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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32화 (532/541)

무제한(4)

문득, 벨리사리우스는 옛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불태운 도시를 내려다봤다.

이것을 함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살과 파괴가 휩쓸고 간 도시도 시간이 지나면 음울한 일상으로 돌아갈 정도는 된다. 하지만 눈 아래의 광경은 폐허라고 부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주검, 이라고 표현하면 차라리 적절하리라.

“이로써 또다시, 대량의 죽음이 누적되었노라.”

벨리사리우스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양손을, 그리고 몸을 살폈다.

무언가가 안쪽에서부터 몸을 삼켜가는 느낌.

자신의 몸이 서서히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교체되어 가는’ 느낌.

그것은 먼 동방에서 루우나 견하가 느끼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그 감각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보의 환희.

인간을 벗어나 신의 길로 접어든다는 성취감.

황제는 이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신민들에게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신민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크리스트교 신자라 주장하겠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황제를 향한 신앙이 자리 잡아 간다.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그리스 신들에게도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다.

그처럼 황제는 뚜렷하게 신앙이라고 인식되진 않겠지만, 신앙의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것이다.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닌, 현세의 국가에 영광을 가져다 달라는 신앙.

그것은 혁세주를 부르는 힘이 되지 않고, 세상의 경계에서 벨리사리우스의 존재를 왜곡하는 힘이 된다.

벨리사리우스는 두 팔과 다리, 몸을 감싸던 날개를 최대한 펼쳤다.

고귀하게만 보였던 보랏빛이 오늘은 음산하게 퍼져나간다.

그 빛에 닿은 로마군 이단 몇몇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무기로 들었던 것이 녹아 없어지고, 대신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비명인가, 환호인가.

이단들이 공중으로 떠올라 벨리사리우스 근처를 공전한다.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얼핏 보기엔 신을 옹위하는 천사들의 움직임 같지만, 어딘가 이제껏 본 적 없던 머나먼 항성계의 움직임을 보는 듯도 하다.

아마 그 항성계의 항성은 불길하고 사악한 별일 것이다.

***

멕시카군의 장병들이 모래사장으로 달려간다.

그들을 추격하듯 다이온군의 화력이 쏟아진다.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죽는 멕시카군 병사가 있다.

권총을 빼든 채, 바다를 등지고 최후의 항전을 외치는 장교는 벌써 피와 고기로 만든 죽…… 비슷한 것이 되었다.

가까스로 바다로 들어선 자들에게도 총알은 아낌없이 쏟아진다.

수영이라도 할 듯이 첨벙 쓰러져서, 그대로 고개를 바닷물에 처박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난다.

정말로 수영을 하면서 더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자들은…… 운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총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오래 살겠지만, 이 해역에서 그들을 구조해 줄 선박은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밤까지 어찌어찌 버틴다 쳐도, 모두 체온이 떨어져 죽고 말 것이다.

항만 시설이 갖춰진 쪽으로 도망친 멕시카군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그들은 부서진 항구와 주변에 떠다니는 배의 파편들을 보고 절망했다. 총에 굴복했든 절망에 굴복했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자들도 있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거나 울부짖는 자들도 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진 탄환이, 울음을 뱉는 그들의 입…… 아래턱 위의 머리를 지저분하게 절단해버렸지만.

보급을 유지하지 못한 상륙 교두보의 최후는 그러했다.

***

가마쿠라 전선, 일본 열도 전역에서 올라온 승전보를 최고사령부의 신황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다이온 연방군 최고사령부는 원래 황궁 밖에 따로 마련되었었고, 신황은 황공하옵게도 몸소 행차해주시는…… 그런 형식이었으나 얼마 전부터 바뀌었다.

최고사령부는 카라코룸 황궁, 어전으로 옮겨갔다.

신황 폐하께선 높은 어좌에 앉아 계시지만, 그 모습은 볼 수 없다.

장성들이 서로 마주 보고 앉은 탓도 있고, 어좌 앞에 짙은 발을 드리운 탓도 있다.

신황은 발 너머에서 어두운 윤곽만을 드러낸 채, 장성들에게 질문하고 명령한다.

그 엄숙한 분위기 탓에 루우의 형상을 자세히 볼 수 없었던 장성들은 그저 ‘군인의 본분’만을 찾는 중이다.

“멕시카군을 일본 열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함에 따라, 군 전력 상당 부분을 그간 미뤄왔던 알래스카 상륙작전 및 바라트 전선으로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

신황의 옥음이 높은 어좌에서, 참모들이 앉은 아래로 내려온다.

루우가 지금 어떤 상태로 말하는지 모르는 장성들은, 기묘한 분위기 탓에 어두운 음성을 그저 신황의 위엄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바라트 격파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기껏 얻은 여유 병력과 물자를 양쪽 전선에 분산하면 그다지 큰 효율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견이 없었다.

불가피하게 다방면에서 전선을 열면서 적잖은 출혈을 강요받았다.

당연히 다이온군의 최우선 목표는 어떻게든 ‘전선을 줄이는 것’이 되었다.

감찰국과 세련의 구성국들이 접촉하면서 알티샤흐르 쪽 부담을 줄이고, 이번에는 멕시카군을 일본 열도에서 몰아내면서 전선을 하나 더 줄였다.

마닐라 측과 협력하여 그들의 항만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서태평양 일대에서 멕시카군의 추가 상륙 시도는 저지되고 있다.

이 방침은 옳다.

그러니 수정할 필요는 딱히 없다.

따라서 바라트 전선도 마저 없애고, 전력을 알래스카 상륙작전에 기울이는 거다.

최고사령부의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문제는,

“바라트 전선을 빨리 마무리 짓지 않으면 멕시카는 국토방위를 마칠 터. 우리 군이 그렇게 준비된 멕시카의 국토에 상륙할 수 있겠는가? 오늘 보고받은 일본 열도의 멕시카군 같은 최후를 맞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신황의 말씀대로였다.

일본 열도에 상륙한 멕시카의 대군이 무참하게 섬멸당했지만, 그것이 쿠에츠팔린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겠지만, 아직 멕시카 본토가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아즈텍 대륙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천만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득한 숫자다.

서태평양에 머리를 들이미는 적의 선박을 모조리 격침하고, 상륙한 적의 장비 역시 모조리 거둬들였지만, 그것은 장비 재고에 ‘공백’이 생겼음을 의미할 뿐이다.

잃어버린 장비는, 산업단지가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다시 생산할 수 있다.

산업단지가 미리안의 희생 덕분에 타격을 입었다 해도, 멕시카는 그걸 회복할 역량이 있다고 봐야겠지.

미리안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멕시카를 향한 공세는 서둘러야 한다.

천만 대군이 우글거리는 아즈텍 대륙에 다이온군이 아무리 많이 상륙해도 승산은 그리 크지 않다.

“서, 서둘러 일본 주둔군의 배치를 바라트 전선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장성들 틈에 섞여 최고사령부에 참여한 철도성 장관, 임병욱이 조아린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장성들이 각자 나름의 묘안을 짜내기 시작한다.

“바라트 각 지방 공산주의 지도자 중, 하르샤 정권에 동조하지 않는 자, 내심 아슬란의 실각에 분노하는 자들과 접촉하여 내분을 유도해보겠습니다.”

그들이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각자의 공산 정권을 수립하면, 어쨌든 다이온은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고 델리에만 공세를 집중할 수 있으니 이익이다.

중요한 건 저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선을 더욱 좁힐 수 있는가, 적의 전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이다.

“하르샤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은 자들도 델리 내에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지난 델리 포격은 충격적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어쨌든 공산주의 정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평화 협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도 있겠지만, 슬슬 ‘공산당은 틀렸다…….’라면서 무굴 파디샤의 귀환을 기다리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과 적절히 협력하면, 이쪽 전선을 빨리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황 루우 테무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감히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지도 못한 채 장군과 각료들은 신황이 지키는 긴 침묵을 견뎌냈다.

이윽고 신황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은 안도했다.

“바라트 전선은 다소 어설픈 마무리를 한다 해도 상관없다. 짐은 신속히 멕시카에 복수할 날을 바란다.”

***

“세계의 오염이 가속할수록, 폐하와 합하께 가해지는 부담 역시 증가할 겁니다.”

투글룩은 태사 주견하에게 덤덤히 사실을 고했다.

“오염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건 폐하께 가는 부담을 다른 곳으로 돌릴 방안이지.”

주견하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투글룩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루우나 리안보다 대하기 까다로운 인간이라는 건 충분히 각오하고 이 자리에 왔다.

무엇보다도 투글룩에겐 견하에게 밀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그렇게 자부한다.

카간이든 황제든, 아니면 이번에 새로 바꾼 이름인 신황이든,

시레문의 딸이 누리는 치세가 무사하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칸발리크 사태 때 시레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투글룩은 여기고 있었다.

“방법 자체는 간단합니다. 몇 가지 장치만 있으면 폐하께 가는 부담 대부분을 합하께로 돌릴 수 있습니다.”

세계의 왜곡이 가하는 부담은 가장 먼저 신종, 혹은 그와 유사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쏟아진다.

이 원리는 참으로 공평해서, 먼저 부담을 짊어진 자들은 얼마 동안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신종이야 ‘적응’이라는 형태로 이 부담을 견뎌내고, 루우나 견하는…… 몇몇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육체의 왜곡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이 인간에서 다른 종으로 거듭나는 ‘적응’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것들은 견딜 수 없는 건가.”

“예. 잠시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이가 무너지고 파멸인이 되면 다행이고, 그냥 소멸해버릴 수도 있지요.”

“……좋다. 내게 부담을 넘기는 쪽으로 ‘특별실’의 시설을 보강하도록. 예산은 충분히 배정하지.”

“하지만 그 경우, 역시 합하께서는 신종의 영혼을 지녔다거나 하신 건 아니기에 지금 이상으로 변이가 악화될 겁니다.”

“그 역시 각오한 일이다.”

“……신황 체제의 완성, 전쟁의 승리까지는 버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건 보통의 용기와 신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리안 사후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피를 뿌려댄 무자비한 독재자 앞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견하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이 자는 제 목숨을 위해 중요한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주견하의 독재 체제가 무엇을 위해 작동하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견하의 최후’를 전제로 한 질문에도 견하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합하께서 먼저 쓰러져버리시면 그 반동은 그대로 신황 폐하를 향합니다. 게다가 합하께서 버틸 수 있을 만큼 부담을 조절하려면 신황 폐하께 향하는 부담을 완전히 덜어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나?”

“……이 모든 문제는 두 분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붕 떠 있기 때문입니다.”

“붕 떠 있다니?”

“표현 그대로입니다. 두 분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계시지 않습니다. 신황께서는 말 그대로 신에 근접하고 계시고, 합하도 인간에서는 점차 멀어지고 계시죠. 따라서 두 분께는 인류의 세상으로 연결된 최소한의 ‘닻’이 필요합니다.”

“닻? 알아듣기 어려운 비유군.”

설명을 재촉하는 견하 앞에서 투글룩은 망설였다.

“저도 풍문으로 들은 바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외람된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새삼…… 얼마든지.”

“폐하의 돌아가신 모후께서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셨던 것은, 자식인 폐하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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