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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30화 (530/541)

무제한(2)

“주르반 프로젝트라고는 했지만, 꼭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법은 없지.”

보고받은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견하는 효윤과 함께 황궁의 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시간의 신’에 걸맞게 원인에 상응하는 결과, 결과에 상응하는 원인…… 그 적절한 값이 주어지면 굳이 힘으로 문을 열 필요가 없이 ‘힘 그 자체’를 쏘아 보내는 것도 가능해.”

그게 이번에 확실히 증명되었다.

방수되는 적의 통신, 그 내용 속 혼란의 증가는 이번 작전이 꽤나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정권의 취약성을 티베트 침략으로 풀어보려던 것 같은데, 그게 좌절되면 취약한 정권 그대로 무너지는 법이지.”

그 무너지는 부분에 타협점이 있다고, 견하는 말한다.

“지금쯤 델리에는 어떻게 하르샤의 목을 잘라서 ‘사죄’를 할지 고민 중인 인간들로 넘쳐날걸.”

“그럼 그냥 정권 교체되는 대로 항복을 인정할 거야?”

“다른 공산국가들에겐 체제 유지를 약속했지만, 델리 정부는 아니야. 무굴 황제는 복위시켜야지. 물론 무굴 황제가 아대륙 전체를 다스리게 할 수는 없고, 델리를 중심으로 한 북서부에 나라를 세워 드려야겠지.”

견하의 구상은 이러했다.

티베트와 버마는 다이온 연방에 가입한다.

바라트 외 다른 공산국가들과는 따로 조건을 두지 않고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세계혁명연합은 해체.

바라트는 셋으로 나눈다.

남쪽은 데칸 인민공화국, 동북쪽은 벵갈 인민공화국.

“이 나라들은 지역 공산주의자들이 뭘 하든 그냥 내버려 둘 거야. 여기까지 관리할 여력은 없어.”

하지만 델리를 중심으로 한 북서쪽 지역은 아니다.

“무굴이 그쪽 발음으로 몽골을 뜻하니까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할 수는 없고…… ‘구르카니’라는 이름을 쓰게 할까 생각 중인데.”

구르칸, 혹은 귀레겐. 카간의 사위, 부마를 뜻하는 말이다.

황금 가문의 모계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이면서 동시에 카간의 사위였다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이름. 그 이름은 티무르 시대부터, 페르시아에서 힌두 아대륙으로 도망쳐 들어온 시대까지도 그 칭호를 자랑으로 삼았다.

“무굴은 아대륙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몽골 출신’이라며 불러준 이름이고, 구르카니가 정식 명칭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뭐…… 상관없어. 괴뢰로 삼을 나라와 분명한 서열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뿐이지.”

“그거야 견하 네가 알아서 하겠지. 당장 눈앞의 문제는 전쟁인데, 이대로 계속 바라트 주요 도시를 포격할 거야?”

“무제한 포격을 가해야지. 이런 방식으로 ‘신앙’을 모아서 힘을 쓰는 게 좋은 점이 하나 있어.”

“뭔데?”

“멕시카처럼 ‘문’을 여는 방식은 문이 열렸던 장소로 공격이 한정돼. 최소한 한 번 정도는 혁세주 소환의 ‘의식’을 치렀던 곳이었거나 해야 문을 열 수 있지.”

하지만 이번에 쏘아 보낸 ‘푸른 빛의 포격’은 달랐다.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었다. 목적한 장소에 숨겨진 역사가 있었는지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도시 포격뿐만 아니라…… 세련의 군대에도 재미있는 걸 보여줘야지.”

기대하라면서, 견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다른 감정을 제거하고 기쁨의 찌꺼기만 남아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제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견하는 화제를 돌린다.

“간토 섬멸전은 어때?”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성공적이야. 멕시카는 잉카 공화국 선박이라도 이용해서 보급 또는 탈출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다. 경고한 해역에 접근한 배는 국적과 용도를 따지지 않고 모조리 격침시키는 작전.

무고한 잉카의 뱃사람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쟁에 말려든다는 건 그런 거다.

전쟁터가 된 해역에 배를 몰고 들어왔으면 죽음을 각오해야지.

“대사관에서 항의했지만, 오히려 우리 쪽에서 ‘단교 당하기 싫으면 낭비된 어뢰 비용이나 배상하라’고 엄포를 놓았지.”

외교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친 언사였지만, 잉카의 대사는 일단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상륙한 멕시카군에게 물자를 보급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다이온에게 적대행위를 하는 것이니까.

당장 대사를 본국으로 내쫓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다이온은 자비롭게도 서태평양에서의 일이 아니면 묵인해 주는 중이다.

멕시카와 세련 문제에만 집중하느라 여력이 없는 것도 있지만…….

“여력이 없는 건 유럽 문제도 마찬가지지.”

“한 달이 넘었던가?”

신성 제국, 브리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동맹과,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전체가 유럽 대륙 한가운데에서 격돌했다.

서로가 서로의 사상자를 부풀리고 있지만, 어쨌든 양쪽 모두 10만 명대를 돌파한 건 확실하다고 추측된다.

유럽에서의 격돌, 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무대는 유럽뿐만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카르타고 서쪽으로 로마군과 서유럽 동맹이 충돌했다.

홍해와 동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나선 로마 제국 함대는 브리튼 함대와 격돌했다.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들고 있었다. 그들이 아프리카에 펼친 식민지는 진즉에 서유럽 동맹에게 넘어갔다.

브리튼의 식민지 주둔군은 앙골라, 무타파, 말리, 송가이, 콩고,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독립국가의 군대와 충돌. 당연히 원조를 위해 그 나라들에 파견된 로마 제국군도 말려들었다.

“실은 브리튼, 신성 제국 대사들과 얼마 전에 비밀 회담 자리를 마련했었어.”

견하의 말에 효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쪽과 제휴할 거야?”

“벨리사리우스가 우리와 멕시카 사이에서 줄타기했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도 딱히 지킬 의리는 없지.”

“저쪽이 내세운 조건은?”

“일단 성의를 보이라던데. 그래서 마카오를 점령할 계획이야.”

“에스파냐는 버리는 건가.”

“에스파냐에 감정은 없지만, 줄을 잘 섰어야지. 브라질 식민지 지켜보겠답시고 다른 서유럽 동맹을 배신하고, 멕시카와 로마 사이에서 서유럽의 균형추가 될 거라는 망상을 품은 나라에겐 가치가 없어.”

균형추 역할은 다른 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할 때나 효력이 있는 법이다.

로마도 서유럽도 더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구도 균형을 맞추길 바라지 않는데 균형을 맞추겠다면서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가장 먼저 끝장나는 법이다.

일본이 지금 그 꼴 아닌가.

“뭐, 혹시 모를 멕시카군의 마카오 기습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에스파냐는 중립국이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다가 멕시카가 먼저 그 중립을 무시해버리면 다이온만 손해다.

해안의 틈은 메워야만 한다.

“마카오를 점령해서 성의를 보이고 나면, 그다음은?”

“우리가 서유럽이 대(對) 멕시카 전쟁에 협력하길 기대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대 로마 전쟁에 협력하길 바랄 거야.”

“로마와 전쟁이야?”

“그럴 리가. 그러려면 내가 왜 ‘완충지대’를 만들었겠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공산국가는 유지시킨다. 이것은 단순한 선의도 점령지 관리를 회피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그 넓은 공간이 그대로 로마 제국과의 완충지대가 된다.

“간접적인 협력은 있겠지만, 로마와 직접 전쟁에 돌입하는 건 멕시카를 멸할 때까지는 아니야.”

“멕시카를 멸하고 나면?”

“그때는 로마라는 ‘전리품’을 나눠 가지러 가야지.”

효윤이 뭐라 말을 덧붙이기 전에, 견하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 간토 섬멸전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육상전이지만 바다에 수장시킬 것 같아.”

효윤의 표현대로, 간토 섬멸전은 멕시카군을 바다로 몰아내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퇴각하는 그들을 싣고 갈 배는 없었고, 있다고 해도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우글거리는 다이온 잠수함을 뚫고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물론 폭격기와 포격으로 육지에서 죽어간 멕시카군도 상당했다.

“상륙 후에 우리 군을 그렇게 밀어붙였던 게 공세 종말점이었던 것 같아.”

“그 이후로 물자를 비축하지도, 힘을 회복하지도 못했으니.”

“전장이 된 간토 주민들만 불쌍하게 됐지. 대지진이 일어난 후에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재건 정책도 내놓지 못했다던데.”

십수 년 전 일인 것 같은데 아직도 그 피해가 복구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때 견하는 초등학생이었고, 리안은 중학생……

견하는 멈춰섰다. 갑작스러운 정지에 효윤은 고개를 돌려 견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루우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아, 그래. 나도 장관 집무실에 있을 거니까, 다음 논의는 언제든지…….”

효윤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하면서 견하는 몸을 돌렸다.

***

찾느라 애쓸 필요는 없었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에서 ‘누구도’에 견하는 포함되지 않기도 했고, 애초에 황궁의 이 비밀 장소를 함께 기획한 사람이 견하였으니까.

적막.

지하의 드넓은 공간.

루우나 견하 말고는 드나들 사람 없는 이곳도 신황의 위엄을 세우려는 장식물들로 넘쳐난다.

물론 이것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세계가 루우의 영혼과, 영혼에 맞지 않는 육체에 가하는 부하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것들이다.

이미 이런 광경이 펼쳐져 있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 견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루우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운다. 두 손이 피범벅이 되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루우의 다리를 팔로 받치고, 몸 전체를 들어 올렸다.

“……왔어?”

마치 마중이라도 나온 듯한 어조로, 그러나 갈라진 목소리로 루우는 말한다.

“첫 공격에 이 꼴이야. 이러면 오래 못 버텨.”

“못 버티는 건 ‘사람’인 내 상태지. 사람인 상태에 미련을 버리면 못 버틴다고 할 수 없어. 그냥 사람이 아닌 뭔가가 되어가는 과정이지.”

“고통스러워하잖아.”

“고통이야 ‘사람의 육신’이 겪는 일이지. 지금도 똑똑히 느껴져. 이미 비늘이 난 부분이나 뿔은 아프지 않아.”

견하는 루우의 관자놀이에 돋아난 뿔을 보았다.

지금까지 혁세주니 신종의 씨앗이니 파멸인이니…… 온갖 기괴한 것들은 다 봐 왔지만 그게 가까운 사람, 루우에게서 일어나는 걸 보니 동공이 흔들린다.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뿔 끄트머리에, 작은 살점이 걸려 있다.

견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루우는 안심했다.

나는 아직, 이 남자의 인간성을…… 지키고 있구나, 하고.

잠들듯 의식을 잃은 루우의 몸을 침실로 옮긴다. 이 통로 역시 극소수의 인간만 안다. 견하가 홀로 신황을 호위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어떤 암살자라도 지금의 주견하를 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신황을 그녀의 방, 욕실로 옮겨, 옷을 벗기고 몸을 씻긴다.

알몸을 본다는 부끄러움보다도, 이런 상태의 그녀를 황궁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저히 보일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비늘과 뿔이 비집고 나오느라 살이 찢어진 자리에 말라붙은 피가, 물에 풀려 흘러내린다.

피가 욕실 바닥을 휘돌다 빠져나간다.

생각해라.

이대로는 안 된다.

리안처럼은…… 안 된다.

세 번째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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