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4] 제 이름입니다. >
“은행 문 닫기 전에 가봐야 해서 사양할 처지가 아니네.”
신용카드 긁듯 외상에 맛 들일 순 없다.
무일은 어깨동무를 풀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친구에게 끌려가듯 따라갔다.
목적지는 정찬호의 개인공방.
방주인을 닮아서 이곳도 썩 보기 좋진 않았다.
“저번처럼 3D 젖가슴 훔쳐보다가 4종이랑 또 싸웠어? 장갑은 어쩌고 손은 그 모양이래.”
“장갑 없이 싸웠으니 이 모양이지.”
반론을 포기한 무일은 필요한 대답만 했다.
정찬호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훈계하듯 말했다.
“여친을 너무 믿는 거 아니야? 한 번이라도 바람피우면 죽는 건 너라고. 나는 그년의 바람기가 카르 4세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친구의 표현은 저질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에 와 닿았다.
무일은 강보라가 소독약으로 떡칠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미안.”
“죽을 뻔한 건 넌데 왜 사과해?”
사나이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정찬호는 심장까지 훈훈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찬호야. 외상으로 장갑 하나만 줘. 3개월 할부로.”
우정을 개뿔!
젊은 정비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쓰던 건 어쨌는데? 괴수가 씹어먹기라도 했어?”
“불도저가 먹었어.”
“불도저? 해안도시를 깔끔하게 밀어버린다는 9종 달팽이? 한국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정말로 나타났다면 이렇게 남자 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 한가롭게 대화하고 있진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호주 시드니를 반쯤 쓸어버린 달팽이 괴수가 있다.
그 살아있는 재앙을 막는다고 전 세계가 한마음으로 달려들어서 간신히 퇴치했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오래된 사건도 아니다.
겨우 5년 전에 있었던 참극이다.
그 일로 호주는 수많은 계약자와 사냥꾼을 잃고 개발도상국으로 밀려났다.
“아니, 진짜 불도저.”
무일은 오늘 있었던 불행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플라돈이 앞마당에 떨어진 일부터, 레드군과 계약자 윤소영을 만난 것까지.
괴수종합보험에서 나온 아저씨랑 친해졌다는 ‘당연한 얘기’는 생략했다.
하지만 나눴던 얘기는 그대로 전했다. 이건 아는 게 많은 똑똑한 친구의 조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미 도장 찍고 끝난 일이지만.
“시험도시라!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데?”
중요한 단어를 생략한 ‘생체실험도시’가 아닐까.
정찬호는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한없이 진지했다. 얼마 안 남은 친구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를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놈은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무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했다.
“어쩔 수 없잖아. 반값이라는데.”
“야! 반값 좋아하다가 몸뚱이가 반으로 나뉘는 수가 있어. 한무일! 너는 ‘카르 4세’지 ‘카르 4종’이 아니야.”
사냥꾼은 괴수가 아니다.
괴수를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이 있더라도 그건 만반의 준비를 했을 때뿐이다.
사냥꾼도 결국은 인간이다.
사소한 실수로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 나약한 생명체.
“...개그였다면 정말 최악이었어, 찬호야.”
“헉! 그 정도로 형편없었냐?!”
시답잖은 농담으로 치부하며 마무리했지만, 위험하다는 건 분명했다.
모든 결정을 본능에 의존하는 무일이랑 달리, ‘정비과 에이스’는 친구가 모르는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서울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연이은 실종사건, 시신 없는 관, 사냥꾼 행방불명, 계약자 범죄조직…. 그런 어수선한 시기에 뜬금없이 신도시? 그것도 반쯤 비밀리에?’
카르 4세의 [예감]도 경종을 울렸다고 했다. 근거리에서 4종 괴수의 기습에 [반격]까지 가한 프로사냥꾼이 말이다.
사냥꾼은 준비돼야만 싸울 수 있다.
그런데 무방비한 상태에서 프로칸의 공격을 막았다.
전신마비였던 본인은 치료에 필요한 수술이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지만, 그 진실은 파헤쳐보면 명백한 해부였다.
우연치고 너무 신통방통해서.
“...찬호야. 뭔데?”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카르 4세. 내게 무슨 말을 기대한 건데. 살아있는 여자친구라도 소개해주리?”
“아니.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는 얼굴 같았거든.”
이거다!
카르 4세의 [예감]과 [예측]은 무시무시하다.
과학자들이 달려든 이유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는 희생돼도 괜찮다는 뒤틀린 사명의식을 가진 애국자들은 그나마 인간적이다.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만행도 태연하게 저지르는 미치광이들은 정말 위험하다.
그럼에도 카르 4세가 멀쩡히 살아있는 이유?
이미 그는 조국의 광기(狂氣)에 한 번 희생됐었기 때문이다.
폐기된 실험의 생존자!
그 희생자가 또다시 실험의 피해자로 전락해서 죽는다면 한국은 이번에야말로 국제사회에서 매장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조금씩 손을 대는 것 같지만.’
정찬호는 이 사실만은 친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만약 눈치챈다면, 괴수대응본부의 수많은 천재가 카르 4세의 ‘흉흉한 여친’에게 가차 없이 썰릴 것이다.
정당방위란 명분이 있기에 공권력으로 막을 수도 없다.
그걸 제지하려고 하면 탄압으로 받아들인 사냥꾼들이 일제히 봉기할 테니 말이다.
카르 4세는 프로사냥꾼.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이자 대선배로서, 후배뿐만 아니라 추종자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하게 들리겠지만….
서울 시민들은 ‘카르 4세’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사냥꾼 이름을 기억할 시간에 ‘게임이벤트공지’나 한 번 더 읽는 편이 낫다고 주의랄까.
하지만 괴수대응본부에서 ‘카르 4세’를 모르면 간첩이다.
아니면 4종 이상의 ‘고위 계약자’던가.
그녀들은 ‘나약한 남자’ 따위는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다.
“내년에 완공이라더라.”
이런 실없는 발언이나 일삼는 친구가 ‘대한민국 사나이들의 자존심’ 중 한 명이라니!
정비과 엄친아 정찬호는 질색하며 대꾸했다.
“야! 주소를 잘못 찾아왔어. 나는 정비과지 정보과가 아니야!”
굳이 언제 완공이라고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무일이 언급한 이유는 실험도시에 대한 정보를 모아달라는 우회적 부탁이다.
이에 앓는 소리를 하는 정찬호였지만 ‘못 한다.’고는 절대 안 했다.
“장갑은 이전이랑 비슷한 거면 돼.”
“...카르 4세. 3급 사냥꾼이면 3급에 어울리는 장비를 써라. 너는 RPG 게임으로 치면 공격력 999에 방어력 0인 쓰레기라고.”
“아무리 그래도 친구에게 쓰레기가 뭐냐, 쓰레기가.”
불만을 토로해보지만, 겉모습은 누가 봐도 ‘성인식 이전의 소년’인 무일의 행동은 누가 봐도 투정이었다.
그와 반대로, 세상의 모든 찌든 때를 몸소 다 겪은 것처럼 바짝 삭은 청년 정찬호는, 어른스럽게 웃으며 어린애 달래듯 말했다.
“이걸 써라. 너의 저질스러운 방어력이 10 정도 오를 거다.”
“얼마야?”
“성능보다 가격이 우선이냐, 넌?!”
“어쩔 수 없잖아. 현실도 RPG 게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세상을 구원할(혹은 구원한) 전설의 용사도 돈이 없으면 물약조차 살 수 없다.
입으로는 ‘용사님, 용사님!’ 거리면서 한 푼도 안 깎아주고 제값 다 받아 챙기는 깐깐한 마을주민들처럼.
이래서야 세상 구할 맛 나겠는가?
“...카르 4세. 예시가 틀렸어. 너는 용사가 아니잖아.”
100년 전, 괴수의 침공을 막아낸 용사는 없었다.
대신, 아름다운 ‘공주님’이 있었다.
그녀들은 RPG 게임이랑 다르게 수많은 혜택과 사치를 무상으로 누리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공짜로 치부하기에는 밥값을 확실히 해내고 있어서 뭐라 할 수도 없다.
“큭! 정곡을 찌르네.”
계약자가 용사라면 사냥꾼은 ‘병사1’이다. 그는 프로사냥꾼이니 반올림해서 ‘기사1’ 정도 되지 않을까.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걸리적거리는 떨거지!
친구란 녀석에게 현실을 지적받은 무일은 한숨을 내쉬며 새 장갑을 착용해봤다.
정찬호가 으스대듯 물었다.
“어때? 훌륭하지?”
“제법인데…?”
싸구려만 사용해온 무일에게 이 장갑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마치 착용하지 않은 것처럼 얇고 편해서 식사 중에 벗어놓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만큼 내구력이 걱정됐지만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한두 번 휘두르면 못 쓰게 될 물건을 친구에게 팔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결과적으로 가격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 빚쟁이의 숙명이었다.
“싸게 백만 원.”
“...진심? 겨우 그뿐이 안 한다고?”
이 또한 비싸다고 할 수 있지만, 괴수 가죽이란 점을 고려하면 헐값이나 다름없다.
최소 천만 원쯤 각오한 친구의 놀란 음성을 들은 정찬호는 피에로처럼 입꼬리를 좌우로 찢으며 말했다.
“그만큼 자주 수선해야 해.”
“뭐야! 그럼 쓸모없잖아!”
“...너는 자주 정비과를 들르며 최신장비정보를 들을 필요가 있어.”
정찬호는 이 구두쇠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됐다.
물론, 숫자만 들어도 ‘헉!’ 소리가 나는 97억짜리 여친만 보자면 자린고비로 치부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점점 줄어드는 지기(知己)들을 생각하면 부디 좋은 장비를 써서 생존율을 올려줬으면 하는 게 젊은 정비사의 바람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비닐장갑을 주면 어쩌자고!”
“자자, 좋게 생각해. 프로칸 허물로 만든 거라 방수도 되고 독극물에 대한 내성도 강해. 단점이라면 역시 얇아서 오래 못 쓴다는 건데…. 일격필살을 선호하는 너라면 장갑이 망가지기까지 오래 걸릴 거야.”
“......총알도 막을 수 있어?”
사냥꾼이라고 해서 괴수만 상대하는 건 아니다.
괴수보다 무서운 적은 같은 ‘인간’이다.
“네가 여친 사려고 피눈물 흘리며 판 녀석이랑 비슷한 화력이라면 2방 정도는 거뜬할 거다. 이후에는 행운의 여신이 따라와야 할 테지만.”
“호오?”
1km 거리에서 25mm 강판도 뚫을 수 있는 대구경 저격까지 막는다는 소리였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도 그렇지만 MID 군수품은 자연과학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용의 산물’인 거겠지만.
“하지만 완충효과는 적어서 피멍이랑 탈골은 각오해야 할 거야.”
“좋아.”
요즘 같은 시대에, 방패나 방탄조끼로 공격을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피하지 못하면 죽을 뿐.
갑옷이나 투구 같은 건, 즉사(卽死) 확률을 줄여주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장갑 이름은…. 가르쳐줘도 금방 까먹겠지? 망가지면 대기표 끊지 말고 내 사무실이나 개인공방으로 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기다려. 감시카메라가 사방에 설치되어 있으니까 슬쩍할 생각 말고.”
“찬호야. 넌 도대체 나를 뭐로 아는 거냐?”
“생일 때만 볼 수 있는 중딩.”
“와! 미남으로 못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인신공격이냐!”
미남이 아니라고 투덜대지만, 무일도 제법 괜찮은 얼굴이다.
본인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싫어하지만.
무일은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동갑내기 친구의 손을 쳐냈다.
그도 원해서 이런 ‘어린이 체형’이 된 게 아니다. 안 그래도 괴수보다 몸집이 작은 인간인데 성인에 한참 못 미치는 그의 체구는 약점 그 자체다.
전도유망한 카르 4세에게 [반격]에만 특화된 ‘반쪽짜리 사냥꾼’이란 불명예가 따라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반쪽짜리가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것도 놀랍지만 말이다.
그가 완벽한 어른이 됐다면 어땠을까?
카르 4세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다.
얼마나 대단할까, 하고.
“젊어 보이고 좋지. 안 그래?”
“성장이 멈출 거면 좀 더 큰 후에 되던가! 너처럼 늙은 녀석이, 술 마시거나 운전할 때마다 주민등록증을 꺼내야 하는 내 심정을 알 리 없지!”
“푸하하하! 기억난다, 기억나!”
배꼽을 잡고 웃는 정찬호.
희비가 갈리는 수많은 일화가 있었다.
“작작 웃어! 내가 그때 미쳤던 게 분명해. 돈이 필요하다고 임상시험에 지원하다니….”
사냥꾼으로 데뷔하려면 실력 이전에 좋은 장비가 필수다.
즉, 돈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 많은 사람이 사망률 높은 사냥꾼 같은 직종을 택하겠는가? 그래서 사냥꾼 대다수가 국가에서 대놓고 모집하는 ‘인체실험’에 지원한다.
13살에 가출한 한무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운이 안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좋게 생각해. 그렇게 번 돈이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을 거야.”
“그랬겠지…?”
“국가에서 보상이랍시고 매달 보내주는 성장촉진제는?”
“알약 색이 계속 변하는 걸로 봐서는 불량식품의 연장선이야. 이놈의 나라는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괴수유인용 기니피그?”
계속 말씨름해봐야 기분만 더 나빠지겠다고 생각한 무일은 발길을 돌렸다.
웃으며 대못을 박는 나쁜 친구지만, 그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려줄 녀석인 걸로 카르 4세는 충분히 만족했다.
“죽지 마라.”
“늙지 마라.”
< [1장-4] 제 이름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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