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4화 (4/287)

< [1장-3] 제 이름입니다. >

괴수의 피에 감염되고도 미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무일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요. 그랬으면 저도 수류탄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겠죠. 이건 적당히 미치는 [자결]이라는 기술입니다. 유사시에 살인충동을 자신에게 돌리는 암시, 세뇌의 일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본 사무라이 할복 비슷한 건가?”

“네. 연습하다가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괴수대응본부에서 무일에게 ‘카르세리안 레이소’ 사용인가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든 철판이든 두부처럼 썰어대는 절단기를 아무에게나 맡길 순 없잖은가?

유선형 스포츠카, 아크라시무스 파모라가 멈췄다.

“다 왔다.”

“감사합니다.”

“그 흉흉한 기술이 있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꼼꼼히 검사받아라. 하나뿐인 목숨이 자살로 끝나면 억울하잖아.”

“네. 충고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박 대리님.”

“큭! 결국, 대리냐.”

오는 동안 친해졌지만, 도저히 ‘형님’이라고는 못 한다.

강산이 2번 바뀌고도 남을 세대차이는 남자들의 우정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의무대(Medical Science Center)』

과하다 싶을 만큼 거대한 간판은, 과시라기보다는 코앞에서 길 잃고 억울하게 죽지 말라는 안내표지판 같았다.

계약자에게 의무대는 ‘피부관리과’의 다른 이름이지만, 사냥꾼에게는 생명이랑 직결된 진짜 병원이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절로 긴장된다.

“어서 와. 카르 4세.”

“안녕하세요. 오늘도 역시나 다쳐서 왔습니다.”

무일은 씩씩하게 웃으며 접수처 간호사에게 인사했다.

밖에서는 ‘한무일’이란 본명을 쓰지만, 사냥꾼으로 활동할 때는 ‘카르 4세’란 별명을 쓴다.

국제사회답게 영어권 외국인을 배려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보다는 어떤 사냥꾼이고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주는 척도였다.

『카르 4세』

이 별명은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4번째로 잘 다루는 사냥꾼’이란 뜻이다.

정확한 의미는, 4번째로 오래 소지한 사람.

이 330억짜리 절단기를 먼저 쓰기 시작한 ‘선배’가 한무일 앞에 전 세계에 단 3명뿐이란 가시적인 실력검증이다.

만약, 선배 중 누군가 죽거나 은퇴하면 무일은 자연스럽게 ‘카르 3세’가 될 것이다. 재작년에 한무일이 ‘카르 5세’에서 ‘카르 4세’가 됐듯이.

“개굴.”

덩치가 식당냉장고만 한 청개구리가 작게 울었다.

홀쭉한 몸통에 직립보행하는 개구리의 신사적인 체형을 보고 안심했다가는 전신마비로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프로칸 / 4종 소형】

긴 혀로 핥은 부위를 마비시키는 능력은 저격수만큼이나 무섭지만, 계약한 프로칸은 의무대에서 ‘안전보장 만능마취제’로 통한다.

그리고 눈앞에 ‘예쁜 간호사(일반 병원에는 없음)’는 무일이 마음 놓고 대화할 수 몇 안 되는 미녀였다.

프로칸은 벌레와 병균만 먹기 때문이다.

계약자가 ‘돌멩이’랑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할까.

그렇다고 깡그리 무시했다가는 로켓보다 빠른 혓바닥 펀칭에 두개골이 함몰될 수 있다.

“카르 4세나 돼서 초보적인 실수를 했네~♪”

무일의 찢어진 손바닥을 본 간호사가 놀리듯 말했다.

남자였으면 멱살이라도 쥐고 싶을 만큼 얄미운 표정이었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이 환해지는 계약자의 미모는 살인 빼고 뭐든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천사 같은 간호사 의상!

심장이 약한 환자는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정말 웃기지 않는 사태에 빠질 수 있다.

“집이 부서지기 직전이라 망설일 틈이 없었거든요.”

대기번호나 서류작성 같은 절차는 일절 없었다.

감염검사는 응급환자 다음으로 최우선사항이기 때문이다.

“백신은?”

괴수의 피가 상처로 침입했을 때 주사하는 약이다. 입에 풀칠할 만큼 가난한 사냥꾼이 아니라면 누구나 휴대하고 다니는 필수품.

검사실로 향하면서 묻는 간호사에게 무일은 쓰게 웃었다.

“집이랑 함께 불도저에 쓸려갔습니다.”

항상 호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니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직후였던 게 문제였다.

집에서 완전무장하는 사냥꾼은 정말 드물다. 잘 때도 경계한다면 피로와 스트레스로 요절할 테니 말이다.

“저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즐거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즐거운 거 맞거든? 카르 4세가 은퇴할 날이 더 멀어졌다는 뜻이잖니.”

계약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나에게 관심 있는 걸까?’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여기에 걸려든 열혈 사냥꾼들이 매해 사망률을 갱신한다.

모든 수호자가 그러하듯, 프로칸(개구리 괴수)이 미녀랑 계약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열렬한 ‘관심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저 ‘질투’와 ‘경계’ 수위가 낮을 뿐.

괜찮은 것 같다고 안심했다가는 훅 가는 수가 있다.

“허무하게 죽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적할 수 없는 4종 이상을 만나서 죽는다면 그나마 행복한 죽음 아닐까?

계약자랑 시비 붙거나 수호자의 질투로 비명횡사하지만 않는다면 은퇴 전에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 뼈 있는 말인데?”

“무시하세요. 그보다 검사결과는 어떻습니까?”

“이상 없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갑자기 난입한 수호자 레드군만 아니었다면 찢어진 손아귀로 플라돈의 피가 스며드는 불상사도 없었을 것이다.

330억짜리 여자친구랑 하루 이틀 일해온 것도 아니잖은가?

장갑 좀 안 꼈다고 3급 사냥꾼이 2급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다.

“아쉽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 주세요.”

“환자가 없으면 의무대가 필요 없잖니.”

그럴 날이 과연 올까?

괴수가 멸절되기 전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백신 2개 주세요.”

“겨우 두 개? 카르 4세씩이나 돼서 무지 짜네.”

피검사를 마친 간호사는 진열장에서 백신 2개를 꺼냈다.

백신이라고 불리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피스톨’ 안에는 괴수의 ‘가공된 피’가 들어있다. 일종에 중화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밤놀이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4세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거든요?”

검술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카르 1세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 가치는 눈앞의 간호사보다 못할 것이다.

그녀의 수호자인 프로칸은, 카르 1세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4종 괴수를 쓰러트릴 수 있다. 덤으로 인간에게 없는 의료능력도 갖췄다.

즉, 비교 불가.

효용가치에서 사냥꾼은 수호자의 상대가 못 된다.

“그건 그렇지.”

잘난 척할 의도는 없었던 간호사는 순순히 물러났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시비 붙어서 얼마 없는 ‘남자 말동무’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카르 4세는 그녀의 ‘개구리 왕자님’의 기습을 받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냥꾼이었으니까.

총알보다 빠른 혀를 반으로 갈랐다!

물론, 4종 괴수 프로칸은 순식간에 회복했고 무일은 직후 전투불능에 빠졌지만,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다.

“...무슨 생각 중인지 알겠는데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래서 누나라고 안 부르는 거야?”

간호사의 이름은 강보라. 나이는 28살. 전직 수영선수로 몸매는 단연 발군(수영을 잘할 수밖에 없는 유감스러운 체형)이다.

물놀이 중에 눈이 맞은 개구리 왕자님이랑 계약했고 5년 전부터 한국 본부 의무대에서 일하고 있다.

의학지식이 없는 그녀에게 의사는 무리. 하지만 마취능력이 뛰어난 프로칸 덕분에 형식상으로나마 간호사란 직책을 맡고 있다.

혈액검사는 그녀가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업무로, 검사해주는 남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적다.

“오늘은 봐주세요. 쫄쫄 굶어서 힘도 없다고요.”

“흐응~, 그럴까?”

희귀한 4종 괴수 프로칸이랑 계약한 강보라는 의무대의 공주님. 모든 계약자가 다 그러하듯 직장에서 직접 하는 일은 없다.

피로와 스트레스 등으로 이마에 주름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수호자의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며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 눈빛입니다.”

“누나라고 안 불러주니까.”

털 없는 원숭이의 공격으로 ‘통증’을 경험한 프로칸은 그 뒤로 신중해졌다.

얼굴은 몰라도 머릿속에 ‘카르 5세’란 이름이 뚜렷하게 각인된 것이다. 그건 ‘카르 4세’로 불리는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무일이 강보라랑 나누는 웬만한 대화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한계를 시험해보진 않았지만, 무일은 영원히 시험해보고 싶지 않았다.

‘전치 3주를 또 할 순 없지.’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다.

불길한 [예감]과 과감한 [예측]으로 [반격]까지 완벽한 3박자를 이뤄냈는데도 4종 괴수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혀를 반으로 자를 때의 반동만으로 전신탈골!

자르는 도중에 몸에 튀긴 타액만으로 전신마비!

그와 반대로,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한 개구리 왕자님을 의무대 공주님이 말리지 않았다면 카르 4세는 그대로 저승행이었을 것이다.

“심심하신가 보네요.”

“응! 엄청!”

온종일 빈둥거리는 것 같아도 계약자는 의무적으로 몸매관리와 피부미용 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수면도 10시간 이상!

괴수랑 계약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계약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계약자에게 자유시간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배부른 투정이다. 그야말로 ‘공주님’ 대우니까.

“검사비와 백신은 외상으로 달아주세요. 지갑도 불도저에 쓸려버린 바람에 수중에 땡전 한 푼 없거든요.”

“아저씨가 소년 얼굴로 푸념하니 징그러워~♪”

“동안이라서 매우 죄송합니다!”

호적상 부정할 수 없는 26살이지만 외모는 많이 쳐줘도 16살. 애늙은이도 아닌데 애늙은이라는 핀잔을 들을 때마다 무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다.

약물과용이라고 해도 믿어주는 사람은 얼마 없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간호사 누나랑 작별한 무일은 의무대 건너편에 자리한 ‘정비과’로 털래털래 걸어갔다.

당연하지만 괴수대응본부는 수많은 사냥꾼이 오가는 곳이다.

“여~! 카르 4세. 여자친구도 건강해 보이네?”

“하하…. 안녕하세요. 성민 형님.”

“어? 카르 4세잖아? 네가 웬일로 본부를 다 왔어?”

“도준이냐? 오랜만. 그게…. 몹쓸 돼지 때문에.”

무일을 알아보는 사냥꾼들이 아는 척하며 인사해왔다.

특별히 친해서 말을 거는 건 아니다. 훗날, 본인들의 쓸쓸한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묵념이라도 해주길 바라서다.

죽지만 않으면 고수입이 보장된 사냥꾼이지만, 맨정신으로 괴수랑 싸워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

독기와 끈기는 필수!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그냥 생겨날 리 없다.

『괴수를 향한 끝없는 적개심!』

사냥꾼 중에 사연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죽을 각오로 뛰어들었다가 정말로 죽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괴수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빠와 아들, 오빠다.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탓에 장례식장에 와줄 사람도 없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사냥꾼에게 시집오는 여자도 없으니 마지막까지 홀몸인 셈.

믿을 건 비슷한 처지의 동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 카르 4세네? 여친의 허리가 부러져서 온 거냐?”

정비과 로비에서 대기표를 뽑는 무일을 발견한 청년이 잽싸게 다가와 어깨동무하더니 호쾌하게 웃었다.

그의 장례식장에 꼭 참석해줄 친구놈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슬며시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으려는 청년의 무례한 손을 쳐냈다.

무일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데?”

“그야 너는 정비과에 올 일이 그거뿐이 없잖아. 사용하는 무기라고는 딸랑 30억짜리 여친 하나.”

“330억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남친 잡는 년을 누가 사가냐?”

복수심에 불타올라 무작정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사냥꾼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정비과에서 일하며 ‘타인의 손을 빌려 복수’하는 사람도 있다.

대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고 애걸복걸해도 안 된다.

정비과는 위험에서 멀어지는 만큼 MID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명석한 두뇌와 노력 등을 요구한다.

『정비과(Main Engineering Center)』

외국의 괴수대응본부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국적의 천재들은 정비과와 기술반에 전부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괴짜도 많고 이 청년처럼 말버릇 안 좋은 놈도 더러 있다.

여성우월시대에 성희롱 비슷한 발언을 하다니? 그것도 계약자가 사방에 도사린 괴수대응본부에서 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무일은 이 대책 없는 친구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찬호야. 죽으려면 혼자 죽어줘.”

정비과 엄친아(놀랍게도 진짜다.) 정찬호.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만용이다.

여기가 괴수대응본부에서 2번째로 남자뿐인 정비과라서 참 다행이다.

장비 수리는 계약자하고 인연이 없는 까닭이다. 무언가 고칠 장비가 생기더라도 심부름꾼이 대신 온다.

그렇다고 정비과에 남자만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아름다운 처녀’가 없을 뿐이다.

“우리의 우정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라. 카르 4세.”

같이 죽자고 말하는 친구에게,

무일은 모멸차게 외쳤다.

“진지한 얼굴로 우정을 모욕하지 마!”

“하하!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음? 잠깐. 맞춰볼게. 소독약 냄새를 추적해본 결과, 여친이 아니라 오른손이 병신이었군.”

면도한 지 며칠 된 지저분한 턱을 쓰다듬던 정찬호.

무일의 왼손에 꾸깃꾸깃 쥐어진 대기표를 힐끔 보더니 빼앗아서 휴지통에 던졌다. 운동신경이 안 좋은 탓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뭐야.”

“우정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그 대기순번대로 순진하게 기다렸다가는 5시간도 넘게 걸릴걸.”

5시간씩이나?

정비과에 올 일이 없어서 그건 생각 못 했다.

오늘 노숙하지 않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하는데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순 없었다.

무일은 살짝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가하냐?”

“바쁘지. 농담이나 허풍이 아니라 정말 바빠.”

그 정도는 무일도 알고 있다.

이 미덥지 않은 친구놈이 본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정비사라는 게 잘 믿기진 않지만.

아무튼, 그 때문일까?

노화억제제를 꾸준히 복용 중일 텐데도 정찬호의 부스스한 몰골은 각도에 따라서 정말로 그 나이 또래의 26살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삭았다.

< [1장-3] 제 이름입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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