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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31화 (531/541)

무제한(3)

왼팔의 기계 같은 질감이 하얀 뼈처럼 변해 간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처럼 보였던 견하의 몸은 갑각으로 뒤덮여간다.

피부야 그렇다 치더라도 속에서 서서히 살을 먹고 자라나는 게 느껴질 때는, 고통스러웠다.

루우가 자신의 고통을 감추려 하듯, 견하도 자신의 고통을 루우에게, 지나에게 감추려 했다.

리안이 죽고, 멕시카의 공간 도약 공세를 무력화시키고, 신황 숭배의 포격을 델리에 때려 붓는 동안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이젠 심장 근처와 옆구리까지, 변이가 퍼져나갔다. 안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각종 장기도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인지, 그 결과 생을 다하게 될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뭔가가 될지…….

“벨리사리우스가 유럽 전선을 연 이후 더 심해졌어.”

견하는 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증상은 루우에게서도 일어나리라는 걸.

전혀 다른 구성원리지만, 두 사람 모두 세상과 세상의 경계에 걸터앉은 존재다.

세상의 왜곡이 끼치는 영향은 곧장 견하와 루우에게로 온다.

“이대로라면 둘 다 끝장이지.”

견하는 판단한다.

둘 다 살아남는, 혹은 인간성을 유지하는 그런 희망적인 결말은 없으리라고.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터.

견하는 누구를 살릴지를 망설임 없이 골랐고, 이제 그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자 투글룩을 불렀다.

죽은 시레문 카간을 섬겼고, 그의 유일한 딸이 정통 계승자라고 여기는 이 사내는, 주견하의 구상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

아름다운 도시 빈이 불탄다.

한때는 신성 제국의 주인이었던 자들의 도시. 프랑스인의 황제가 그들을 내쫓아 동쪽 변경 지대의 도시가 되었음에도,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곳.

그런 도시가 불탄다.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즉위 이래 로마 내셔널리즘은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주입되었다.

본래 콘스탄티누폴리 시민이라면 신학 논쟁을 식사에 곁들이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벨리사리우스 시대의 사람들은 아마 다른 특색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들은 ‘로마 제국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즉 로마 제국은 잃어버린 옛 영토와 그 땅 위에 건설된 나라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세계 속에서 로마 제국은 어떤 위상을 누려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전선의 병사들마저도 쉴 틈이 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 중에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에 심취한 이도 있었고, 점차 피폐해지는 정신을 그 화제로 덮어버리려는 이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 모두에게 합스부르크 황실의 수도였던 빈은, 그저 로마 제국령 다누비우스 강 근처의 요새 빈도보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자고 말하는 건 게르만 야만족들 뿐이지 않은가. 임페리움의 진군 앞에 빈, 빈도보나는 탈환할 요새 이상의 가치가 있던가?

야만인이라 해도 로마 문화라는 햇살을 쬐어주는 게 제국의 정책이라지만, 그 역시 ‘일단 정복한 후’의 일이다.

정복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로마군은 용서하지 않는다.

빈의 시민들이 도시를 요새화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기로 결의하자, 공격하는 로마군 역시 결의했다.

빈도보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리자고.

저항하는 자들이, 감히 ‘서로마 제국’을 참칭하던 자들의 수도가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주자고.

그 이데올로기적 살의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교들도 공유하는 것이었고,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무심한 승인 아래 무제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민간인 거주구라고 해도, 민간인들의 피난처인 것이 명백해 보여도, ‘도시를 지운다’는 목적에 충실한 포격이 가해졌다.

교회에도 포탄이 쏟아졌다. 오래된 교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교회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불타고, 깔려서 피를 토하며 죽는다. 내장과 뇌수를 흘린다.

-어차피 황제 폐하께 복종하지 않는 교회, 콘스탄티누폴리의 체계로 편입되지 않는 교회는 모두 이교도나 다를 바 없다!

거리를 숨 가쁘게 뛰어가며 대피소로 향하는 일가족이 보인다. 그 안에 어린아이가 있음을 확인하고서도 장교는 포격을 명령한다. 로마 병사들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다.

포탄에 흩어져버린 어린아이의 사지는 그저 ‘가증스러운 야만족의 새끼’가 남긴 흔적일 뿐.

계집아이였다면 미래에 야만족이나 낳아댔을 것이고, 사내아이였다면 미래의 야만족 전사가 되어서 처리하기만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까 야만족은 죽일 수 있을 때 최대한 죽여두자.

문명? 문화? 알 게 뭔가.

로마 문명 외의 다른 문명은 조잡한 습작이나 다를 바 없다.

습작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려도 완성품, 즉 로마 문명만 남는다면 그걸로 인류에겐 충분한 유산이다.

병사들이 진심으로 이 학살극에 가담했는지, 아니면 죄책감을 덜려고 그런 말을 되뇐 건지는 알 수 없다. 영원히 모르리라.

정말로 양심을 지키고자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 문명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병사들은 모조리 ‘비(非) 로마인’으로 취급되어 처형되었으니까.

그나마 장성쯤 되어야 양심을 지켜도 강제 전역 및 가택연금으로 끝난다.

물론 그들 모두, ‘너 게르만족 아니냐’는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진심이든 아니든, 빈 초토화 작전에 참여한 모든 장병은 결코 후회나 반성을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후회하고 반성하는 순간, 그들의 귓가에 명확한 정답이 들려올 테니까.

당장 상관과 전우들을 쏴 죽이고 턱밑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라, 라는.

***

빈 초토화 작전을 맡은 장교들이 눈살을 찌푸린 건, 이 작전의 비인간적 면모 때문이 아니었다.

포탄을 한계까지 소모하고, 포신이 더는 쓸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었는데도 도시 자체를 없앤다는 목표까진 아직도 한참 남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많은 물량을 투입해야 할지 계산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전선을 밀어붙이는 데 드는 양을 아득히 상회한다면 큰 문제다.

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중세나 근세에 지어진 건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중근세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튼튼한 건축’을 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짜냈다.

그 결과가 현대적 포격에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건물들이다.

항공기의 폭격도 도시 전체를 뜨겁게 달구긴 했지만, 아직 저항하는 무리가 숨을 잔해들까지 깨끗이 하진 못했다.

다 깨져버린 창문 속, 어두운 틈새에 적의 저격수가 있다. 그 저격수들이 진입을 시도하는 로마군을 노린다.

“집 하나하나, 방 하나하나 전부 공략하면서 가기엔……”

게다가 포위망이라는 것은 듣기에는 우세해 보이지만, 전쟁의 전체적 상황을 따져보면 딱히 좋은 게 아니다.

손무의 병법을 인용할 것도 없이, 포위에는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한다.

즉, 그만큼 많은 병력이 다른 전선으로 가지 못하고 도시를 포위하는 데 묶여 있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두고 현대 전략가들은 논쟁한다.

논쟁은 로마군 장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포위망을 유지할 수준으로만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전선에 투입하여 기동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다 포위망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적의 반격으로 포위망 자체가 무너져버리면 전선 부대들의 후방이 위험해지네. 게다가 포위된 도시는 그저 도시가 아니야. 철도와 도로가 주요 도시들 위주로 나 있으니 포위망을 좁혀 도시를 완전히 함락시켜야 전선의 보급이 유지된단 말일세!”

둘 다 옳은 말이라는 점이 전략의 어려운 부분이다.

군의 기동성을 중시하는 쪽은 보급이 다 하기 전에 적을 분쇄하고 점령지를 늘려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신중한 진격을 중시하는 쪽은 혹시 모를 적의 반격에 대비해 포위된 적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맞서야 한다고 본다.

두 의견의 팽팽한 대립은 하늘에 나타난 하얀 광휘로 인해 그쳤다.

모두가 멍하니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 혹은 천사의 형상을 올려다보았다.

“……황제 폐하다!”

“임페라토르! 임페라토르!”

환호하는 병사들의 머리 위를 수십 장의 날개로 겹겹이 둘러싸인 형상이 날아간다. 그 형상은 포위된 도시 중심의 상공에 멈췄다.

도시에 남아 있는 대공포가 열심히 그것을 겨냥하지만 닿지도 않는다.

형상을 둘러싼 거대한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대공포의 불길은 지상과 벨리사리우스의 중간 지점에서 사그라들었다.

수십 장의 날개에 박힌 무수한 안구.

벨리사리우스 주위를 도는 여러 겹의 원형 띠는 마치 천문 관측기구를 보는 듯하다. 그 띠들 위에도 안구가 박혀 있다.

문득, 그 모든 눈이 번뜩였다.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빛은, 그것만 보면 천상의 은총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에 남은 빈 시민들의 마지막 희망을 불태우는 광선이다.

돌무더기마저 녹아 흐르는 그 열기가, 멀리서 황제의 폭격을 관측하는 로마군에게도 전해진다.

이제 누구도 살아남지 못 하리라. 포위에 동원되었던 병력은 전선 보강으로 돌려지겠지.

장교들은 기뻐하면서도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도 전선에선 백만 단위의 군대가 격돌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가 나서서 도시를 소멸시킬 수 있다면, 이런 전쟁의 양상을 유지할 필요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단이 전차에 맞먹는 정도의, 전선을 돌파하는 선봉장 역할을 하던 시대를 지나, 옛 신화에나 나올 법한 싸움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시대.

이것은 퇴보인가 진보인가.

전쟁 양상의 진보라면 재래식 군대는 시대의 끝자락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퇴보라면 전쟁 역시 신화시대의 기준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시민의 군대에 뿌리를 둔 로마 사회는…… 이전과는 달라질까.

황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미한 혼란이 군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

벨리사리우스는 처음 자신이 이단이라는 걸 알게 된 날부터 궁금해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물론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은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총알을 튕겨내진 못한다.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이단은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자.

세상의 법칙에 묶여 있는 사람과 벗어난 사람이 존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세상의 모순은 시작된다.

권력자와 그 밖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다.

아버지 유스티니아노스 5세도 1차 세계대전 때는 많은 고생을 했다지만, 어쨌든 그 고생도 콘스탄티누폴리 황궁에서의 일이었다.

전선에서 온몸이 불타거나 찢기거나 터져 죽진 않았잖은가.

어떤 이의 삶은,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오간 이야기로 결정된다.

왜 그렇게 되는가.

세상에는 권력자에게 권력을 위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에게 의존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가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면.

마치 신처럼.

불완전한 인간에게 무제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낙원이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낙원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성장하면, 이 모든 모순은 해결되리라.

그게 벨리사리우스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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