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관측(3)
루스계 공국, 바르샤바, 보헤미아, 리보니아로 구성된 대규모 다국적군이 프로이센의 동쪽 국경을 강타한다.
이보다는 그 치열함이 덜하지만 수오미와 칼마르 국경에서도 거센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물론 로마 제국의 군대가 있다.
로마인들은 북극해에 가까운 먼 북쪽에서부터, 지중해와 닿는 알프스의 남쪽 끝까지, 유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전선에 넓게 배치되었다.
물론 주전장은 알프스, 로마인들은 ‘알피나’라 부르는 산악지대였다.
빈이 함락된 이후 프랑스 남부부터 알레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이 로마 제국의 직접 공격에 노출되었다.
서유럽 동맹의 구성국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신성 제국이라고 해도, 로마 제국의 공세에 맞서려면 전력 대부분을 이 전선에 투입해야 했다.
프로이센이나 칼마르 등 동맹에도 병력을 보내긴 했지만, 여기는 브리튼에서 오는 지원에 더 의존해야 한다.
서유럽 동맹은 프로이센과 바르샤바 간의 휘어진 국경을 이용, 북쪽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남쪽 슐레지엔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어 그 안에 든 적을 포위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정예함과 브리튼 무기의 선진성과는 별개로, 이 전략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보헤미아의 존재였다.
보헤미아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의 턱밑이고, 게르마니아 전체로 보아도 쑥 파고들어 온 곳에 있다.
당연히 이 돌출부를 먼저 제거하기 위한 서유럽 동맹군의 공세가 있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지형에 요새화까지 철저했건만, 서유럽 동맹군은 그것을 압도적인 공세로 뭉개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판단이 착각으로 결론 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빈을 함락시켜 여유가 생긴 로마 제국의 병력이 보헤미아를 지원하기 위해 들어왔고, 서유럽 동맹군은 여기서 무의미한 희생만을 계속 쌓았다. 폭탄과 각종 장비를 낭비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바르샤바 국경에서 동유럽 군대를 포위 섬멸해보겠다는 서유럽 동맹군의 야심은 처음부터 비틀거렸다.
공세를 막아낸 보헤미아의 북쪽 국경에서부터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벨리사리우스의 압도적인 능력도, 이단 전력의 우위나 기술적 우세로 인한 것도 아니라, 순전히 전략적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서유럽 동맹군은 전략 수립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각국 군대끼리도 손발이 맞지 않았다.
프로이센 육군의 정예함은 온 유럽에서 유명했지만, 그 전술적 강함이 전략의 실수를 만회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를린이 위협받는다고 느끼자마자 프로이센은 그쪽의 방위를 강화했고, 그 바람에 공세를 시작할 슐레지엔 방면 사이에 육군의 배치가 얇아졌다.
로마와 보헤미아군, 바르샤바군은 바로 그 지점을 뚫었고, 그 바람에 슐레지엔 동쪽 끄트머리에 집중되었던 공세 역량이 오히려 포위되고 말았다.
이 포위망을 뚫고자 바르샤바 국경 전체에 걸쳐 또다시 무모한 공세가 펼쳐졌지만, 이미 속속 도착한 루스계 공국들의 병력이 전선들 뒷받침하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베를린 턱밑이 위협받자 프로이센의 통수부는 우왕좌왕하는 추태를 보인다. 그런 모습에 답답해진 동맹들이 프로이센 측을 다그치면서 손발은 더욱 안 맞기 시작한다.
정말 큰 문제는 베를린을 향한 동유럽군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는 데 있다.
“무슨 비난을 들어도 우리는 베를린 방위를 포기할 수 없소!”
적의 무자비함을 이미 보았기에, 프로이센 측의 반응은 더욱 신경질적이었다.
혹시라도 베를린이 빈처럼 포위된다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이 충분히 상상되지 않는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온 천사 같은 악마. 벨리사리우스와 그 노예들이 베를린을 태워버리리라.
로마인들은 다른 문명의 산물을 로마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정도로 취급하고 있으니까.
슐레지엔의 서유럽군이 섬멸당하는 동안, 그리고 베를린 근방에 방위력을 강화하는 사이 동유럽군은 전혀 다른 곳에 공세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발트해를 향해!”
그런 구호를 외치며, 프로이센의 현 수도 베를린과 옛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사이를 끊기 위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목표는 바르샤바인들의 언어로는 그단스크, 프로이센인들은 단치히라 부르는 항구 도시.
여기에 이제껏 본 적 없던 규모의 기갑사가 대략으로 투입되어, 프로이센군의 전차를 짓밟고 그단스크로 쏟아져 들어갔다.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포격 한 번 정도는 견디는 내구력,
전차를 뛰어넘는 기동성과 시야.
아즈텍 내전에 개입할 때도 충분히 교훈을 얻고, 그 교훈에 따른 대책을 수립했다고 생각했건만.
서유럽의 전략가들을 바보로 만든 그 돌진은, 어떤 관점에서는 로마 제국이 멕시카 자주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탑승한 이단에게 일어나는 ‘불가살 부작용’……. 부작용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보면 결국 이 또한 진보가 아닌가?”
인간의 파멸인화도 진보의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보는 벨리사리우스의 독특한 관점을 적용하면, 이런 방식의 전투는 진보한 인류가 구태 인류에게 가하는 철퇴이다.
로마 제국의 이단 기술자들, 관련 연구를 책임진 장성들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데 동의했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이단의, 혹은 인위적으로 이단이 된 사람들의 변이를 ‘희생’이라고 하지 않았다.
신의 은총이라고 불렀다.
벨리사리우스라는 신의 은총.
그리고 그걸 진심으로 믿고 전장에 나서는 자들이 있었다.
아직 이단이 되지 않은, 혹은 변이하지 않은 자들은 어서 자신에게도 은총이 찾아오길 바랐다.
***
멕시카와 다이온 간 전장에서 야수처럼 날뛰던 주견하를 담은 영상.
그것과 매우 닮게 변이된 기갑사 무리가 프로이센 국경을 헤집는다.
하늘에는 또 그것의 날아다니는 형상들이 커다란 날개로 겹겹이 감싼 우두머리 주변을 돈다.
기괴하면서도 신성한 광경이다.
게다가 그 숫자는 전쟁을 치르면서 점점 더 불어나는 것 같다.
서유럽 동맹군에겐 불행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불안은 옳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수가 늘어난다. 전장에 나타날 때마다, 아군도 휘말릴 위험을 감수하고서 집중 포격으로 없애는 데도 그렇다.
벨리사리우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인류 진화 실험의 위대한 진전이었다.
새롭게 진보시킨 인간일수록 완성도는 더욱 높아져 간다.
벨리사리우스는 한편으로는 신종화하는 인간의 폭주를 적절히 다스리면서, 동시에 전장에서 무수한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자신의 힘이 증대되는 것을 느낀다.
단순한 원리다.
죽음의 순간, 도저히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절망하는 순간 인간은 바란다.
다음 생애에는 부디…….
혹은,
고통뿐이었던 죄 많은 생, 신이여 거두어주소서…….
그들은 알까.
그들이 간절히 기도하던 신은 어떤 이단이 잡아먹어 버려서, 이제 더는 기도를 들을 수도, 굽어살필 수도,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을.
신앙은 그저 벨리사리우스에게 만족감을 줄 뿐이었다.
세상은 로마조차도 무의미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남는 것은 로마의 영광이 아니라, 진화한 인류의 새로운 터전이다.
누군가는 이 과정을 파멸이라 보고,
또 누군가는 진보라 보겠지.
벨리사리우스는 기다린다.
로마 황제의 순행을 기다리는 자들과, 로마 황제를 막으려는 자들이 맞이할 결과는 같기에.
먼 동방에서 손님이 오기를.
***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되었다.
발트해의 입구를 칼마르가 틀어막고 있었기에, 바다에서의 우위는 서유럽 동맹의 차지였다. 덕분에 일본 가마쿠라에서 멕시카군에게 일어난 비극이 여기서도 반복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마지막 병사와 마지막 장비가 배에 오르는 동안에도 동유럽군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니까.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군대를 실은 배가 아직 서쪽에 도착하기도 전에, 재편된 동유럽군의 공세가 마침내 베를린을 겨냥하고 시작되었다.
처절한 희생을 치렀음에도 적을 베를린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베를린은 포위되었다.
왕실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그들을 탓할 순 없었다. 로마 제국은 왕실이건 뭐건 가리지 않고 소각해버린다는 것을 아라비아 공략전에서 이미 보여줬으니까.
결국 베를린은 빈과 같은 운명을 피하고자 도시의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 제국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지치지도 않는 공세의 칼날이 이제는 신성 제국의 수도 엑스라샤펠을 겨냥했다.
***
“이번 작전이 끝나면, 나는 아마 더는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겠지.”
언제나처럼 명령에 앞서 상황을 설명하듯, 견하는 담담히 닥쳐올 운명을 말한다.
듣고 있는 지나가 어떤 기분일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하긴 자신의 최후조차 별다른 감흥 없이 말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럼에도 지나는 그것이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는 견하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싶다.
“전하께선, 작전이 마무리되는 대로 출격하실 겁니까?”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지나는 그의 말이 유언임을 직감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지나도 억눌렀다. 견하를 마음에 품은 날 이후로 늘 그래왔듯이.
그녀의 안에서 사랑은 곧 충의와 다르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신황 폐하의 무궁한 은혜니 뭐니 떠들지만, 지나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녀의 주군은 영원히 요왕 주견하일 테니까.
따라서 주군이 유언을 남긴다면, 그녀는 유언의 집행인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전하의 승하 이후 권력 승계 구상과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 이러저러한 조치를 취해뒀습니다…… 이런 말을 늘어놓아야 하는 심정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무엇에 빗대야 할까.
“태사의 자리는 최효윤 원수가 잇습니다. 하지만 태사의 업무는 이전보다 축소되어…… 사실상 신황 폐하의 친정 체제로 가게 됩니다.”
“선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벌어진 추태만 막을 수 있으면 돼.”
류성일도 안세규도 허망하게 끝장낸 것 같지만, 아주 조금만 방심했거나 행동이 늦었더라면 지금 태사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한 만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숙청 명단은?”
“작성해뒀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아니, 유 청장이라면 잘했겠지.”
이 작은 믿음 하나에 기뻐하고 마는 자신이 서글펐다.
“유언을 나라에 대한 것만 남겨선 안 되겠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와서 지나는 꽤 놀랐다.
그녀가 그렇게 반응하건 말건 견하는 품에서 목록을 꺼냈다.
고려 내전 시기부터 이런저런 공직을 맡았던 견하가 모은 재산 목록이었다.
유산 분배.
그 재산을 누구에게 남길 것인가가 덧붙여졌다.
장서와 돈은 신황, 최효윤, 지나에게 골고루 나뉘었다.
견하가 리안과 함께하던 별장들은 루우에게 갔고,
편지와 저술 몇 가지는 효윤에게 주어졌다. 아마 효윤 개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다음 태사를 위한 거겠지.
그리고 지나에겐 한 작은 카페가 남겨졌다.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이곳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라고.
지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