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1] 제 이름입니다. >
[1장] 제 이름입니다.
학명: 플라돈(날아다니는 돈가스)
서식지: 초원, 도시
특징: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위험도: 2종 보통
비고: 식사 중에는 건드리지 맙시다!
***
“꾸에엑!”
“헉!”
돼지 멱따는 소리에 소년은 침대에서 벌떡 깨어났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트라우마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음식쓰레기통을 뒤지는 새끼 플라돈의 엉덩이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죽을 뻔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돼지고기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하는 건 덤.
“꾸에에에에에엑!”
또 한 번 들리는 돼지의 비명.
이번에는 ‘쿵!’ 집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을 동반했다.
“어떤 미친놈이….”
소년은 중얼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텅 빈 정원에 떨어진 초대형 돼지를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나, 방금 죽을 뻔한 거?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벽돌로 지은 소년의 집은, 코끼리보다 큰 돼지의 중력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플라돈 / 2종 보통】
덩치로 보아선 성년 플라돈이었다.
무게만 십여 톤에 달하는 ‘날개 달린 돼지’가 상공 1km에서 떨어지면 그 하나만으로도 작은 운석에 필적한다.
쫙쫙 균열 간 콘크리트 대지가 소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꿀, 꿀?”
식사 중에만 안 건드리면 일반 돼지보다 훨씬 온순한 ‘돼지 괴수’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면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초토화된 앞뜰을 국가에서 보상해줄지, 괴수종합보험에서 보험금은 얼마나 나올지 등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 중이던 소년은 식겁했다.
‘살아 있었냐!!’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플라돈이 하늘에서 ‘완벽히’ 죽어서 떨어졌다면 활공하지 못했을 테고, 피해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닥에 충돌하며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플라돈의 생명력과 재생력은 ‘2종 보통’이라 불리기에 손색없을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꿀꿀.”
날개를 피격당해 떨어진 플라돈은 ‘나는 왜 떨어졌을까?’ 같은 의문조차 없는지 벌써 온순해져 있었다.
평소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음식쓰레기통을 찾기 시작하는 플라돈.
딱 봐도, ‘사람은 해치지 않아요.’라고 쓰여있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잠깐. 어제 내가 음식쓰레기를 내놨던가?’
기절한 플라돈이 깨어난 직후부터 창문 옆에 몸을 숨긴 소년은 생각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비행 중인 플라돈의 후각으로는 느끼지 못할 정도의 적은 양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하필 플라돈이냐!”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주워 먹으려고 아파트를 무너트린 플라돈의 사례도 있다.
이 초대형 돼지님이 온순한 괴수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이유가 이 ‘무지각’에 있다.
침대 옆에 여자친구(평생 없으리라고 추측) 대신 올려놓은 상아색 장도를 쥔 소년은 그대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집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플라돈의 앞을 가로막았다.
“꿀!!”
“식사 예정 중에 미안하지만, 여긴 내 집이라서 안 되겠어!”
방금까지 겁에 질린 소년이라고 보기 힘든 강인한 음성.
집안에 음식쓰레기를 놔두는 ‘실수’는 보험처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아직 할부가 40개월이나 남은 집을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
트라우마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괴수의 움직임을 인간이 쫓기란 불가능. 플라돈은 빠른 돌진이 주특기이자 유일한 공격법. 돌진방향을 먹이가 있는 부엌으로 향할 가능성은 낮으니 녀석이 택할 방향은….’
소년이 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돼지 괴수’가 도약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혹은 사망 확정!
콰광!
플라돈은 ‘식사를 방해하는 물체’를 으깨버리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소년의 예상대로 집은 부엌을 제외하고 초토화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왼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잘린 초대형 돼지는 벽돌 잔해에 파묻히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아…. 내 집….”
소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플라돈의 어금니랑 충돌하기 직전, 바짝 엎드려서 장도만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뻗은 게 다였다.
관성을 주체 못 한 플라돈이 칼날에 오른쪽 두 다리를 들이민 꼴이었다.
이 시대의 남자로 태어나 괴수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이라면, 반드시 할 줄 알아야 하는 기본기인 [예측]과 [반격]의 합격기였다.
뚝, 뚝….
괴수의 뼈로 만든 장도(長刀)의 날카로움으로도 플라돈의 운동에너지를 전부 분산시킬 수 없었던 걸까, 소년의 손아귀는 길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괴수의 회복력은 잘린 사지도 금방 재생시키기 때문이다.
소년은 플라돈이란 ‘돼지 괴수’의 정보를 떠올렸다. 그리고 판단을 내렸다.
‘성년 플라돈의 몸속 깊숙이 있는 3개의 심장을 동시에 노리긴 불가능. 뇌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서 일시적인 행동불능을 일으키고 신고하자!’
잘린 다리만큼 몸을 축소해서 새로운 다리를 구축하기 시작한 플라돈.
소년은 그전에 마무리하기 위해 뛰었다.
콰직!
하지만 그보다 앞서 플라돈의 머리가 터졌다. 그리고 괴수와 동물을 구분하는 ‘은색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의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제삼자의 공격.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괴수의 피를 소매로 얼굴만 거칠게 닦아낸 소년의 시야에 ‘붉은 용’ 한 마리가 들어왔다.
【레드군 / 7종 소형】
소년이 임기응변으로 쓰러트린 ‘날개 달린 돼지’하고는 격이 다른 괴수!
이구아나랑 비슷한 체형에, 등과 허리에 총 2쌍의 날개가 달렸고 전신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비늘로 덮여있다.
파충류 특유의 눈이랑 마주치자 영혼까지 얼어붙는 위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영문도 모른 채 죽을 것 같은 공포!
레드군이 죽은 플라돈의 고기와 뼈를 통째로 씹는 소리가 섬뜩했다.
덩치는 ‘소형’답게 인간이랑 엇비슷하지만 ‘7종’이란 걸 잊으면 곤란하다.
『사냥꾼이 감당할 수 있는 괴수는 3종까지.』
『첨단무기로 죽일 수 있는 괴수는 6종까지.』
7종부터는 괴수만이 괴수를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눈앞에 괴수는 핵미사일(지금은 전쟁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다.)을 정통으로 맞고도 무사태평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7종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괜찮을 거야, 한무일!’
분명 미녀와 계약한 괴수일 것이다.
아직 ‘한무일’이 살아있다는 게 그 증거다.
즉, 야생괴수가 아니다.
하지만 소년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보다도 더 언행을 주의하기 시작했다. 계약한 괴수라고 해서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아(男兒)가 부모님과 선생님께 배우는 첫 번째 생존지식!
그건 ‘수호자’랑 마주치면 아무 생각 말고 눈을 감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눈을 감지는 않았다.
괴수의 변덕으로 공격해오면 무의미한 발악이라도 하기 위해서다.
대신, 먼 산을 올려다봤다.
“저기요? 이 부엌만 남은 집. 당신 집인가요?”
계약한 괴수, 수호자 주위에는 늘 계약한 ‘미녀’가 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말을 걸면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예의지만, 그녀가 ‘성희롱’이라고 불쾌감을 느끼면 죽는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보통의 남성은 여기서 말도 꺼내지 못한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고가 마비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살짝 어긋난 시선을 유지한 채 능수능란하게 대응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아가씨. 뒷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가던 길 가시면 됩니다.”
“어…?”
“목격자의 진술로 보험이든 뭐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괴수랑 이웃하는 24세기인데 집이 부서질 때도 있는 거죠. 집이 목숨보다 귀하겠습니까.”
남자가 말을 더듬거나 혼비백산하지 않은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미녀의 목소리에는 놀람이 담겨 있었다.
그 낭랑한 미성이 묘령 이하의 ‘미소녀’임을 짐작하게 해줬다.
하지만 금세 새침한 말투로 변했다.
“사람을 벌레 쫓듯 말하지 말아 주실래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집이 이렇다 보니 속이 타는 제 심정을 아가씨께서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렇네요. 맨날 이런 대접이라 과민했던 모양이에요, 죄송합니다.”
“......”
남자에게 사과하는 ‘계약자’라?
제법 신선한 경험이다.
“돼지사냥 중에 5종이 나타나는 바람에 마무리가 허술했어요. 저는 7종 계약자, 윤소영. 제 이름을 본부에 대면 보금자리 정도는 무료로 대여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본부가 어느 본부인지 정도는 아시죠? 2급 사냥꾼 씨.”
“괴수대응본부. 잘 알고 있습니다.”
희귀종인 ‘레드군’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다.
7종 계약자 윤소영이고 하면,
‘유명한 미소녀잖아?’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연소 7종 계약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소녀였다.
간단히 말해서, 무시무시한 용마저 반한 미소녀란 뜻이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주먹만 한 얼굴, 팔다리가 가늘고 긴 서양체형의 백인 여성을 선호하는 용이랑 계약한 몇 안 되는 동양인.
“엘카르가 배고파서 그러는데 저 돼지는 가져가도 될까요?”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저 레드군의 이름이 ‘엘카르(애칭일 것이다. 괴수의 본명은 기니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막 생각하던 소년은,
미소녀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닿는 감촉에 바짝 얼어버렸다.
무시무시한 용을 앞에 두고 술술 말할 수 있는 강심장의 한무일도 이 상황에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부접촉은 성희롱보다 훨씬 위험하다.
수호자가 ‘질투’하는 영역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제 아버지도 사냥꾼이라서 하는 충고인데요. 가공하지 않은 괴수의 피가 상처로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무시했다가는 나중에 미쳐버리는 수가 있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소년은 마음속으로 눈앞에 소녀가 빨리 가줬으면 하고 빌었다. 그래야 찢어진 손도 치료하고 집도 어떻게 해볼 테니까.
지금, 누구 때문에 상처를 가만 놔두고 있는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아! 모를 수도 있겠네.’
미녀에게 ‘충고’라는 ‘불쾌감’을 주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남자라면 더욱!
죽고 싶으면 뭔들 못하리오?
본인은 괜찮다고 할지 모르지만 계약한 괴수는 아니다. 계약자가 말릴 새도 없이 수호자가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삼류 사냥꾼입니다.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용은 똑똑하다.
그리고 미녀랑 계약한 용은 계약자의 언어와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인간문명을 순식간에 습득한다.
그 지혜란?
흔히 ‘돌고래는 똑똑해요.’라고 말할 수준을 뛰어넘어 인간을 압도!
그래서 24세기 첨단무기는 ‘용의 산물(Made In Dragon)’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만 안 알려지면 괜찮지.’
이런 현명하신 용왕님도 절대로 못 하는 게 있다.
동물원 원숭이가 다 똑같이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얼굴 구분 못 한다.』
이건 용뿐만 아니라 모든 괴수의 공통점이었다.
아름다운 처녀가 아니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이 생긴 ‘털 없는 원숭이’로 보인다고 할까.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면?
그 순간, 차별화가 되고 용왕님에게 찍히는 것이다.
“...본부에 연락을 넣어두려고요. 아니면, 부엌만 남은 집에서 겨울을 보내실 건가요? 이렇게 된 데에는 간접적으로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제 양심이 걸린 문제라고요.”
한무일은 갈등했지만, 그건 무의미했다.
그가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던 이유가 뭐였던가?
『미녀에게 불쾌감을 안 주기 위해서다.』
음흉한 눈으로 쳐다봤다는 오해로 죽고 싶진 않다.
하지만 계속 고집부리면 결과적으로 미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꼴이 된다. 또 다른 불쾌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또한 명백한 ‘사망 플러그’다.
수호자는 계약자의 감정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과감한 살상력까지 고루 갖췄고 있다.
“한무일. 그게 제 이름입니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름이라서 그런 걸까.
윤소영은 그의 이름을 들은 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으니 다른 정보도 알려주세요.”
이름을 밝힌 이상,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일은 순순히 다른 신상(身上)도 풀었다.
“26살. 고졸입니다.”
“네에?! 16살도 아니고 26살이라고요?! 말도 안 돼!”
“...동안입니다. 약의 도움도 받았고.”
현대의학은 ‘미녀의 젊음과 몸매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미녀가 곧 안보대책이고 국력이기 때문이다.
최종목표는 당연히 ‘영원히 늙지 않는 몸’이었고, 용의 지혜를 빌린 인류는 벌써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냈다.
그 부산물이 근육강화제, 노화억제제 같은 약품.
“일단 믿어줄게요, 무일 오빠.”
그렇게 불린 순간, 붉은 용왕님이 으르렁거렸다고 느낀 건 절대 착각이 아니리라!
진짜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무일’이 서둘러 덧붙였다.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용왕님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로 비명횡사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살짝 꼴불견 같은 발언을 하고 말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 또한 익숙한 상황인지 윤소영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 직후,
한순간 태풍이 몰아친 게 아닌가 싶더니 인기척 하나가 조용히 사라졌다.
‘......폭탄은 갔나?’
남자들에게 미녀란 더는 ‘꺾고 싶은 꽃’이 아니었다.
엮이면 죽는 폭탄!
위험수위는 ‘몇 종 계약자’인지로 결정된다.
그렇게 봤을 때, 잠깐이지만 7종 계약자랑 대화한 무일은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주변을 살펴본 그는 소녀(계약자)와 괴수(수호자)가 정말 확실히 떠났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 [1장-1] 제 이름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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