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관측(4)
입술이 아니라면 콧잔등에, 그것도 아니라면 이마에.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안녕히, 한때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
말은 삼키고, 눈물은 흘리지 않고 북방의 용장(勇將)은 자기 사령부로 돌아갔다.
북방의 용장이라는 별명이 자신에게 어울리는가, 효윤은 한 번 돌이켜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식보다는 무예, 이단의 재능을 갈고닦는 쪽을 우선하여 교육받았었다.
리안의 부친과 친했던 어떤 태평천국 장교의 딸이었기에, 그 인연으로 리안을 지킬 칼이 되도록 길러졌다.
리안이 효윤에게 마음을 터놓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도통 말이 없는 그녀 곁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킨다는 자신의 역할에 그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던 세월이었다.
내전은 그런 효윤에게도, 리안에게도 변화를 일으켰다.
의지할 ‘가족’ 비슷한 것이 서로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 만난 한 소년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루우까지 포함해 네 사람,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넷을 가족으로 묶어주었다.
리안을 지키는 것 외에, 최효윤만의 삶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이후의 일이었다.
리안은 자신에게 종속된 ‘칼’로서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지휘관으로서 경험을 쌓고, 마침내 극북방면군 사령관을 거쳐 전쟁성 장관의 자리까지 올랐다.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에 여기까지 온 건 리안의, 루우의, 견하의 중요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효윤이 자기 소질을 발견한 덕분이기도 했다.
다른 경우라면 몰라도, 견하는 이 전쟁에서 자리만 차지할 무능한 지휘관을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리안의 제국을 지킬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리안 본인은 지키지 못했다.
죄책감과 회한은 복수심으로 돌변한다.
사령부의 장교들은 효윤에게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녀의 명령 한 마디면, 무제한 잠수함 작전 덕분에 조용해진 해협 너머로 군대가 출발하리라.
극북 지역에서 직접 상륙전에 투입될 부대를 제외하고도, 본토에서 대기 중인 병력, 새로 징집된 병력, 바라트 전선에서 돌아온 병력 모두가 이번 작전을 위해 대기 중이다.
신황 루우가 황군(皇軍)의 최고사령관을 스스로 겸하기로 한 상태라, 김천열 원수마저도 효윤의 신호를 기다리는 처지다.
“가라. 원수들의 땅으로 가서 그 뿌리까지 절멸하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담담한 살육 명령이, 효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는 조건.
첫 번째는 혁세주를 소환이다. 혁세주를 소환하면 열린다.
두 번째는 과거 혁세주가 소환되는 바람에 세상의 경계가 옅어진 곳을 노리는 것이다.
신앙을 모아서 쏘아 보낸다는 ‘시공포’의 성질은, 결국 영혼을 갈망하는 마음을 통해 들어오는 혁세주 사태와 비슷하다.
그 시공포를 바라트를 멸할 때보다 더 높은 밀도로 알래스카 전역(戰域)에 퍼부어댔다.
효과는 혁세주 소환과 같다.
그 부담은 신종에 근접한 자들이 짊어진다.
멀리 유럽 전선에서는 벨리사리우스와 그가 만들어낸 족속들이, 기쁨에 겨워 노래 부르며 진화를 받아들인다.
동방에서는 원래 루우가 짊어져야 했지만, 견하는 투글룩에게 명해 부담이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만, 벨리사리우스 황제가 있기에 전하께 가는 부담이 많이 희석됩니다.”
투글룩은 견하의 몸을 살피며 말한다.
견하는 이미 자신이 인간으로 남아 있을 시간을 단념했고, 투글룩 역시 견하의 최후를 준비한다.
하얀 괴물의 갑각은 이미 몸 절반을 뒤덮었다.
견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폐하의 아이에게도 부담이 가고 있겠지?”
투글룩은 그 표현의 어디가 마음에 걸렸던 걸까.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전하의 아이이기도 합니다.”
견하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희미하다.
10년 전의 일이니까.
무참하게 살해당한 시신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의 무덤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나서야 겨우, 행복했던 시절 비슷한 무언가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아이가 온전하게 태어날 수 있을까?”
“보장은 못 합니다.”
투글룩은 루우가 태어나기 이전, ‘실패한’ 그녀의 형제들을 떠올렸다.
“힘써보기야 하겠습니다만.”
“그대에게도 부탁하네만…… 내가 어서 모든 걸 끝내야겠지.”
부성애일까? 견하는 모르겠다고 결론 내린다. 어쩌면 단순한 의무감,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들을 흉내 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이도, 그 어머니인 루우도 무사했으면 좋겠다.
여기에는 루우의 후계 구도가 안정되어, 그가 만들고 떠나는 황국 체제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
불순물처럼 섞여 있는 무언가가.
‘사람으로 살아달라’는 부탁.
사람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사람의 삶을 살고, 다음 세대에 사람의 삶을 이어 나가고…….
마침내, 행복해지라던 누군가의 부탁.
나는 그 부탁대로 살고 있나? 살아 있나?
문득 견하는 허동주를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기만 하면 씁쓸함과 분노가 함께 올라온다.
결국은 그의 구상대로 되지 않았나.
신수덕은 한 명의 독립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허동주가 남기고 간 망집 같은 것이다.
허동주가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굴러간 원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10년을 발버둥 쳤지만, 그 결과는 힌두 및 아즈텍 대륙과의 전쟁.
결국 자신이 만든 황국 체제도 허동주나 천손민족협회가 꿈꾸던 것과 크게 다른 건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로마 제국에는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다.
신들이 부여한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건만, 발버둥 친 행적 그 자체가 운명대로 돌아가더라, 라는 이야기.
허동주가 만든 이야기의 굴레 안에서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만 할까.
“벨리사리우스를 죽일 계략에는 만전을 기해야 한다.”
투글룩은 대답하기 전에 견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요왕 주견하는 이곳을 보지 않는다. 그의 눈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세계를 보고 있다. 원리가 무너져가는 위태로운 세계를.
세계의 멸망을 관측하고 있다.
“확실성을 위해 전하, 당신의 목숨마저도 내팽개친 대책을 짜고 있습니다.”
견하는 끄덕였다. 투글룩의 눈에 잠깐 슬픔 비슷한 것이 보인 듯했지만, 무시했다.
그런 공감을 나눌 사이는 아니다.
견하에겐 견하대로 의무가 있고, 투글룩에겐 투글룩대로 의무가 있을 뿐.
그리고 그 의무는 황국 신민 모두에게도 주어졌다.
***
“케찰코아틀 산맥 지하의 화산이 폭발하면 그것은 인류 멸망으로도 이어질 재해가 될 겁니다!”
견하에게 예측 결과를 바친 과학자 중 일부가, 목숨 걸고 작전에 반대했다.
재능있는 사람들이지만, 안타깝게도 논쟁할 시간은 없었다.
그들에게 이 전쟁을 왜 빨리 끝내야 하는지 설명한다든가, 치명적인 재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약속한다든가……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그들이 설득되거나 약속을 믿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으므로 더더욱.
감시를 강화한다.
아니나 다를까 멕시카 자주국에 작전에 관련된 정보를 팔아넘기려는 인간이 나온다.
인류를 위해 조국을 배신하겠다, 뭐 그런 숭고한 정신이었겠지만 견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즉각 체포와 전원 처형을 명령했다.
그들의 제자나 가족들도 체포하고, 연구 자료는 태사부, 이제는 요왕부라고 불리는 곳으로 압수되었다.
정말 학자들의 우려대로 북반구 전체에 수년에 걸친 겨울이 휘몰아쳐 수백만에서 수천만이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견하는 냉정하게 저울질했다.
무엇이 더 값싼가.
멕시카를 포함한 인류의 존속인가.
아니면 멕시카를 희생시킨 나머지 인류의 존속인가.
아즈텍 대륙에 손대길 망설이는 바람에 인류가 모조리 그 형상과 원리를 잃고 괴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인류와 세상의 원리를 지킬 것인가.
여기에 견하는 한 가지 추를 더 올려놓았다.
루우가 살아남고, 루우의 황국 체제가 유지되는 것.
저울은 한쪽으로 단번에 기울어졌다.
벨리사리우스와 멕시카인들, 혹은 이 작전의 결과 죽게 될 무수한 인간의 목숨이 그것들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다.
***
시공포의 포격이 쏟아진 자리에 남는 것은 없었다.
마을도, 사람도.
아직도 신발 밑창을 녹일 듯이 뜨거운 대지 위로, 문이 열리고 다이온군이 쏟아졌다.
한 번 대륙 곳곳에 혁세주가 출현한 사태가 일어났기에, 예상 이상으로 문의 개방은 원활했다.
문을 통과한 다이온군은 아직 저항 중인 멕시카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서쪽에서 해협을 건너 밀려오는 다이온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다이온군에게 협공당해 안 그래도 흔들리던 멕시카군은 쉽게 섬멸당했다.
교두보는 순식간에 확장된다.
교두보들끼리 연결되고, 알래스카 해안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점령지가 탄생한다.
일단 교두보가 넓은 점령지로 변하면, 다시금 반격을 가해서 걷어내는 건 불가능해진다.
밀고 밀리는 전선 싸움이 되니까.
게다가 멕시카군이 반격해보려 해도, 다이온군은 다시금 그 푸른 섬광을 저 먼 대륙에서 쏘아대며 병력을 증발시켜버리거나, 후방에서 공간 도약을 해 포위섬멸을 시도하니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었다.
멕시카의 멸망이 서북쪽에서 서서히 밀려왔다.
***
쿠아우테목 시,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은 집무실 집기를 던져대며 날뛰었다.
“왜 안 된다는 건가! 대체 왜!”
초필로틀은 차가운 눈길로 그의 추태를 보고만 있었다. 그는 최고지도자라는 인간의 판단력도 경멸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쿠에츠팔린의 망상에 놀아난 자신도 혐오하는 중이었다.
“당장 적의 수도 카라코룸인지 뭔지에 문을 열란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누가 먼저 멸망하느냐 하는 싸움이야! 쓸 수 있는 군대는 모조리 문으로 밀어 넣어! 그 몽골 황제 년을 죽이란 말이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안 됩니다.”
“명령에 불복하는가!”
“세상의 원리를 향해서도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고 하실 겁니까.”
초필로틀의 말대로 지금 문은 다이온군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장소에만 열렸다.
이쪽에서 저쪽 대륙을 향하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첫 기습을 당한 이후 뭔가 조치를 취한 거겠지.
다른 모든 종교와 종파를 가혹하게 탄압해가며 ‘신황 숭배’를 강요하고, 그것으로 ‘살아있는 신’에게 신앙이 집중되도록 해 힘으로 활용한다…… 그런 복잡한 사정까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초필로틀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이제 멕시카가 얼마만큼의 자원이 있든, 사람이 있고 산업력이 있든 상관없이, 다이온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일만 남았다는걸.
“지금까지의 패배는 일시적인 패배였을 뿐이야……. 승리를 위한 초석이란 말이다! 우리는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섬멸하고 바로 반격에 나설……”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서태평양에서의 작전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고, 일본 열도에 상륙시킨 대군이 섬멸당한 후로 쿠에츠팔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