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아닌 사람으로(2)
“인류가 도약할 때까지 마지막! 마지막 한 단계만 남이 있단 말이다, 주견하! 어째서 너는 그 찰나도 인내하지 못하지!”
아직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담아 던진 말.
그러나 논리도 뭣도 없이, 견하는 그 말에 도저히 동조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입력된 명령만을, 파괴될 때까지 계속 수행하는 기계가 되어버려서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아닌 방향을 추구하면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이것은 척수반사, 태엽을 감아두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와도 같은 행동일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벨리사리우스의 말에 옳은 구석이 있으리라는 걸 안다.
벨리사리우스는 진정으로 인류를 진보시키고, 모든 폭력과 모순을 끝낼지도 모른다.
그의 계획을 따라가기만 하면 인간은 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비로소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신종에 근접하리라. 아니, 신종이 되리라.
로마 황제의 앞을 가로막는 자신은 어리석은 퇴보를 추구하는 자, 높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머저리일지도 모르지.
“신의 자비를 구하는 게 아니라 신이 되면 된다! 환생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그 굴레 자체에서 벗어나면 된다! 도대체 왜 눈앞에 분명한 길을 열어줘도 보질 못하는 거냐!”
하지만 견하는 따르지 않는다.
굴하지 않는다.
십수 개의 눈에서 적의를 번뜩이며, 온 촉수들을 벨리사리우스를 향해 뻗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벨리사리우스의 검이 빛났다.
견하의 괴물 육체, 그 머리 부분이 폭발했다.
***
눈앞에 한 소녀가 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이라는 표현처럼, 어째서인지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
불과 몇 달 전의 견하였다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품에 얼굴을 묻고, 모든 죄책감과 사죄를 쏟아내며 울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견하는, 본능만으로도 그녀가 자신이 아는 미리안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은 그녀가 아니군.”
씁쓸한 얼굴로, 다른 세상의 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하는 곧바로 또 다른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래도 당신은 나와 10년 동안 함께 있었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다른 세상의 미리안이 끄덕인다.
그녀가 사랑한 주견하도 자신이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을 반복해 온 사람.
절대로 자신이 사랑한 주견하 본인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마치 그 사람을 위한다는 듯이 세상과 세상을 헤맸다.
“당신에게는 감사하고 있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견하를 이단으로 만들어 준, 어떤 세상에서 온 미리안의 영혼.
영혼 없는 인간이 견하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낸 기적.
견하의 무미건조한 감사에, 다른 세상의 미리안은 눈물이 가득 찬 얼굴로 활짝, 웃었다.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 자체로 기적이야.”
그것은 이쪽 세상의 미리안이 남긴 기적이었다.
절대로 마주칠 수 없었던 두 사람이, 환상 속에서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
말하자면 이것도 이 세상 미리안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누나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측했다고?”
“너는 벨리사리우스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이건 믿음과는 관련 없는 것이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건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과 같다.
미리안은 냉철하게 ‘진다’는 결과를 예측하고, 그 결과를 뒤엎을 대책을 마련하는 인간이다.
그 대책을 견하가 따를 수 있으리라 믿는 것.
그것이 미리안이 보여주는 믿음이다.
다른 세상의 미리안은 견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나도 또 다른 내가 맡기고 간 일을 해야겠네.”
“무슨 일……?”
“뭐겠어. 네가 벨리사리우스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 설마 또 다른 내가 그 정도 안배도 해놓지 않았을까 봐?”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싱긋 웃는 그녀의 얼굴은, 견하가 기억하고 또 좋아하는 모습과 너무도 닮아서…… 혼란스러웠다.
고개를 흔들어 혼란을 떨쳐낸다.
견하는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너의 미리안은 이런 말을 남겼지. ‘인간은 인간을 초월하여 더욱 인간다워진다’고.”
무슨 말일까.
선뜻 와닿지 않는다.
“인간을 초월해서 인간이 아닌 것에 도달하려는 벨리사리우스의 방향성은 잘못되었다는 말이야.”
이(理)와 기(氣).
원리와 현상.
본성과 감정.
10년 전 루우에게서 들었던 바로 그 이야기로, 10년 만에 돌아왔다.
“기억해? 너의 미리안이 동명시 지하에서 파멸인과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한다.
기의 극한에 다다른 사람은 이가 뒤틀린 존재마저도 이기고 만다는 사실을, 리안은 몸소 보여주었다.
“너의 미리안이 최후에 붉은 세상을 향해 날렸던 일격을 기억해?”
어떻게 잊으랴.
그녀의 마지막 일격은 대양을 건너 대륙에서 대륙까지 닿았다. 세상을 침범하는 혁세주마저도 그 일격에 물러나야만 했다.
다른 세상의 미리안은 아직도 놀랍다는 듯이 감상을 덧붙인다.
“그런 위업은 고려 태조의 할아버지, 작제건이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산을 뽑고 바다를 하늘로, 하늘을 땅으로 옮길 정도로 세상의 이치를 조작하는 이단이라 할지라도, 무적은 아니라는 말.
오히려 평범한 인간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해준다는 말.
미리안은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그 진실을 증명해냈다.
고개를 숙인 채, 견하는 중얼거렸다.
“……나도 누나 흉내를 내라는 이야기야?”
주견하가 미리안을 사랑하는 마음.
하지만 사랑하는 ‘상태’라는 정보와, 사랑한다는 감정에 대한 이해가 있을 뿐.
지금 상태의 견하가 그 마음을 담아 미리안과 같은 일격을 날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견하를 위로하듯, 다른 세상의 미리안은 다가와 얼굴을 감싸주었다.
그 손짓도, 눈빛도, 원래는 ‘그녀의 주견하에게’ 보냈어야 하는 것일 텐데도.
“너의 미리안은 이렇게 말하더라.”
견하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한다.
“그는 마음이 많이 다쳤을 거라고. 그래서 도저히 마음에 여유가 없을 거라고.”
견하의 인간성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버렸다면,
그것을 그러모아 한 조각, 한 조각씩 이어 붙이는 사람은 미리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마지막으로 힘을 빌려주어야 한다고.”
***
주견하의 괴물 형상, 그 머리가 파괴된 찰나.
찰나 동안에 튀어 오른 핏물 속에서,
주견하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저히 인간의 형상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 순간에, 리안은 마지막 기적을 일으켰다.
그가 사람으로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은 죽음 뒤에도 살아남는다.
인간의 불멸성은 영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 뒤에도 남는 것.
이를테면 제자에서 제자를 거치며 이어지는 가르침 같은 것.
시대와 지역은 다를지라도 고귀한 정신이 걸어간 길을 따르겠다는 사상가들의 걸음.
이와 같이 여기, 엑스라샤펠 상공에서는 미리안이 남긴 마지막 마음이.
주견하라는 사람의 형상으로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신종의 길로 접어들었다 자부하던 벨리사리우스도 멍하니, 피투성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주견하를 본다.
대처할 시간 따위는 없다.
설령 대처할 수 있다 해도-
-이번에는 주견하의 검이, 벨리사리우스의 이마에 꽂혔다.
반격, 반격을 해야.
벨리사리우스의 날개가 움츠러든다.
그를 둘러싼 원형 띠도 움직임을 멈추고 범위를 좁힌다.
거기 달린 모든 안구가 견하를 응시한다.
불태운다.
“……뭣……”
하지만 불길은 견하를 태우지 못한다.
벨리사리우스가 끝내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면, 신은, 신종은 인간이 우월해진 뭔가가 아니다.
진화는 우월해지는 과정이 아니다.
결국 신종은 이계의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혁세주는 영혼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는 욕망을 통해 세상에 온다. 그리하여 세상을 왜곡하고, 끝내 인간의 이치를 비틀어 인간을 해친다.
이것은 역으로,
영혼을 갈망하지 않으며,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삶이 단 한 번만으로 완결됨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라면,
혁세주와 같은 존재는 그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신벌은 신을 믿지 않는 자를 털끝조차 건들지 못하니.
요컨대 신의 적은 신이 아니다.
신을 물리치는 자는 더 강력한 다른 신이 아니다.
신을 죽이는 자는 신앙 없는 인간이다.
신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신의 곁에 앉고 싶어 하지도 않는 인간.
오로지 인간으로서 인간 된 자.
그가 결국-
-신의 머리를 취하고 만다.
***
머리가 잘린 벨리사리우스의 몸뚱어리가 엑스라샤펠 시가를 향해 곤두박질친다.
머리가 떨어져 나간 단면에서 흐르는 피가 허공에 선을 그린다.
함께 추락하면서, 주견하는 벨리사리우스의 시체를 밟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의 잘린 머리는 그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잘린 머리의 눈은 아직도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떠져 있다가, 서서히 빛이 흐려진다.
그 머리 아래, 목이었던 단면에서도 피는 계속 흘러나와 견하와 벨리사리우스의 날개를 적신다.
추락하는 주견하를 천사의 무리가 뒤쫓아 하강한다.
***
다이온 연방의 잠수함대가 아라비아 반도, 동아프리카 해역을 봉쇄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페르시아 인민공화국의 양해를 얻어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대가 메소포타미아 하구 지역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상의 보고를 듣고 해야 할 결정을 마친 신황,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는 어전 뒤뜰을 거닐었다.
거기에, 그녀가 그리워한 소년의 모습이 있는 걸 확인할 때까지.
루우가 10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견하는 피투성이였다.
모든 일을 마치고, 그는 마지막으로 루우를 보러, 그녀와 그의 아이를 만나러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말없이 다가가 신황은 충직한 신하였으며, 사랑하는 소년이었으며, 남편이고, 이 모든 고난의 세월을 함께했던 동지를 안아주었다.
뿔과 비늘이 혹시라도 그를 다치게 할까 조심스럽게.
문득 견하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루우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것이 흉내 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착각도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라는 것을 루우는 안다.
그렇게 잠들듯,
소년은 마침내 이십칠 년의 여정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