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 조상님들은 경고했다.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
[서장] 조상님들은 경고했다.
전래동화와 신화에는 무수히 많은 ‘괴수’가 등장한다.
그리고 독자 모두가 당연하다고 무심코 지나가는 ‘공통점’이 있다.
『유니콘은 ‘미녀’만 좋아한다.』
『드래곤은 ‘미녀’만 지킨다.』
『인당수에 ‘미녀’만 바친다.』
『흡혈귀는 ‘미녀’만 흡혈한다.』
미남은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여성 모두가 ‘젊고 아름다운 처녀’란 점이다.
이 노골적인 공통점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전설과 동화, 설화 속에 나오는 ‘미녀와 야수’의 역학관계는 그저 음유시인과 사기꾼이 지어낸 헛소리일까?
아니면, 근육뿐인 용사가 감수성 풍부한 미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 혹은 복선?
『이 세상에 완전한 헛소문은 없다.』
미신이든 신화든…. 근거와 떡밥이 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뇌까지 근육인 마초 용사가, 괴수를 무찌르고 미녀랑 결혼한다는 에필로그. 그게 행복한 결말을 위해 억지도 끼워 맞춘 허구일지라도.
적어도 그 발단이나 프롤로그는 ‘사실’이어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괴수는 여성에게만 관심 있다.』
그중에서도 ‘젊고 아름다운 숫처녀’를 선호한다.
이 대전제를 늘 깔고 시작한다.
미남을 구하기 위해 괴수랑 싸우는 용사는 없었다.
왕자가 갇힌 탑을 지키는 엽기적인 용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이처럼 모든 나라의 전통과 문화, 역사가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만 아름다움과 순결, 젊음을 강요해왔다. 그건 시대와 세대, 유행이 변해도 변치 않는 진리.
『여신은?』
『공주는?』
『성녀는?』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젊고 아름다운 처녀’였다.
여자주인공이 평범하게 생겼으면 이야기가 시시해서, 음유시인과 작가들이 밥그릇 지키고자 매번 뻔한 인물설정을 짰던 걸까?
못생긴 여자는 행복할 수 없고 ‘여자는 외모와 순결, 나이가 전부!’라고 가르치는 악랄한 이야기를?
이것들이 폐기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은 이유는 매우 간단명료하다.
『괴수는 ‘미녀’에게만 관심 있다.』
서기 2,222년 2월 22일 22시 22분 22초.
둘을, 짝을 뜻하는 숫자가 무한히 연속되는 날.
정말로 이 시간이 맞는지는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이건 매우 사소한 문제다.
괴수가 세상에 등장했다.
『인류는 설화(說話)가 진짜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인류는 동화(童話)를 미화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인류가 자랑하는 첨단무기와 지식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괴수가 사방에서 출몰했다. 바다에서, 하늘에서, 밀림에서, 사막에서, 지하에서….
그중에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용도 있었고 인간의 형상을 한 흡혈귀도 있었으며 신비한 힘을 부리는 요정과 정령도 있었다.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죽어갔다.
찬란했던 문명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수많은 국가와 연합이 합병되고 사라졌다.
...그래도 인류는 살아남았다.
세계의 종말을 예언했던 현자들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지껄였지만, 조상님들이 남긴 ‘전래동화’는 명백했다.
『무시무시한 괴수 곁에는 늘 ‘미녀’가 있었다.』
...슬슬 감이 오는가?
그렇다!
조상님과 선조들이 지겹도록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미녀!
생물학적으로 보면, 여성마다 별 차이 없는 1cm 미만의 가죽.
하지만,
『그 미녀들이 인류의 종말을 막아냈다.』
각국의 미녀들에게 강력한 초능력 따위가 생긴 게 아니었다.
아리따운 마녀(魔女)들이 음지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옛 문언 그대로,
『괴수가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어도 알 수 없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면 조상님들은 전래동화 같은 두루뭉술한 경고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뿐이었으나 인류는 살아남았다.
괴수와 괴수의 전쟁.
미녀를 사랑하는 괴수와 그렇지 않은 괴수의 혈투!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변했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0년이란 세월에 걸쳐 완성됐다.
서기 2323년.
자본주의사회를 능가하는 외모지상주의, 여성우월사회가 열렸다.
『미녀는 권력(權力)!』
『미녀는 국력(國力)!』
여성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그 반대로,
남자가 살기에는 무척 척박한 세상이 됐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아리따운 아가씨가 성희롱이라고 느끼는 순간, 눈을 잘못 굴린 남자는 변명할 새도 없이 괴수에게 살해되는 무시무시한 시대.
괴수와 미녀.
그 사이에 끼어드는 남자는 사정없이 죽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녀가 아니다.
『괴수를 처치하고 미녀를 차지하는 용사』
정말로 없을까?
이 세상에 뜬금없는 이야기란 없다.
그저, 우리가 믿지 않을 뿐이다.
< [서장] 조상님들은 경고했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