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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41화 (완결) (541/541)

신이 아닌 사람으로(3)

공식적으로 견하는 죽은 사람이 아니었다.

견하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로, 공식적으로는 병으로 인한 요양 및 은퇴였다.

미리안 사후, 또다시 황국이 태사를 잃는다면 정국은 급속한 혼란으로 접어들 수도 있었으니까.

“짐의 신황 친정 체제가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되는 동안, 견하는 서서히 잊혀갈 거야.”

이제는 제법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루우는 효윤에게 말했다.

멕시카를 멸망시킨 전쟁 영웅.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늘어난 가슴팍의 훈장을 뽐내며, 방금 막 신황의 침전으로 들어온 참이다.

침전은 난방을 한껏 가동했는데도 어딘가 약간, 쌀쌀한 기운이 돈다.

그것이 케찰코아틀 산맥의 화산 폭발로 인한 재해 때문인지,

아니면 루우와 효윤의 쓸쓸한 마음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래.”

이견은 없었다. 그것이 견하가 남긴 후속 조치니까.

이어받을 뿐.

죽음을 슬퍼해도 남은 자들의 삶은 이어지고.

죽은 자들이 남기고 간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런 거창한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일이 끝이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먼 훗날에,”

목이 잠기는지 루우는 잠깐 말을 멈췄다.

“……먼 훗날에, 신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원로 정치인 주견하가 세상을 떠났다, 일반인처럼 검소한 장례를 치르라는 고인의 유언이 있었다. 카라코룸의 항전열사릉, 미리안 태사의 곁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발표할 거야.”

이미 그는 그 자리에 가 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효윤의 생각은 그녀의 시선처럼 바닥을 헤맸다.

그러다 그냥, 업무 보고를 하기로 한다.

“아즈텍 대륙에는 총독부를 설치했어. 뭐 총독들이 다스릴 식민지 주민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만…… 아마 총독이라기보다는 아즈텍 대륙 자연관리소장이 더 적절하겠지.”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은?”

“그건 곧 대사들을 부를 거야. 서유럽 동맹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각국, 로마 제국 대사까지 전부.”

그 일을 위해서, 주견하는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벨리사리우스에게 저지른 일을 언제든 다른 나라에도 실행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황국의 최종병기로서.

효윤은 신황에게 인사를 올리고 침전을 나서기 전에, 루우의 배를 보았다.

그 안에는 견하의 아이가 있다.

루우 테무르가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삶을, 최선을 다해 연장하기로 결정했듯이,

효윤도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 아이를 지키고, 그 아이가 대원황국의 새로운 신황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그녀 역시 살아야 하니까.

***

주견하의 죽음을 알리지 않겠다는 방침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비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사망설이 나돌고 있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소리를 질러대는 건 정치감독청의 친위국장, 원동인이었다.

“……사망설이 얼마나 나돌든 정부의 공식 입장이 전면 부인으로 일관한다면 끝입니다.”

방첩국장 이익서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조와 말이 ‘입 좀 다물라’는 만류라는 걸, 원동인만이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은 비상시국입니다! 요왕 전하의 승하 이후의 정국을 수습하려면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런 임시변통으로는……!”

“승하라니! 대체 누가 승하하셨단 말입니까!”

늘 능글거리는 웃음만 흘리던 사상국장 한재연이 오랜만에 노성을 질렀다.

공식적인 정부 발표는 어디까지나 요양, 은퇴.

사상국장은 그것을 철저하게 ‘사실’로서 황국 신민들에게 주입할 심산이었다.

원동인은 다소 당황한 듯했지만, 더듬더듬, 다시 말의 기세를 높여나갔다.

“누군가는 이 사태를…… 네,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요왕 전하에 버금가는 비상한 지도력으로 말이지요! 또 정부 각처와 요인에 대한 경호를 강화하여……”

새로 태사가 된 효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태사로 인정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 방만한 태도.

경호 강화는 결국 정부를 친위국의 감시하에 두겠다는 말 아닌가.

견하가 멕시카 소멸 작전과 벨리사리우스 참수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이 인간에게 신경 쓰지 못했더니 불과 몇 개월 만에 아주 엉망으로 자라나 버렸다.

잡초는, 뽑아야지.

안 그래도 이번 회의 직전, 유지나가 찾아와 귀띔해 준 말도 있다.

-전하께서는 마지막으로 저에게, 합하께서 태사가 되시면 겪을 부담을 줄일 방책을 부탁하셨습니다.

-합하께선 전하와 달리 비교적 온건한 국내 정책을 펼치셔야 할 거라고 보셨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폭압적인 숙청의 책임을 지고 희생되어야 합니다.

-웬만하면 숙청 중단, 대사면 등의 조치로 끝내라고 하셨습니다만, 만약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인간이 있다면…….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인간’이란 원동인을 말하는 것이겠지.

저놈은 저대로 내버려 두면 죽은 류성일처럼 어전으로 뛰어가 자기에게 태사 자리를 내려달라고 떼를 쓸 게 뻔했다.

루우가 원동인 따위에게 태사 자리를 내려주지도 않겠지만, 그런 추태가 일어나는 것 자체를,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효윤은 의자를 뒤로 넘어뜨리며 일어섰다.

“……정말 못 들어주겠군.”

저벅저벅, 원동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제멋대로 떠들던 원동인의 입이 드디어 다물어졌다.

너무 늦었지만.

쩔렁거리는 효윤의 훈장들을 보고서야 그는 자신이 누구를 진노케 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멱살을 잡아서 의자에서 들어 올리고, 주먹을 날렸다.

이단의 힘을 발휘했다면 그대로 원동인의 머리는 터져버렸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쓰러진 그의 머리를 밟는다.

효윤은 지나 쪽을 돌아봤다.

준비된 판결문을 읽으라는 뜻이었다.

“원동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과대 해석하여 무고한 자를 고문, 살해하고 재산을 강탈하여 사욕을 채웠다. 뿐만 아니라 요왕의 은퇴를 기회 삼아 친위국을 멋대로 동원하여 정국을 장악하려 했으며, 애국자인 정부 인사들을 위협했다. 이러한 행위는 신황 폐하의 안위를 위협하고 황국의 역량을 훼손시켜 적을 이롭게 한 반역이므로 사형에 처한다.”

재빨리 읊은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고, 지나는 서명하라고 턱짓했다.

한재연이 씩 웃으며 신난다는 듯 제일 먼저 서명했다.

지나는 망설이는 이익서의 어깨를 잡으며 윽박질렀다.

“돌이킬 수 없어.”

이익서는 긴 한숨을 내쉰 뒤 서명했다.

그렇게 회의에 참석한 장성, 각료들의 서명까지 받아낸 뒤, 효윤과 지나는 원동인을 질질 끌고 뒷문으로 나갔다.

원동인은 끌려가면서 두 번 유지나를 욕하고, 서명한 모든 인간을 한 번 욕한 다음, 황국 따윈 멸망해버리라며 침을 뱉다가, 살려달라고 빌었다.

두 번 듣기 싫은 구걸이었기에 지나는 바로 권총을 뽑아 들어 머리를 쏴버렸다. 작은 구멍이 났고 원동인의 목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의 시체는 볼로드나 안세규, 류성일이 그랬던 것처럼 쓰레기 더미 속에 섞여 사라졌다.

***

“전쟁 전으로 돌아가시오.”

단순한 통보였다.

카라코룸에 머물며 서로 이를 갈던 서유럽 동맹, 로마 제국과 그 동맹 양측의 외교관들은 잠깐 마주 봤다가, 항의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태사!”

최효윤의 무표정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말 그대로요. 전쟁 전으로 돌아갑시다. 무병합, 무점령, 무배상. 이 세 가지가 원칙이오. 로마 제국은 마자르와 프로이센에서 군대를 물리고, 서유럽 동맹국들은 아프리카의 독립국들과 에스파냐에서 물러나시오.”

“……그 말은, 마카오도 에스파냐에 돌려주겠다는 말씀이시겠죠?”

“그거야말로 이쪽에서 되물을 말이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상황은 명백해졌다.

멕시카도 바라트도 멸하고, 벨리사리우스의 목을 친 초강대국 다이온은 누군가의 말을 듣고 협약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뜻대로, 전쟁을 강제로 중단시킬 뿐.

“전쟁 전에 로마 제국이 점령한 이탈리아와 아라비아는 인정해주지. 여기까지가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자비요.”

“승복하지 못하겠다면?”

“당신네 죽은 황제만 빈을 불태울 줄 아는 건 아니오. 우리는 아직 살아있는 분이 계시고, 그분은 콘스탄티누폴리를 오늘이라도 불태울 수 있으시지.”

“협박입니까?”

“그럼 부탁이겠소?”

각국 대사들이 조용해졌다.

루우나 견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장 그들 눈앞에 있는 대원수 최효윤, 태사 최효윤이야말로 쿠아우테목을 소멸시킨 사람이니까.

엑스라샤펠도, 런던도 얼마든지 날려버릴 역량이 있는 대원황국.

그 말에 따르지 않을 순 없었다.

신성 제국 대사가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항의했다.

“전 세계 사망자가 일억으로 추산되는 전쟁이었단 말입니다! 이걸 이렇게 끝내면 우리 국민 중 누가 정부 결정에 납득하겠습니까?”

“정부를 유지하고 못 하고는 당신네 몫이지. 여차하면 그런 시끄러운 국민은 우리가 ‘소각해주겠소’. 말씀만 하시오.”

대사들이 물러나고 나서, 홀로 집무실에 돌아간 효윤은 높이 올려묶은 머리카락을 풀었다.

피로와 긴장으로 열이 오른 눈두덩 위에 손을 대서 식혀본다.

보고하듯, 중얼거린다.

“협박이 안 통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래도 오늘 일은 끝냈어.”

내일도 일이 이어지겠지만.

***

이것은 가능성의 세계다.

소년이 살아갈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한 소녀와, 소녀의 말대로 살아가고 싶었던 한 소년이, 거듭된 시도 끝에 마침내 만들어낸 세계.

세상에서 전쟁과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분명 어딘가에서는 일상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

내전에 따른 시가전의 상처는 없다.

경기 불황으로 인해 손님들의 얼굴은 우거지상이지만, 그래도 싸구려 음료와 간단한 식사는 잘 팔리는 한 카페가 있었다.

오늘은 사장 부부의 아들인 소년이 일손을 도우러 가게에 나왔다.

그 앞길을 지나던 작은 체구의 소녀가 문득,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가게 밖 테이블을 정리하다 말고, 시선을 보내는 소녀를 보았다.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던 소년은 눈을 굴리다 어색하게 웃었고,

소녀는 너무나도 환하게,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환하게 미소 지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소년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소녀에게 다가간다.

소녀도 두어 걸음 다가서며, 소년의 키를 재보려는 듯 팔을 들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마음이 마침내 현실이 된 세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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