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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35화 (535/541)

멸망관측(2)

1년이 채 걸리지 않은 전쟁이었지만, 세련을 붕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르게 보면 지혜로웠다.

아마 저항했다면 전쟁을 더 오래 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패배한다는 결말을 바꿀 순 없었겠지.

그 과정에서 양측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바라트 서북부의 주요 도시들도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바라트가 도발한 전쟁이니 장렬한 항전을 호소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이런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공산 정권에 인민들도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을 더 끌었다면, 다이온은 그만큼 자신들을 고생시킨 바라트에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겠지.

바라트 사람 모두가 굶어 죽든 말든, 얼어 죽든 말든 아대륙 내 모든 물자를 약탈해 멕시카와의 전쟁에 투입했을 것이다.

이미 2차 세계대전은 항복합니다, 라는 말 정도로 승자가 평화 협정 자리에 앉아주는 자비로운 전쟁이 아니었다.

전초전이었던 로마 제국의 아라비아 정복 전쟁이 보여주듯, 모조리 불태우고 짓밟아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렇게 자비롭게 협상 자리에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다이온이 제시할 조건은 다음과 같소.”

세련은 해체한다.

호레즘, 사마르칸드, 후라산, 카불, 페르시아는 다이온과 서로 어떠한 배상도, 영토 할양도 없이 평화 협정을 맺는다. 이 나라들이 새로 연합체를 구성할지 여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단, 그 연합체에 바라트계 국가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

다이온은 위 5개국의 주권을 존중하며, 그 어떠한 정권 교체 시도도 하지 않는다.

바라트 정부는 즉각 해산하고, 무굴 파디샤의 복고를 받아들인다.

무굴 파디샤의 공식 칭호는 ‘구르카니 파디샤’로 정한다. 국호 역시 이후 구르카니라고만 부른다.

구르카니는 델리를 수도로 한 바라트 서북부를 영토로 한다.

바라트 동북부에는 벵갈 인민공화국의 건설을 인정한다.

바라트 남부에는 데칸 인민공화국, 랑카 인민공화국의 건설을 인정한다.

이 나라들의 경우에도 다이온은 불간섭 원칙을 지키지만, 이들이 페르시아, 호레즘, 사마르칸드, 후라산, 카불과 제휴하는 것은 전쟁을 재개할 의사로 간주한다.

벵갈, 데칸, 랑카 인민공화국은 통일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형태의 통일 시도도 다이온에 대한 전쟁 선포로 간주한다.

구르카니는 이 협약에서 확정된 영토 외에 회복주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다이온에 대한 전쟁 선포로 간주한다.

버마에는 왕정을 복고한다. 버마는 다이온 연방에 가입한다.

다이온군은 구르카니의 영토에 주둔하지만 1948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한다.

세련, 바라트의 해체와 함께 새로 건설된 국가들은 치안 및 평화 유지를 위해 다이온군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이상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망명을 하든 구르카니에 남든 자유요. 단, 다른 지역은 몰라도 구르카니에서 공산당 활동은 불법이오.”

바라트 측 대표단은 힘없이 끄덕이고는,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당장은 세련과 바라트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슬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다이온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과한 조건은 진실로 ‘자비로웠’음을.

***

쾌락이라기보다는 슬픈 제의에 가까웠다.

몸은 사랑을 나누었다는 만족에 잠겨 있지만,

이게 사랑이기는 할까?

루우는 숨을 진정시키며 견하의 얼굴을 가슴팍에 바싹 당겨 끌어안았고, 견하는 루우의 등줄기에 번진 비늘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대로 누워 있는 침대 시트에, 두 사람의 땀이 배어들었다.

루우는 눈을 감은 채 견하의 향기를 맡았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도록.

죄책감은 리안을 배신했다는 사실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변이도, 고통도 멈췄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두 사람 사이에 생명이 들어섰다는 것.

아직 1939년 1월이었다. 견하의 생일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스물여섯.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열여섯 살에 만난 소년과 10여 년이 지나 부부가 되었다는 기쁨도 죄책감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나는 결국……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네.”

자식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보상으로 황위를 넘겨준다고 해도 이 기분이 사라질 것 같진 않아.”

너는 어떤 기분이야, 라고 루우는 견하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 일로 견하 역시 ‘혁세주화’의 속도를 늦췄으니까.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유지하겠다는 루우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죄책감도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기묘하다.

자식이 마련해 준 ‘시간’이, 그녀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멋진 황실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아이에게 다음 대의 신황이 되려면 어떻게 자라나야 하는지 가르치면서.

견하의 손이 루우의 등에서 떨어져, 위로 올라온다.

왼팔과는 다른 ‘사람의’ 오른손이다.

루우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들이 교차한다.

그리고 견하는…… 생각한다.

자식의 탄생을 보지는 못할 것 같다고.

***

알래스카 상륙작전에 대한 재논의는, 최고사령부에서도 견하와 효윤, 김천열 세 사람만이 참여했다.

“……전에 일본 간토 지역에 대지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간토 수복전 직전에 효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그랬지. 일본 정부가 제대로 복구하지도 못한 지역인데, 전쟁까지 덮치는 바람에 주민들만 불쌍하게 됐다고.”

견하는 김천열과 효윤에게 자료를 내밀었다.

“극비야.”

지진, 화산에 대한 긴 설명이 서장을 장식하는 문서였다.

두 사람이 자료를 훑어보는 동안 견하는 설명했다.

“아직은 가설 단계지만, 세계의 여러 산맥은 땅속에서 용암들이 꿈틀거린 결과라는 듯해. 그러다가 뭔가 잘못 뒤틀리면 지진도 나고 화산도 폭발하는 거지.”

“일본 열도도 해저에서 솟아난 거대한 산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 용암이 들어 있겠군요.”

“그 용암이 폭발하면 지진도 나고 화산도 터지는 거지.”

“백두산…… 도 예시로 나와 있네.”

“꼭대기의 천지라는 연못은 폭발의 충격으로 산꼭대기가 날아가 버린 거라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중요한 건 백두산쯤은 ‘따위’로 만들 수 있는 화산이 존재할 가능성이야.”

자료 페이지를 넘기던 효윤과 김천열의 손길이, 거의 동시에 멎었다.

아즈텍 대륙 서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내려오는 케찰코아틀 산맥.

“케찰코아틀 산맥 한가운데에 있는 유황과 온천 지대. 여기 자체가 거대한 화산이라는 설이 있어.”

자신의 의도를 두 사람이 충분히 추리할 때까지, 견하는 기다렸다.

“화산을 터트리거나 지진을 일으키실 생각이십니까.”

“폭탄을 억 단위로 퍼부어도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다른 방법이라면 시도해볼 수 있겠지. 얼마나 깊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공포를 통해 억지로 산맥 안의 용암 주머니를 건드려본다면 어떨까.”

김천열의 눈이 커진다.

“제가 지질학자는 아닙니다만, 그런 방법은 아즈텍 대륙 주민들의 반발을……!”

견하의 굳은 얼굴이 김천열을 향한다.

“나는 농담으로 멕시카를 절멸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야.”

김천열은 효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놀란 것 같긴 했지만 주견하를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가.

정말로 대륙 하나를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 셈인가.

“……피해는, 얼마나 될는지…….”

그렇게 말하며 김천열은 고개를 내리고 다시 자료를 살폈다.

어떤 폭탄도 그런 효과를 내진 못 하리라.

지진에 의한 아즈텍 대륙 내 건물 파괴는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지진 피해보다도, 화산 폭발로 솟아오른 화산재가 아즈텍 대륙 전토를 뒤덮어 인간의 호흡기 및 농작물에 극심한 손상을 가할 것이다.

멕시카의 농업은 전멸할 것이며, 호흡기 환자의 대량 발생으로 인해 멕시카 의료 체계 마비, 멕시카군 징병 체계 붕괴 등을 노릴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아즈텍 대륙에는 화산재가 태양열을 차단하면서 4년에서 5년 동안 겨울과 같은 기후가 유지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사망자는 막대할 것으로 추산된다.

다만 이러한 대륙 단위 재해는 행성 단위로도 영향을 끼쳐, 역시 북반구 전체에서 이상 기후가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이상 기후가 얼마나 지속될지, 어떠한 피해를 입힐지는 현재로선 추산하기 어렵다.

“우리도 피해를 입는다면……”

“다행스럽게도 카라코룸의 난방 체계는 완벽에 가깝지. 주요 도시에도 이런 방식을 도입한다면 추위는 큰 문제가 아니야.”

“농산물 비축은? 공급할 곳은 어떻게 할 거야?”

“봉래와 마자파히트, 라타나코신과 베트남이 협조하기로 했어. 대공황 시절을 전후해서 봉래의 막대한 풍작이 세계 경제에 꽤 골칫거리였지만, 이럴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 뭐, 한동안 입에 안 맞는 쌀을 먹거나 밀로 식사를 대체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더해, 바라트 평정으로 그쪽 정세도 안정되었으니 식량을 수입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방법은 있다.

“혹시라도 기아가 발생하면?”

“굶주리는 건 몽골이나 고려 사람들은 아닐 거야. 역외 국가들도 마찬가지지.”

누구를 굶겨 죽이겠다는 것인지는 그 말 한마디로 명확해졌다.

“수가 너무 많잖아, 솔직히.”

이건 한재연의 영향일까, 아니면 견하 본인의 잔인성일까.

효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견하는 화제를 옮겼다.

“꼭 성공한다는 건 아니야. 멕시카에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알래스카 상륙작전 전에 실행해야 해. 상륙 교두보를 마련하고 나서는, 멕시카군이 그랬던 것처럼 공간 도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적의 수도까지 단숨에 접근한다.”

그들이 우리의 수도를 노렸던 것처럼.

“우리는 쿠아우테목 시를 초토화할 거야.”

김천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유럽 동맹의 협공을 기다리지 않는, 우리만의 단독 작전인 겁니까?”

“서유럽 동맹이 벨리사리우스를 처리하는 동안 기다리면 멕시카는 준비를 마쳐버려. 그리고 준비가 완료된 멕시카는 이중전선을 능히 감당해낼 수 있는 나라지.”

적의 준비가 끝나기 전에, 대륙 하나의 주민을, 모든 생명을 끊어버린다는 각오로 공격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멕시카에서 몰수한 자원으로 벌충할 거야. 그런데 영토 분할 때 서유럽 동맹의 지분이 너무 크면 안 되잖아?”

견하는 턱을 쓸다가 덧붙인다.

“잉카 공화국과 마푸체 공화국, 독립 브라질 식민지에게도 편을 똑바로 들라고 윽박지르려면 이 정도 충격은 필요하지 않겠어?”

그러나 두 사람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견하가 이 작전을 계획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간이 없다.

아즈텍 대륙에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혀 놓고 나면, 아마도 간신히,

벨리사리우스의 목을 노릴 힘만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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