로 되어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세금도둑이 따로 없는 이 헌병대 청년의 이름은 문세웅.

헌병대장 문장춘의 둘째 아들이다.

2급 사냥꾼이었던 첫째 아들은 ‘청계천 학살사건’ 때 전사했다. 시민들이 대피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으나 본인의 목숨은 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장남이 자랑스럽다?

웃기는 소리다.

야생괴수를 눈앞에 두고 도망쳤다는 비난을 사더라도 살아있는 아들을 원한다. 살아서 훈장을 달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날의 비극으로 상심이 컸던 문장춘은 하나 남은 아들을 안전한 외부로 돌렸다.

아주 교묘한 작전이다.

명목상이지만, 괴수의 출몰이 잦은 수도권에서 아들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헌병대장의 경력에 흠이 되진 않는다.

그러면서도 스포츠카란 탈출카드를 줘서 안전을 도모했다!

부우우우우웅!

승차감을 무시하고 속도에만 치중한 차종이라 그런지 떠나는 소리도 요란했다.

하지만 저 정도는 돼야 괴수를 따돌릴 수 있다. 물론, 도로가 막히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깔려야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스포츠카네.”

땅속에 서식하는 괴수를 자극할 수 있어서 사냥꾼들은 쉬쉬하는 제품이지만 속도광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카다.

차종은, 나브랑모스 레비터(금방 지치는 사냥개).

비포장도로에서는 중고차보다도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듯한 직선도로에서는 5종 괴수보다도 빠르다.

그런 패배감에 젖어있길 잠시,

본부에서 무상으로 임대 해준 소박한 주택 앞에 섰다.

‘비밀번호 키는 싫은데….’

사냥꾼쯤 되면 멀리서 훔쳐보는 것만으로 남의 집 비밀번호를 암기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다.

들여놓은 가구나 귀중품이 없기에 아직은 괜찮지만, 조만간 수동 키로 바꿔야겠다고 다짐한 무일은 신속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삐삐삐삐삐, 끼이이익--.

분양받은 5평짜리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

성벽 역할을 대신하는 수도권 주거지답게 주민(미끼)의 편의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누가 이 위험한 곳에서 살려고 하겠는가.

고급스러운 옷장과 장롱, 신발장, 책상, 컴퓨터, 침대, 여자. 예상했던 그대로다.

......여자라고?

무일은 사냥꾼의 날렵한 몸놀림으로 현관 밖까지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집 주소.

“514동 206호, 맞는데?”

비밀번호까지 일치했으니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 처음 들어가는 새집에 여자친구(없다.)도 아닌 외간여자가 떡하니 자고 있으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부에서 이미 입주자 있는 집을 분양해준 걸까?

혼자 꿍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한 무일은 괴수대응본부 민원과에 연락했다.

(무슨 일인가요, 카르 4세.)

연락처가 본부에 기록되어 있기에 인증은 물론이고 인사마저 생략하고 바로 본론을 꺼내는 민원과 텔레마케터 여성.

민간인이랑 차별한다고 투덜댈 법도 하지만, 사냥꾼들에게는 이게 관례다.

괴수가 덤벼드는 긴급상황에서 한가하게 인사치레가 오갈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는 전달하지 못하고 인사만 하다가 죽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친절, 또 친절이다.

카르 4세가 말했다.

(분양받은 집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이상하네요. 난방과 에어컨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고 가구는 최근에 유행하는 신상품-, 아! 컴퓨터가 마음에 안 드셨나요? 컴퓨터는 이전 집주인이 1년 정도 사용하던 겁니다. 상태가 좋아서 놔뒀는데 찜찜하시면 내일이라도 바로 교체해드릴게요.)

(......)

들어보니 빈집이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무단으로 침입해서 태평하게 자는 여자는 누굴까?

(한무일 씨?)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이전 집주인이 지금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는 않겠지요?)

(당연하죠. 죽었는걸요.)

(아, 네.)

무서운 소리를 태평하게 하는 본부 민원과 상담원!

사냥꾼의 사망소식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듣는 그녀에게 사람의 죽음이란 그리 먼 얘기가 아닐 것이다.

역으로 너무 가까운 게 아닐까?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번호도 한 번 바꿨으니까요. 이전 집주인이 관에서 뛰쳐나오더라도 안전하답니다. 그게 궁금해서 연락 주신 건가요?)

상담원은 반쯤 농담으로 한 소리겠지만, 같이 웃자고 한 말도 아니다.

집주인이 관에서 정말 뛰쳐나올 수 있는 까닭이다.

화장(火葬)했다면 괜한 기우겠지만….

시체를 조종하는 괴수를 만나면 그날 일진은 안 좋다고 보면 된다.

(카르 4세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비싼 애인을 둬서 마음고생이 심하시겠어요. 도난이라도 당하면…. 최근에 터진 사건에 휘말리신 것도 그렇고.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 [2장-2] 부탁은 부탁인데….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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