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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33화 (533/541)

무제한(5)

“요컨대 나와 폐하 사이에 자식…… 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견하는 오랜만에 적잖이 당황했다.

“곧 합하께서 폐하의 부군이 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정치적 배려’에 의한 것이겠지만…….”

“수단으로서의 혼인이야 할 수 있지만,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정말로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투글룩은 단숨에 핵심을 찔러 온다.

루우의 의료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는 만큼, 마음 상태도 알고 있을 터.

“폐하께서 합하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선대 태사…… 미리안을 생각해서다.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루우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은, 리안이 견하에게 보내던 것과 향만 다를 뿐이다.

향수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신황께서도 알고 계신가?”

“제가 합하께 알려드린 것 중에 폐하께서 모르시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나눈 이야기도 폐하께서는 알게 되실 겁니다.”

말문이 막힌 견하를 향해 투글룩은 쐐기를 박는다.

“당신이 죽고 나서도 폐하께서 살아계시려면 ‘닻’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견하가 스스로를 시스템의 부품으로 보듯, 투글룩의 차가운 눈빛 역시 이 독재자를 ‘루우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로 본다.

아마 시레문이 명령한 실험을 이행하면서도 이런 눈빛이었겠지.

투글룩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수 있는 건, 그 자신도 견하와 목표가 일치함을 알기 때문이다.

견하는 루우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투글룩을 함부로 제거할 수 없다.

“뭐, 저는 정치 쪽은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당신이 설계한 ‘신황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정도는 압니다. ‘후계 구도’가 명확해야 하죠.”

미리안은 한때는 루우의 사촌 동생 바이다르를 황위 계승자로 생각한 듯하지만, 신황 숭배에 약간의 흠결도 용납할 수 없는 견하는 역적의 자식을 풀어줄 수 없었다.

“당신의 자식이기까지 하다면 지지를 보내고 보호자를 자처할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

한 번 신수덕을 잡으러 마카오에 진입해 봤기에,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마카오 주둔 에스파냐군은 언제 다른 나라 군대가 쳐들어올지 몰라 벌벌 떨고 있다. 다이온군은 이미 그 사실을 안다.

다이온군의 신수덕 체포를 허용한 것도 그들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카오 주둔 에스파냐군 역시 본국이 서유럽 동맹의 침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둔군 중 일부는 로마 제국령을 거쳐 본토로 재배치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났다.

본국의 절망적 상황을 생각하면 마카오의 운명 역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멕시카는 브라질 식민지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을 뿐 동맹이 아니다.

로마 제국이 독립을 보장했지만 당장 에스파냐 국토를 방어해주긴 어렵다. 기껏해야 동유럽과 아프리카, 지중해에서 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지중해 서부, 서유럽에서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외교에서 실리만 챙기면 이런 꼴이 된다.

실리를 챙긴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사실은 눈앞의 이익에 침을 질질 흘려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명분…… 혹은 도덕이니 윤리니 의리니, 무시했던 것이 실상 진정한 ‘장기적 전망’이었다.

아즈텍 내전이 아무리 불리하게 돌아가도 혼자 발을 빼고 어설프게 ‘중립 외교’ 따위를 하려 들면 주변국의 미움을 살 수밖에.

중립 외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신뢰를 잃었다는 것.

믿을 수 없는 나라는 평정해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에스파냐의 왕실 ‘보르본’이 프랑스 ‘부르봉’과 같은 혈통임을 강조하며 신성 제국의 본토인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들먹였던 것도 이 사태에 한몫했다.

다시금 다이온 상륙을 노리는 멕시카가 마카오를 내버려 둘까.

혹은 이런 생각에 다다른 다이온이 멕시카가 상륙하기 전에 마카오에 ‘예비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에스파냐령 마카오 주둔군 사령관은 다이온 측의 최후통첩이 온 지 30분 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눈물을 쏟으며 국기를 내리고, 다이온의…… 고려 봉황과 몽골 소욤보가 섞인 다이온 국기가 올라가는 것을 바라본다.

주둔군은 무장 해제만 한다면 추방되지 않고 자유로이 마카오에 머물 수 있었다.

마카오에는 한동안 군정이 행해지다가 다이온의 번국인 보우슈엥에 병합된다고 했다.

***

브리튼, 신성 제국, 칼마르와 에이레에 이어 프로이센 대사까지 모두 모인 자리.

대사들을 외무성으로 부른 송인섭은, 그들에게 잠시 기다려달라 말하며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약속한 시각보다 늦게 오는 건 아마 일부러겠지.

협상에 있어서 누가 절박한 쪽인지, 어느 쪽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쪽 외교관 중에는 초조한 듯 준비된 자료 끄트머리를 매만지는 자도 보인다.

이윽고 태사 주견하가 나타나자,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간다.

주견하는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꺼냈다.

“마카오 점령으로 충분한 성의는 표했다고 보는데. 이제 구체적인 거래를 논의합시다.”

바쁘기도 하겠지만 이것도 주견하 특유의 협상 방법이겠지.

불쾌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 해도 감히 말을 꺼낼 순 없을 것이다.

주견하 본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도 있지만, 다들 ‘빈’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보고 들었을 테니까.

특히 프로이센 대사는 베를린이 그 꼴이 될까 봐 벌벌 떨고 있다.

신성 제국에서도 ‘엑스라샤펠에서 파리로 천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

“다이온 측에서도 로마 제국이 동맹으로서 그리 신실한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리라 봅니다.”

브리튼 대사가 먼저 그렇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이온과의 군사 동맹입니다. 다이온을 둘러싼 위기가 마무리된다면 로마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제2 전선을 열어주었으면 합니다.”

“로마 제국을 협공하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능력이 되는가 아닌가는 둘째치고, 바라트 전선과 멕시카 전선을 마무리 짓고 나서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말은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전쟁은 두 개다.

멕시카-다이온-세련 간의 전쟁이 하나.

서유럽 동맹과 로마 제국 간의 전쟁이 또 하나.

이 두 전쟁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멕시카와 로마 제국 사이에 비밀 동맹이 맺어졌다 해도, 멕시카가 서유럽 동맹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것도 아니다.

로마 제국이 다이온을 향해 선전포고한 것도 아니다.

다이온 입장에서는 자신들 앞에 놓인 전쟁만 정리하면, 유럽이야 어떻게 되든 손 놓고 있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다이온과 멕시카 사이에는 대양이 놓여 있습니다. 바라트가 빠른 시일 내에 정리된다 해도 대양을 건너는 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견하는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준비가 끝난 뒤에 대양을 건너 아즈텍 대륙으로 침공을 개시해도, 적의 저항은 만만치 않겠죠. 그러니…… 멕시카에도 ‘이중전선’을 강요해야 합니다.”

“그 말은, 먼저 로마 제국을 협공해서 처리하고 나면, 그쪽에서도 대서양에서 멕시카와 전쟁을 치러 주겠다?”

“예.”

“우리가 그걸 믿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 제국을 처리하는 데 실컷 피를 흘리고 나면, 우리 쪽 사정은 외면해버리는 것 아닙니까.”

견하의 바로 그 반박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유럽 동맹 측은 자료를 내밀었다.

수십 장의 사진.

두꺼운 서류.

사진을 직접 들어 살펴보면서, 견하는 서류의 내용은 그쪽에서 설명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벨리사리우스가 혁세주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은 아닌가, 우리 쪽 학자들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과, 지금 막 눈에 들어온 사진 때문에 견하는 동작을 멈췄다.

날개와 눈알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은…… 벨리사리우스의 모습.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천사 같은 형상들. 이것들은 벨리사리우스의 영향을 받은 이단이 변이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멕시카가 저지른 공간 도약 공격이나, 다이온이 겪은 칸발리크 사태처럼 이탈리아 사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걸 벨리사리우스가 매우 ‘적절한 시점’에 나타나 수습하면서 이탈리아의 민심이 로마 제국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지요.”

혁세주가 출현하지 않는, 그러나 혁세주 출현과 비슷한 현상들.

“그것은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혁세주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합니다.”

머릿속에서 조각들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벨리사리우스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견하는 그가 루우나 자신처럼 세상의 왜곡 때문에 변이하는 중이라 생각했다.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세상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고, 그 대가를 인간에서 가장 벗어났거나 신에 가장 가까운 영역에 도달한 인간들이 치르는 것이라고.

‘벨리사리우스도 뭔가를 했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만약 왜곡되는 자신들이, 왜곡되는 세상, 이 행성 자체가 혁세주화 하는 것이라면?

이미 혁세주가 되어가는 데 굳이 혁세주가 다른 데서 들어올 이유가 없잖은가.

“첩보에 따르면 벨리사리우스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단들도 자신과 비슷한 형상으로 변이시킨다고 합니다. 이미 각지에서 사체가 ‘파멸인화’하는 사례도 보고된 걸 보면, 벨리사리우스의 목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들 이단이나 파멸인, 혁세주 기술을 전쟁에서 이기는 데 쓰고 있다. 세상을 유지하는 규칙의 왜곡은 그 부산물이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세상을 망가뜨리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본인은 그게 세상을 진보시킨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바라트 전선을 정리하고 멕시카를 멸하여 미리안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단 말인가.

벨리사리우스가 살아있다면, 살아서 계속 세상의 규칙을 무너뜨린다면…… 남은 루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리안이 남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이 죽고 나서도 루우가 살아가게 하려면,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벨리사리우스를 죽여야 한다.

“로마 제국과 벨리사리우스를 처리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멕시카가 벌이는, 세계의 안정을 담보로 한 실험 역시 끝장내야 합니다. 이건 세계를 구하는 전쟁입니다, 태사!”

그러니 로마 제국을 정리하더라도 우리가 다이온을 외면하진 않을 것이다. 서유럽 측에서는 그렇게 견하를 설득한다.

다이온이 바라트를 향해 쏘아대는, 거리를 무시한 포격은 외면한다는 점에서 큰 설득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견하와 서유럽 각국의 대사는 ‘벨리사리우스를 죽여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태사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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