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관측(5)
쿠에츠팔린 정권의 위기라면 확실히 위기였다.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뿐, 병사들을 머나먼 이국의 섬으로 밀어 넣고는 개죽음당하게 한 책임은 쿠에츠팔린의 판단력에 있잖은가.
가마쿠라 상륙작전이 성공했을 때 기뻐 날뛰며 각료들을 끌어안았던 광경이, 이제는 민망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금방 끝났다고는 하지만 대륙 상공의 혁세주 출현으로 입은 피해도 만만찮았다.
그럼에도 쿠에츠팔린을 축출하지 않는 것은, 모두의 마음속에 일종의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시체까지 바쳐가면서 나라에 헌신했다. 헌신했다고 생각한다.
자식의, 형제의, 배우자의 시신도 바쳤다. 모두가 숭고한 가치를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인제 와서 쿠에츠팔린을 몰아내면? 쿠에츠팔린 한 사람의 목이야 쉽게 매달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바친 희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희생이 개죽음이 되지 않도록, 더 많은 장병의 목숨을 바쳤다.
그마저도 개죽음이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더 많은 목숨을 바치려 한다.
어느 시점엔가 ‘남은 목숨이라도 살려야 한다’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깨달음 앞에서 사람들은 눈을 돌려버린다.
혹시라도 나서서 깨달음을 설파하는 자가 있다면 주변에서 죽여버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실패한 산업에 대한 투자.
차라리 개죽음임을 인정했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을.
그러나 쿠에츠팔린도, 초필로틀도 아직 ‘만회’할 방법이 남아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알래스카에서 여기 쿠아우테목 시까지는 아직 광대한 대륙이 펼쳐져 있다.
설령 대륙의 서해안 일대가 전부 넘어가더라도, 광활한 사막과 케찰코아틀 산맥에 기대어 방어선을 펼칠 수 있다.
쿠아우테목 시까지 전선이 밀려도, 일단 중앙정부의 체계만 튼튼하다면 끝내 다이온도 공세 종말점에 이를 것이다.
그때 반격을 가하든 뭐든 해서 적을 평화 협상 자리에 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서유럽 각국이든 잉카든 마푸체든 로마든, 대사들이 전부 쿠아우테목에서 철수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했다.
보여주리라.
세계 1위 초강대국의 저력을.
하지만,
쿠에츠팔린과 초필로틀의 마지막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희미하게 지면이 떨려왔다.
떨림은 곧바로 격심해져, 두 사람은 동시에 비틀거렸다.
지진이었다.
***
화산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유황 온천지대.
그 주변 언덕들이 갑자기 움푹 땅으로 꺼졌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폭발했다.
산이 무수한 흙더미로 흩어져 날아올랐다.
굉음이 근처 마을을 휩쓸었고, 건물이 무너졌다.
눈이 멀 듯한 빛이 세상을 휘감았다.
지표면 아래 들어 있던 용암 덩어리가, 태양보다 더 밝게 타올랐던 것이다.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던 용암이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의 생명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것도.
뒤이어, 검은 산사태가 땅을 굴렀다.
하늘에선 검은 재가 폭설처럼 쏟아졌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산소 대신 기체화한 암석을 들이마신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 나갔다.
잿더미로 만들어진 먹구름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다이온군이 신무기로 산맥 자체를 뒤엎어버렸다는 소문도 함께 퍼져나갔다.
멕시카 국민들은 어렴풋이 느꼈다.
다이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 한 사람도,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살려둘 생각이 없다고.
아니 이 땅에 생명 자체를 남겨둘 생각이 없다고.
그 느낌은 사실이었다.
***
‘문’을 통해 방한 및 방독 장비가 원활히 지급된다.
시야도 한정되고 호흡도 불편해지고, 땀이 차면 얼굴이 가려워지는 데다 마음대로 긁을 수도 없지만, 다이온군 병사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 장비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준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장비들은 적의 사기를 꺾는 데에도 효과가 좋았다.
어두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만 같은 형상은, 적에겐 죽음을 선고하는 악마처럼 느껴질 테니까.
“정말로 이대로 쿠아우테목까지 간다고?”
“지도 본 적 있어? 천 킬로미터는 되겠던데.”
“지금 화산 터트려서 멕시카 새끼들이 넋 놓고 있을 때 몰아친다는데.”
“그나저나 화산을 터트리다니…… 대체 무슨 수로 그렇게 했대?”
“몰라. 멕시카 애들이 공간 도약인지 뭔지 한 것처럼 했겠지 뭐.”
병사들의 추측처럼, 다이온은 혁세주 관련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번 폭발을 만들어냈다.
폭탄을 아무리 퍼부어도, 당장은 이론만 나와 있는 핵무기로도 화산 폭발을 일으킬 수는 없다. 시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단 다이온군은 화산 지대로 추정되는 곳에 시공포 공격을 퍼부어, ‘문’을 열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문을 반드시 허공에, 또는 지표면에 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지표면 아래 깊숙한 곳, 인간의 장비로는 도저히 뚫지 못할 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용암의 방에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문을 통해 지표면으로 분출시켰다.
그 약간의 흔들림만으로도 지하의 압력에 미묘한 영향을 끼쳐, 깨져버린 균형이 연쇄적으로 더 큰 붕괴를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이런 공격이 가능하다는 걸 알면 적이 좀 빨리 항복했으면 좋겠는데.”
“윗분들은 이 대륙 자체에 섬멸전을 실행할 모양이던데.”
“참말?”
“참말로.”
“야, 참 속 편한 소리들 하시는구만. 결국 그것도 우리처럼 일선에 나가 있는 누군가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투덜대면서 다이온군 병사들은 진군한다.
한 번은 모두가 욕설을 뇌까렸다.
새카만 재가 들러붙어서 타버린 인간의 시체들을 보고 나서였다.
“……아무리 봐도 저건 애랑 엄마잖아…….”
“……시끄러워. 걷기나 해. 오늘 안으로 도착해야 할 지점이 아직 한참이야.”
절망에 빠진 채 죽어가는 자들을 계속 보았다.
절망에 빠진 채 항복하는 자들도 계속 나왔다. 병사들은 그들을 후속 부대에 적당히 맡겼다. 포로로 어디에 가둬두든 죽이든 자기들 몫은 아니었으니까.
절망에 빠진 채 저항하는 자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그래도 이거 너무 쉽게 밀리는 거 아니야?”
“저 사람들한테는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았겠지. 우리야 이 지옥에서 나가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이대로 다이온군이 아즈텍 대륙에서 철수해버려도 저들에겐 희망이 없다.
점령지 정책 따위는 수립하지 않는다, 쿠아우테목에 이르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 그런 명령이 내려왔다.
보급도 문을 통해서 하니까, 점령지를 관통하는 보급을 유지하려 들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마구잡이로 파괴해도, 전통적인 전쟁에서 염려하는 보급망 훼손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파괴할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마치 멸망한 세상을 거니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어떤 병사는 몸을 웅크렸다.
재의 폭풍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쬔다.
이런 날씨에선 비행기가 뜨지도 못하고, 뜬다 해도 잿더미 구름 아래로 뭘 발견하지도 못한다. 불빛을 보고 저격이나 포격을 가할 적은 멀리멀리 도망간 지 오래다.
남쪽으로 내려올 만큼 내려왔는데, 이상할 정도로 춥다.
그러고 보니 해를 못 본 게 며칠째더라.
새콤한 영양제도 보급품으로 나오곤 있지만 기분이 우중충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군의관은 이 작전의 철저함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병사들이 ‘햇볕을 쬐지 못할 것’을 상정한 보급품.
요컨대 아즈텍 대륙을 멸망시켜버리리라는 명령은, 말뿐인 게 아니라 진심이었던 것이다.
***
“적은…… 이상한 구조물을 건설하면서 남하하고 있습니다.”
매번 회의를 열 때마다, 쿠에츠팔린과 막료들은 이것이 마지막 회의가 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다.
흐릿한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할 정도로 전선은 무너져 내려, 그들 앞에 놓인 건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었다.
“화가의 솜씨가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구조물 생김새가 이런 건가.”
“……구조물 자체가 이렇습니다. 적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주변 잡동사니라도 모아서 구조물을 만듭니다.”
구조물 주변에 모여 뭔가 의식을 치르는 아시아의 야만인들이 그려진 그림도 있다.
그것이 어딜 가나, 매일 빼놓지 않고 진중에서도 반복되는 신황 숭배 의식이라는 걸, 멕시카의 머리인 이들은 모른다.
이제는 수족이 다 잘려 나간 머리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쿠에츠팔린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쓸모 있는 정보를 가져오란 말이야! 이 쓸모없는 군바리 새끼들! 적은 점점 쿠아우테목을 조여오는데, 네놈들은 적이 식사하는 거나 느긋하게 그림으로 그려대고 있어! 연필로 이따위 놀음이나 할 거면 돌격해서 총알받이라도 되란 말이다!”
회의에서 쓸만한 결론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전선을 유지하며 버티고 싶어도, 그렇게 시간을 끌며 희망을 찾고 싶어도, 적 역시 희망을 짓밟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법이니까.
***
최효윤 원수 각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 역시 방독면을 썼기 때문이다.
그녀를 다른 군인들과 구분 짓는 건 약간 다른 군복과 화려한 계급장 및 훈장들이었다.
멕시카의 북극해를 통한 공세를 대비해 요새를 축조한 일.
그 요새들로 1, 2차 방어선을 형성하며 멕시카의 공세를 막아 극북 지역을 방어한 일.
태사 미리안 사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한 일.
알래스카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일.
그리고 쿠아우테목을 향한 유례없는 쾌속 진격 속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공.
그 모든 일이 그녀의 가슴팍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누구라도 그 훈장들을 보면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 정도 훈장을 단 인간은 본토에 있을 김천열 정도겠지.
“각하.”
여기까지 그의 부관으로 따라온, 태주갑 준장의 부름에 효윤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답한다.
“수십만의 쥐새끼들이 착실히도 쿠아우테목으로 모여들었군.”
그녀의 시선은 작전지도에 못 박혀있다.
“……정말로, 실행하시는 겁니까?”
“인제 와서 실행 외에 무엇이 남아 있지?”
그녀가 최초로 지휘했던 병력, 태주갑 이하 이단들은 모두 진급하여 각자 부대를 이끌고 쿠아우테목을 포위하려 우회 중이다.
“쥐 떼를 확실히 몰아넣을 만큼 몰아넣었다면 소각해야지.”
“……각하를 보고 있노라면, 요왕 전하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태주갑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랄한 비판이었다. 당신이 그의 잔혹함까지 흉내 낼 필요는 없잖은가, 하는.
효윤은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 태주갑의 얼굴을 봤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자신은 견하의 죽음 이후를 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견하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지도.
하지만 효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성 따위와는 거리가 먼, 단호한 명령이었다.
“실행해.”
그 한마디에 쿠아우테목 소멸 작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