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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39화 (539/541)

신이 아닌 사람으로(1)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선전포고하지 않을 거요.”

외무장관 송인섭은 서유럽 동맹국의 대사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한순간에 사색이 된 대사들의 뭐라 말하려는 걸 손짓을 제지하고, 송인섭은 덧붙였다.

“‘공식적으로는’ 말이오.”

그 강조된 말에 대사들은 비로소 약간 안심하는 눈치였다.

다이온 단독으로 멕시카 공략전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은 진즉에 전해졌다.

바람을 타고 스멀스멀 북극으로 올라가 칼마르와 브리튼의 북쪽 바다에도 나타난 ‘재의 먹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일어났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빈도, 베를린도 함락된 지금 다이온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서유럽의 운명도 결정된다.

칼마르에서는 이윌란을 포기하고 발트해를 방패 삼아 방어전에 돌입할 계획을 꾸리는 중이고, 브리튼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륙을 포기할 심산이다.

신성 제국도 비밀리에 황실 인사 몇몇과 정부 기관 일부를 파리로 이전한 상황.

다이온이 로마 제국을 어떻게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다이온의 방침은?”

“벨리사리우스만 제거할 계획이오. 말하자면 참수 작전이지.”

“그게…… 무슨…… 가능하단 말입니까?”

황당하게 들리는 말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싶은 절박함.

송인섭은 기분 같아서는 그 절박함을 즐기고 싶었지만, 사실 그도 위에서 전달받은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라. 일단 기다려들 보시죠.”

***

이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높이는 성인 두 명, 몸길이는 성인 네 명에 달한다.

그것이 카라코룸 근교에 마련된 대사원에서 몸을 눕힌 채 쉬고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옛 궁궐에서 조각상으로 자주 보이는 해태에 가깝다.

얼굴 양쪽으로 십수 개의 안구가 들어차 있고, 등과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무수한 촉수가 달려 일렁거린다는 점만 빼면.

공식적으로는 ‘요왕 전하’라 불리는 인물. 주견하.

그는 인간의 형태를 완전히 잃었다.

이전처럼 다시 인간의 형태를 회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스스로 이런 형태를 취한 건가.

투글룩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떠다니는 저주받은 천사의 무리.

신을 자처하는 황제와 맞서려면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

투글룩은 직접 모든 사항을 점검했다.

이번 싸움은 주견하의 마지막 싸움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벨리사리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실패하면 아마도 전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되겠지만.

지난 1차 세계대전을 결정한 인간들은, 그것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번 2차 세계대전은 그걸 바라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거다.

벨리사리우스가 승리하면 인류는 전쟁조차 하지 못할 뭔가가 되겠지.

“전하.”

주견하의 최측근. 유지나가 괴물의 거대한 얼굴 근처에서 말을 건다.

“쿠아우테목, 소멸했습니다.”

함락이 아니라 소멸.

괴물이 된 주견하의 몸 주변을 도는 푸른 빛이, 그 도시에 얼마만큼의 공격이 가해졌는지 암시한다. 투글룩은 꿀꺽, 침을 삼켰다.

유지나의 저 말을 알아들을 이성이 남아 있을까.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섬멸전이 아니라 추방 전쟁으로 전환하도록.”

“바다로 몰아낸다는 말씀이십니까.”

“유럽으로든 잉카 대륙으로든 망명을 시작하면 막을 필요는 없겠지. 도망갈 길이 뚫렸다면 저들은 이제 충성할 머리도 없어졌겠다 순식간에 무너진다.”

“최고사령부에 전달하겠습니다.”

견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나는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아두겠다는 듯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대단한 여자였다.

사랑하는 남자가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렸다면 몇 번이고 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평소처럼, 보고하고 명령을 받고 수행한다.

“전시 경제, 총동원 체제는 이 모든 일이 끝나고도 한동안 유지한다는 방침을 전해줘.”

“……전쟁이 끝나고서도 유지된다면 기업들이 반발하지 않을까요?”

“나라는 기업가들 청운의 꿈을 펼치라고 놀이터 마련해주는 곳이 아니야. 고용과 안정을 유지하는 시스템의 부품으로 작동하도록 ‘허락’해주는 곳이지. 못 받아들이겠다면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죽이고 빼앗아라. 최효윤 원수에게 전달하면 알아서 할 거다.”

유지나 본인도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몰락한 집안 출신이건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명령을 받들었다.

병사도 노동자도 대체할 부품은 얼마든지 있다. 마찬가지로 주견하를 대체할 부품도 제대로 마련해둔다면 이 황국 체제에는 작동한다. 그것이 주견하의 관점이었다.

이 원리는 기업가들에게도 마찬가지라, 재능있는 기업인도 얼마든지 대체할 부품을 찾아낼 수 있다고 주견하는 말한다.

“아니지. 우리 총알은 아까우니까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내라.”

그것이 주견하가 구상한 황국의 총력전 시스템.

“신황 숭배 운동의 확산을 위해 애국지사 양성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거기까지 말한 뒤에야, 주견하의 여러 눈동자가 투글룩을 향한다. 유지나도 그걸 눈치채고 투글룩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투글룩은 잰걸음으로 주견하에게 다가갔다.

“내가 벨리사리우스를 죽이는 데 실패하거나, 벨리사리우스를 죽이기 전에 세상이 먼저 망가져 버리면……”

“어마어마한 부담이 폐하께 가해질 것입니다.”

“그럼 더는 지체할 수 없겠군. 출격한다. 준비는 됐나?”

“명하시기만 한다면……!”

막바지 절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주견하라는 짐승, 신종에 가까워진 무언가는 몸을 일으켰다.

이젠 하얀 표면 위로 아예 푸른 불꽃이 뒤덮고 있다.

기도문을 외는 소리가 대사원의 온 부지 안에 울려 퍼진다.

문을 여는 것과 같이.

시공포를 쏘아 보내는 것과 같이.

푸른 빛은 주견하를 서쪽 하늘 멀리 쏘아 보냈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푸른 점으로 사라진 주견하를 향해 유지나는 경례를 올렸다.

***

이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 죽을지는 모르겠다.

죽는 순간 이 삶이 행복했노라 말할 확신도 들지 않고.

하지만 최소한 루우, 효윤, 지나…… 남겨질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

그런 ‘가능성’ 정도는 남겨둘 수 있겠지.

***

엑스라샤펠 근교 상공.

독수리는 활공하는 것만으로도 지상에 공포를 심어준다.

마찬가지로 한 번 총과 폭탄으로 긁고 지나가는 항공기의 공격과 달리, 동쪽 하늘 저편에 떠 있는 날개와 띠의 거대한 형상은 절망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항공기의 폭격은 역시 절망적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한 번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이번에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안도의 순간도 찾아왔다.

하지만 저것은 다르다.

가장 천사 같은 형상을 한 악마들.

사람들은 악마를 물리쳐달라고 신께 기도를 올리지만, 정작 그런 기도는 세상의 왜곡을 가속하고 벨리사리우스에게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지켜본다.

이 엑스라샤펠 공방전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죽어 나갈지.

영혼을 통한 다음 생애를 갈망할지.

공세를 막 명령하려는 바로 그 순간,

하늘을 가로지른 푸른 빛이 벨리사리우스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속도를 늦추려는 동작 하나도 필요하지 않은, 공간 질주.

그것은 그렇게 ‘나타났다.’

벨리사리우스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지상의 로마군이 사태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주변의 천사처럼 왜곡된 이단들이 자기네 신께 달려가기도 전에.

촉수들의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벨리사리우스의 날개와 거기 박힌 무수한 눈깔을 꿰뚫었다.

***

“이번 작전은, 순전히 암살 작전입니다.”

신황 루우와 김천열 앞에서 투글룩은 그렇게 설명했다.

“요왕은 벨리사리우스의 머리만 자르면 급한 문제는 해결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아니, 요왕에게 남은 시간이 벨리사리우스만 간신히 해결할 정도겠지요.”

루우는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황국을 계승할 아이의 안전을 위해.

그러니까 어머니로서, 이 모든 것을 그저 카라코룸에 앉아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주견하의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낼지 그저 기다리기만 하란 말인가?

그럴 순 없다!

미리안. 루우가 존경했고 지금도 존경하는 그 여자는 절대로 이 상황을 지켜만 보진 않았을 것이다!

신종의 위상에 다다른 이단끼리의 전투, 거기에 평범한 인간은 달려들지 못할지라도,

미리안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했을 것이다.

온몸을 혹사하며 국가 경영에 매달린 그 뒷모습을, 수년이나 지켜보지 않았던가.

“즉각 각료들을 소집하라.”

“폐하?”

“짐은 로마 제국에 선전포고하겠다.”

너 혼자 싸우게 하지는 않겠다.

최후의 결전은 함께하리라.

“폐하……! 그것은 요왕의 뜻이……”

“그것은 짐의 뜻이 아니다!”

루우의 노성에 김천열과 투글룩은 입을 닥쳤다.

어좌에서 일어나며 루우는 다시 한번, 신황의 무거운 뜻을 강조했다.

“대원황국은 오늘부터 로마 제국과 전쟁에 돌입한다.”

***

얼핏 사자 같기도 하고, 개를 닮기도 한 그 짐승은 벨리사리우스에게 박아넣은 촉수를 더욱 깊이 찌르며 아래로 내리눌렀다.

두 거대한 괴물이 추락한다.

신경을 헤집는 충격 속에서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든 괴물의 정체를 알아챘다.

“너로구나, 주견하!”

그 인간적인 외침은 추락의 광풍에 휩쓸려 견하의 청각까지 닿진 않았다.

날개와 팔이 그대로 검이 되어, 견하의 촉수를 잘라낸다.

다리로 주견하의 배를 걷어차 거리를 벌리고, 몸을 뒤집어 다시 날아오른다.

피를 흩뿌리며 상승한 벨리사리우스의 몸은 곧 완벽하게 재생된다.

고개를 내려 주견하라는 짐승을 바라보니, 그것도 잘린 촉수들을 재생하고 있다.

검을 들어 내리친다.

그대로 불벼락이 주견하가 있던 자리로 날아간다.

주견하는 벼락을 타고 오른다는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이며 곧장 벨리사리우스에게 육박.

벨리사리우스의 날개 몇 장과 팔 하나를 뜯어낸다.

로마 황제는 그런 공격을 가하고 구름 위로 날아가 버린 주견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방금 내리친 불길로 지상의 아군이 입은 피해는 알 바 아니었다.

추격한다.

천사 같은 괴물들도 뒤를 따른다.

지상에서 보기엔 구름 너머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겠지만,

구름 위에서 펼쳐지는 전투는 그렇지 않았다.

벼락을 벼락으로 맞받아치는, 신들의 전쟁.

자그마한 천사들 수십 개체가 달려들어 주견하의 몸에 창을 찌른다.

그러나 주견하는 통증도 못 느낀다는 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떨구거나, 촉수와 이빨로 짓뭉개버린다.

자신과 벨리사리우스를 제외하면 다른 것들의 전투력은 무의미하다, 그런 생각을 한순간.

이번에는 주견하의 미간 앞까지 육박한 벨리사리우스가 그대로 검을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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